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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우리 곁으로 온다. 매주 한편씩. 시보다 사람이 큰 시인 김수열. 제주 섬에서 나고 자란 그가 30여년 정들었던 교단을 떠나며 시를 담은 도시락(島詩樂)을 들고 매주 월요일 아침, 독자들과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살다가 시가 된 제주 시인과 그들의 시를 김수열 시인이 배달한다. 섬(島) 시인들이 토해 낸 시(詩)가 주는 소박한 즐거움(樂)이 쏠쏠할 테다. 시 낭송은 시를 쓴 시인이 직접 맡고, 김수열 시인은 시 속에 살아 숨 쉬는 소리를 끄집어내 우리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닮은 시인의 목소리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가슴을 든든히 채워줄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 산책’에 <제주의소리> 독자들도 함께 동행하길 기대한다. [편집자]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島詩樂) 산책](48) 겨울 텃밭 / 김연미


제2막 무대 앞에 관객들은 오지 않았다

흥밋거리 다 빠지고 에필로그만 남아 있는

저 남루 들깨나무가 겨울 텃밭을 지킨다


단 한번 클라이맥스 아직 남아있을 거야

색바랜 배경처럼 조명조차 받을 일 없이

대사도 지문도 없는 조연들만 남더라도


겨울 바람에 여무는 까만 뜻을 품었구나

생(生)의 마지막 장 빈 육신 내려놓다

불현 듯 깍지가 터진다, 봄의 씨앗 가득하다


김연미 : 『연인』으로 등단. 시집으로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이 있음.

겨울 텃밭은 관객이 떠나간 텅 빈 무대를 떠올리게 합니다.
관객이 없으니 배우들도 떠나고 없겠지요.
무대 뒤켠, 철거 직전의 소품처럼 
추레하게 서 있는 들깨나무 몇 그루만이 여기가 무대였음을 말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스산하기 그지없는 풍경입니다.

손바닥만한 텃밭으로 나가봅니다.
매화 몇 그루, 살구나무, 라일락 등이 이파리들을 다 내려놓고 온몸으로 겨울을 버티고 있습니다. 계절만이 아니라 이 시대도 겨울의 연속입니다.
그래도 봄은 오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언 땅을 뚫고 여린 새순을 내밀 듯 봄은 오고 있습니다.
배경처럼 서 있던 남루한 들깨나무가 마지막 순간 깍지를 터트립니다.
겨울바람이 품은 봄의 씨앗입니다.
그렇지요. 겨울은 결코 봄을 이길 수 없지요. / 김수열

김수열: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생각을 훔치다』, 『빙의』 등이 있음. 제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 시·시낭송 / 김연미 시인
* 도시락(島詩樂) 배달 / 김수열 시인
* 영상 제작 / <제주의소리> 박재홍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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