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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범 선생의 첫 소설이자 제주4.3을 처음으로 소설로 다룬 작품 <까마귀의 죽음> 재출판 기념회가 5일 제주시 중앙로 각 북카페에서 열렸다. ⓒ제주의소리
김석범 선생 고향 제주서 <까마귀의 죽음> 재출판…“4.3 흔들기 말라” 메시지

27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선생은 고국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엄밀히 말해 독재를 옹호하는 정권으로부터다. 군사정권이던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8년부터 다시 유신시절로 회귀한 듯한 바로 오늘 박근혜 정부의 2015년까지, 세월은 27년이나 흘렀지만 국가는 소설가 김석범(金石範·90) 선생의 고향 방문을 다시 허락하지 않고 있다. 멈춰선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김석범이 남긴 기록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고향 땅을 떠나 평생을 일본 땅에서 살면서 글로써 ‘4.3의 완전한 해방’, '역사 바로 세우기‘를 부르짖어온 그의 혼(魂)을 잊지 않고 있다. 필생의 역작인 대하소설 <화산도>와 첫 소설 <까마귀의 죽음>이 올해 들어 모국에서 다시 출판된 사실은 이를 입증한다.

현해탄 넘어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을 향해, 김석범은 비록 함께 하진 못하더라도 변함없는 감사 인사와 함께 90의 나이에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는 불꽃같은 의지를 전했다.
 
“4.3 흔들기는 그들의 최후의 발악입니다. 이제는 4.3의 완전 해방의 바른 길을 막아설 수 없습니다. 그들의 최후 발악을 저 낭떠러지에 집어 던져야 합니다.”

김석범의 첫 작품 <까마귀의 죽음>(382쪽, 도서출판 각, 1만9000원)이 27년 만에 새 모습을 갖춰 고향 제주에서 재출판 됐다. 

<까마귀의 죽음>은 제주4.3을 다룬 최초의 소설이다. 미군 통역 일을 하면서 무장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청년 정기준을 주인공으로 핏빛 어린 1948년 4월 3일 이후 제주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20여 년에 걸쳐 완성된 대하소설 <화산도>의 마중물과 같은 의미 있는 작품이기에 선생 역시 이번 재출판을 기념해 고향을 방문하려 했다.

그러나 정부의 입국불허로 인해 발이 묶여 버렸다. 정부는 앞서 10월 13일 김석범 선생에 대한 여행증명서 발급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지난 4월 1일 첫 제주4.3평화상을 받은 선생의 수상 소감이 ‘반(反) 국가적 발언’이라는 이유에서다.

당시 선생은 수상 소감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반공이 국시인 대한민국, 그 정부의 정통성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제주도를 소련의 앞잡이 빨갱이섬으로 몰았다”며 “해방 전에는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파, 해방 후에는 반공세력, 친미세력으로 변신한 민족반역자들이 틀어잡은 정권이 제주도를 젖먹이 갓난아기까지 빨갱이로 몰아붙인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또 “이승만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표방했지만 과연 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을 바탕으로 구성한 이승만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수 있었겠느냐”며 “여기서부터 역사의 왜곡, 거짓이 정면에 드러났으며, 이에 맞서 단선·단정수립에 대한 전국적인 치열한 반대투쟁이 일어났고, 그 동일선상에서 일어난 것이 4.3사건이었다”고 4.3을 규정했다.

이 발언을 두고 새누리당 하태경 국회의원을 비롯해 보수·극우 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제주도 감사위원회가 4.3평화상에 대해 감사까지 진행하는 웃지 못 할 일까지 벌어졌다. 이후 김석범 선생의 수상자 선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정부의 입국 거부 결정으로 인해 김석범 선생은 10월 16일 서울에서 열린 <화산도>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하지 못했고, 5일 제주에서 열린 <까마귀의 죽음> 출판기념회에도 함께할 수 없게 됐다.

결국 5일 오후 5시 제주시 중앙로 각 북카페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동경 4.3을 생각하는 사람들’ 조동현 대표가 선생의 메시지를 대신 가지고 왔다.

여러분과 자리를 함께하면서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고 죄송합니다.

지난 4월 1일 제주 4.3평화상 시상식에서 한 나의 수상연설문에 대한 우익세력, 일부 미디어의 4.3흔들기, 심지어는 정부가 거기에 가담하는 취태(醉態)를 보인 것이 더욱 유감스럽습니다. 
결국 그들은 물러서게 된 대신에 ‘괘씸죄’로 10월에 서울에서 열린 <화산도> 출간기념 심포지움 참가를 위한 나의 한국 입국을 정부가 거부하는 수치스럽고 어른되지 못한, 역사에 누명을 
씌우는 행위를 하고 말았습니다.

평화상 수상을 둘러싼 4.3평화재단 사업에 대한 훼방 등 일련의 우익세력의 소동은 4.3의 
승리를 반증하는 것이며, 그들의 발악에 불과합니다. 4.3의 해방이 전진할수록 발악이 
심해질 수 있으므로 4.3의 완전해방을 위해 뒷걸음치지 말고 더욱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4.3흔들기는 4.3을 부정하고 반세기만에 겨우 얼어붙은 땅 속에서부터 햇빛 아래로 부활한 
4.3의 기억과 역사를 다시 없애려는 용서할 수 없는 움직임입니다.

젊은이들은 과거를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은 과거를 모르는 후대들에게 과거를 알리고 
상기시켜야 합니다. 어떻게 상기시킬 것인가. 우선은 부활한 기억을 다시 망각 속으로 암흑의 
땅속으로 떠밀지 않는 것.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산 자를 다시 죽은 자로 몰아넣게 됩니다. 
지금 움츠리고 있는 4.3흔들기 세력은 다시 역사를 왜곡하고 부활한 기억을 말살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후 발악입니다. 과연 그들이 진정한 역사의 발걸음에 
맞설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4.3의 완전해방의 바른 길을 막아설 수 없습니다. 

그들의 최후 발악인 4.3흔들기를 저 낭떠러지에 집어던져야 합니다.

나는 이번 서울에서의 <화산도> 출간과 제주에서의 <까마귀의 죽음> 출간을 역사적인 
큰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까마귀의 죽음> 그리고 서울에서의 <화산도> 출간에 
즈음해서 나의 소감이자 소망을 <까마귀의 죽음>의 저자의 말 한 구절을 인용, 대신해 
인사를 맺으려고 합니다.

‘4.3의 해방’이란 진상조사보고서에서 국가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학살 책임자에 대한 조치, 
아울러 평화공원에 누워 있는 백비(白碑)에 떳떳하게 정명(正名)을 해서 일으켜 세우는 일 
등으로, 그것이 바로 4.3을 한국 현대사에 자리매김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8.15 이후
해방공간의 역사 바로 세우기와 불가분의 역사적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김석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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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박경훈 도서출판 각 대표, 김수열 시인, 김석희 번역가, 김동윤 제주대학교 교수, '동경 4.3을 생각하는 사람들' 조동현 대표. ⓒ제주의소리
비록 주인공은 함께 하지 못했지만 선생과 크고 작은 인연을 맺은 도민들은 출판기념회 자리를 가득 채웠다. 

김석희 번역가, 김동윤 제주대학교 교수, 조동현 대표, 이문교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정문현 제주4.3유족회장, 박경훈 도서출판 각 대표, 양조훈 4·3평화교육위원회 위원장, 강창일 국회의원 부인 장용선씨, 김학준 이어도교육문화센터 이사장, 문무병 제주신화연구소장, 김수열 시인, 허영선 시인, 이종형 시인, 장일홍 작가, 출판사 보고사 김흥국 대표 등 수십 명의 참석자들은 선생이 맛보지 못한 고향의 빙떡과 막걸리를 대신 나누며 즐거운 추억과 27년이 지나도 나아가지 않는 조국의 민주주의를 안타까워 했다. 민중가수 최상돈 씨는 선생의 빈자리를 <잠들지 않는 남도>, <애기동백꽃>, <세월> 등 노래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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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마귀의 죽음>을 번역한 김석희 번역가. ⓒ제주의소리

1988년 <까마귀의 죽음> 번역에 이어 새 책에서도 번역을 맡은 김석희 씨는 “1988년 당시에도 까마귀의 죽음 출판을 기념해 축하자리를 만들려고 했지만 노태우 정권은 선생의 국적 문제에 시비를 걸어 입국을 불허했다”는 사연과 함께 그 당시 선생이 보낸 편지를 낭독했다.

“저의 몸은 마땅히 서울에 있어야 하지만 사정으로 일본에 남아있습니다. 분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이 이 순간을 맞이합니다. 비행기로는 두 어 시간 밖에 안 되는 길이지만 40년 만의 고국으로 가는 길이 막히니 현 정권(6공화국)의 꼴이 우습습니다. 재일교포의 입국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민주화라는 말을 아예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세월은 지났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은 셈이다. 김 씨는 “오늘은 또 그런 자리가 됐다. (김석범 입국 거부 조치는) 박근혜 정부가 스스로 어떤 정부인지 자인하는 꼴이다. 역사의 뒷걸음질을 목격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 책이 몇 년이 지나면 환갑이다. 그러나 아직 죽지 않고 다시 읽히게 된 것을 보면 4.3의 원혼들이 책 속에 담겨서 계속 살아있게 하는 것 같다. 다시 세상에 나온 <까마귀의 죽음>을 제주 작가들이 읽고서 4.3과 관련한 소설을 쓰는데 성찰하는 기회이자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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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마귀의 죽음> 평론을 쓴 김동윤 제주대학교 교수. ⓒ제주의소리
이번 재출판된 책에서 평론을 쓴 김동윤 제주대학교 교수는 “선생이 한국에 오시지 못한 상황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후퇴할 수 있구나’라고 느꼈다”는 안타까움과 함께 “<까마귀의 죽음>은 김석범 선생 스스로가 ‘나의 원점’이라고 말할 만큼 중요한 작품이다. <화산도>를 비롯해 김석범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더욱이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빛나는, 4.3을 말하는 책”이라고 소개했다.

김석범 선생과 함께 일본에서 4.3 바로 세우기에 힘쓰고 있는 조동현 대표는 “선생님은 최근에도 저와 새벽 2~3시까지 술을 마실 만큼 건강을 자랑하신다. 기억력도 저보다 좋다”고 웃으면서 “이번을 계기로 <까마귀의 죽음>을 다시 읽어봤는데 (4.3흔들기에 맞서) 싸우는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 4.3을 어떻게 보고 생각해야 하는지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며 “4.3의 위치나 투쟁이 무엇이었는지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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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의 입국 불허 조치로 참석하지 못한 김석범 선생의 메시지를 들고 온 조동현 '동경 4.3을 생각하는 사람들' 대표 ⓒ제주의소리

27년 만에 <까마귀의 죽음>을 세상에 다시 내보낸 박경훈 도서출판 각 대표는 김석범이란 한 명의 인물을 '씨앗'으로 표현했다.

“해방 이후 4.3의 기억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청소되면서 진공상태가 됐다. 남아있는 씨앗은 일본으로 이동했다. 40주기 4.3추모제도 일본에서 처음 열리면서 국내로 들어왔다. 그 씨앗을 한반도에 다시 전파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김석범 선생”이라고 평가했다.

박 대표는 “이번 <까마귀의 죽음> 재출판은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좋은 책이 사람들에게 계속 읽혀지길 기대한다”고 뜻 깊은 소감을 밝혔다. 

이 자리에는 김석범 선생의 <화산도>를 국내 최초로 완역 출간한 출판사 보고사의 김흥국 대표도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김 대표는 “<까마귀의 죽음>을 통해 탄생한 소설 <화산도>는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같은 반열에 오를 만한 내용과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출판사 보고사 역시 단순한 홍보 역할이 아니라 <화산도>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 중에 있다”며 “쌍둥이와 같은 김석범 선생의 두 책이 많이 읽히길 기대한다”고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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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보고사 김흥국 대표.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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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기념회에서 열창 중인 최상돈 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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