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범 칼럼] 이 정부에게는 열녀 논개의 후손들의 절개가 그토록 값싼 것이었던가

새해 같지 않은 새해

을미년이 가고 드디어 병신년의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새해의 밝음이 밝지 않고 새해가 새해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긋지긋할 정도로 유독 다사다난했던 지난해였다. 버티기만 해도 잘 지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던 한 해였다. 하지만 묵은해를 보내고 동녘 잿빛 하늘 한복판에서 새롭게 맞이하는 태양도 지난해의 앙금처럼 남아있던 암담한 기분을 좀처럼 가시게 하지 못한다. 새해의 첫날에 갖는 맹목적인 관념으로도 올해는 의례적인 희망과 기대를 기원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새해를 맞는 것이 두렵기만 한 것은 하릴없이 나이만 먹는 데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요즘 세상이 갈수록 거꾸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재작년 교수신문이 고사성어로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선정할 때만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얼마나 수치스런 평가였는가. 그래도 밑 사람들을 탓하면서 윗사람에 대한 우회적 비판을 한 것은 제대로 예의를 지키려는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유체이탈’이라는 그분만의 ‘전가의 보도’를 간과한 것이다. 급기야 교수들은 지난 연말 ‘혼용무도(混庸無道)’를 올해의 고사성어로 선택함으로써 비판의 칼날을 임금님으로 향했다.

부족하니까 사람인 것을

‘혼용무도’란 주관사인 교수신문의 설명에 의하면 “임금이 어리석고 무능해 나라가 어지럽고 각박해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리타분한 정치판을 넘어 “혼이 비정상”을 논하며 영계(靈界)까지 관장하는 듯한 특별한 대통령에게 이따위 말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당연한 반문이다. 진실과 원칙의 아이콘을 자처하는 임금이 어째서 어리석은 ‘혼군(昏君)’이며 무능한 ‘용군(庸君)’이란 말인가. 

그러나 나만이 진실하다고 믿는 사람치고 진실한 사람 없고, 나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치고 옳은 사람이 없는 법이다. 열심히 해도 항상 실수가 있는 게 인간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언제나 겸허히 자성(自省)하고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세다. 그래서 교수신문이 혼용무도를 선정한 주요 이유로 메르스 사태를 든 것은 설득력을 얻는다. 세월호 참사의 교훈을 정부의 수장들이 진심으로 반성했더라면 메르스 사태가 그렇게까지 악화될 수 있었을까.

상식의 비상식화

자신만이 옳고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유일신(唯一神)만의 특권이다. 자신을 완전체라고 믿는 권력은 “짐이 곧 국가”가 되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절대왕정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정부에서 진실의 척도는 ‘짐‘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로 인한 여러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들을 필자의 지적 능력을 넘는지라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다만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진실하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진실하지 않다고 낙인찍은 사람들과는 소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분과 진정으로 ’인간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는 현재로선 청와대 진돗개가 유일하지 않을까.

그러나 나라가 이렇게 어지러워진 것은 정치인들의 줄서기도 한 요인이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진실하게 보이려고 ‘오버’하다 보니 가치가 전도되고 정치가 엉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결코 ‘땅 파서 장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샤우론의 ‘악의 제국’을 종식시키기 위해 문제의 반지를 용광로에 던지러 가는 주인공 프로도의 모험에 있어 가장 큰 적은 바로 그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의 욕망이다. 국민들을 위한 신념은 온데 간데 없고 이러한 동물적 욕망만이 난무하는 우리 정치문화에서 ‘상식의 비상식화’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그분만을 위한 진돗개

그분의 진돗개가 되기 위한 여당 정치인들의 뜨거운 경쟁만 봐도 그렇다. “국민이 국민이 아니”라는 요상한 망발을 서슴지 않은 여당의 중진의원은 그 망발 덕분에 이 정부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승승장구할 것이 분명하다. 또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새마을운동과 창조경제, 그리고 국정화 교과서 등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에 맹목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명한 데 힘입어 일약 여당의 유력한 대권후보들로 물망에 오른 것은 아닐까.

여당대표도 빠지지 않는다. 그분에게 자신의 진실함을 보이기 위해 ‘가진 쪽 다 팔아가며’ 그가 쏟은 노력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비정규직 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는 개정안이 청년을 위한 것이고, 쉬운 해고제를 노동계도 원하는 “따뜻한 노동법안”이라는 그의 억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분만큼은 ‘립’ 서비스만으로는 자신의 진심을 입증하기가 턱없이 모자라다. 그분에 대한 대통령의 의심이 여전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와중에서 국민들은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상식의 비상식화’로 인해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할지 새해 벽두부터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다.

껌 값과 맞바꾼 논개의 절개

혼용무도의 정치는 지금도 멈출 줄 모른다. 지난 연말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와의 전격적인 타결을 발표했다. 이로 인한 위안부 할머니들과 국민들의 충격과 분노는 새해 들어서도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피해당사자들과 사전에 상의조차 없었다니 과연 이 정부는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또 쥐꼬리만 한 돈을 받은 대가로 일본정부로부터 공식사과도 받지 못한 채 서둘러 영구적인 문제종식을 선언한 것은 무엇인가. 그 돈 마저도 배상금이 아니고 재단설립을 위한 지원금이어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비웃음까지 사고 있다는 소식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웠던 한민족의 빛나는 자존심이며 자부심인 열녀 논개의 후손들의 절개가 한낱 100억도 안 되는 몇 푼의 돈과 바꿀 수 있는 그토록 값싼 것이었던가. 자칭 경제대통령이라서 모든 것을 돈으로만 생각한 결과였을까. 하지만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그까짓 돈 몇 푼이 없어 그동안 재단도 설립하지 못한 채 억울한 피해자들을 방치했는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이것을 대통령의 ‘용단’으로 극찬했으니, 그도 사실은 혼용무도의 ‘용’을 이용해 이 사상최악의 굴욕적 외교를 에둘러 비판한 것은 아닐까.

불모의 땅이 될 것인가

새해는 작년보다 더욱 볼썽사나운 고사성어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심각한 세계적 경기침체에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걱정이다. 지금까지 우리정부가 미국과는 거꾸로 금리를 인하하는 이른바 ‘초이노믹스’를 펼친 결과는 부동산 거품과 산더미 같은 가계 빚이다. 세금을 제외한 소득에서 원리금으로 갚아야 하는 비율이 평균 70%에 육박한다.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금리가 몇 차례만 인상되더라도 빚을 갚지 못하고 도산하는 가구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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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헌범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그러나 이것도 단지 예고된 사태의 씨앗일 뿐이다. 이외에도 많은 예기치 않은 위기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경제 위기만큼은 정부가 이미 현명한 대책을 세워놓았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세월호참사와 메르스 사태 등 각종 사고 때 정부가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면 국민들은 정말 새해가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간 대한민국이 호모 사피엔스가 더 이상 서식하지 못하는 불모의 땅이 될지도 모른다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정부는 제발 올해 연말에는 국민들에게 행복의 고사성어를 선물할 수는 없는가. 그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 김헌범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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