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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우리 곁으로 온다. 매주 한편씩. 시보다 사람이 큰 시인 김수열. 제주 섬에서 나고 자란 그가 30여년 정들었던 교단을 떠나며 시를 담은 도시락(島詩樂)을 들고 매주 월요일 아침, 독자들과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살다가 시가 된 제주 시인과 그들의 시를 김수열 시인이 배달한다. 섬(島) 시인들이 토해 낸 시(詩)가 주는 소박한 즐거움(樂)이 쏠쏠할 테다. 시 낭송은 시를 쓴 시인이 직접 맡고, 김수열 시인은 시 속에 살아 숨 쉬는 소리를 끄집어내 우리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닮은 시인의 목소리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가슴을 든든히 채워줄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 산책’에 <제주의소리> 독자들도 함께 동행하길 기대한다. [편집자]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島詩樂) 산책](47) 겨울, 자유여행권 / 김정숙

눈물 반 빗물 반 겨울의 침묵 앞에
두서없이 떠나려 하네
가쁜 숨 내려놓으며
안색을 바꾼 하늘이
진눈깨비 뿌린다

비워야지, 비워야지 수백 번 뇌이다가
갈만큼 가서도
부여잡은 갈 잎사귀
빤하게 물들지 못한
부끄러움 더 짙네

옷 몇 번 벗어야 비단 날개를 달까
추우면 추울수록
다투어 옷을 벗는
성판악 막 내린 숲에
갈참나무 서 있다

김정숙 : 『매일신문』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도 바람꽃』이 있음.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겨울산 한 번 찾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저 산은 아무 말이 없는데
대신, 바람까마귀들만 떼를 지어 요란합니다.
흰 색과 검은 색의 극적인 대비입니다.

비워야지, 비워야지 하는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결코 비울 수 없다는 말을 떠올립니다.
비워야겠다는 마음이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겨울산행.
비우겠다는 마음도 비우고 이 겨울, 저 산을 한 번 다녀와야겠습니다.
오르다 오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
더 오르자니 까마득하고 이대로 돌아서자니 무언가 허전한 그 경계에
갈참나무 같은 내가 서 있을 것입니다. / 김수열

김수열: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생각을 훔치다』, 『빙의』 등이 있음. 제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 시·시낭송 / 김정숙 시인
* 도시락(島詩樂) 배달 / 김수열 시인
* 영상 제작 / <제주의소리> 박재홍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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