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②《사람, 장소, 환대》김현경 지음(문학과 지성사, 2015년) / 고영자 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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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장소, 환대》

긴급하게 장기이식을 해야 하는 두 명의 환자가 있다. 한 명은 심장이 필요하고 다른 한 명은 폐가 필요하다. 의사는 그들에게 안됐지만 여분의 장기가 없어서 수술을 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환자들은 의사의 무책임함을 비난하여 이렇게 묻는다.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아서 장기를 적출하면 될 것 아닌가? 희생자는 한 명이고 우리는 두 명이다. 두 사람의 목숨이 한 사람의 목숨보다 중하지 않은가?” 의사는 놀라서 대꾸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내버려두는 것과 멀쩡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다르다. 당신들을 살리자고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계속)” (261)

이 대목은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에서 생명윤리학자 존 해리스의 가상의 장치 ‘서바이벌 로터리(Survival Lottery)’를 소개하는 도입부이다. 만일 해리스의 주장대로 한 사람이 몸에서 적출한 장기로 여러 사람을 살리는 것이 공공복리를 위하여 최선(最善)이라면, 이때 국가(사회적 시스템)는 의사에게 살인을 허용하고, 공동체 구성원은 병원 측에서 필요하면 언제나 자신의 생명을 타인을 위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이 정책에 동조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라며 혹자는 웃어넘길지 모르지만, 만일 공공복리를 위해 ‘자기희생이 의무화된 사회’(263)라면 공동체 구성원은 어느 날 갑자기 호출되어 죽을지 모르는 잠재적인 희생자들이나 다름없다.

다행히 우리사회는 타인을 위한 ‘장기이식의 의무’는 아직까지 없다. 하지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저자 김현경은 그 예로 죽음을 전제로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 후쿠시마 원전 결사대(사고 처리에 동원된 이들은 수년 내에 암에 걸릴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누군가는’ 원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 고장 난 열기구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딜레마, 자일로 몸을 서로 연결한 채 절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등반가들의 딜레마 등을 들고 있다(266-7).

이처럼 우리의 일상은 누군가가 희생자로 ‘당첨’ 돼야지만 사회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상황들로 넘쳐난다. 이런 상황에서 해리스의 공리주의적 계산법에 기댄 ‘서바이벌 로터리’ 같은 파격적인 시스템 제안은 참으로 황당하기도 하지만 경쟁의 악순환을 겪는 현대사회의 흐름상 건성으로 들어 넘길 발상만은 아닌 것 같다.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는 크게 보면 ‘서바이벌 로터리’ 같은 공리주의 사상의 부조리함을 파헤치는 보기 드문 현대판 고전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 안의 모든 구성원은 사람이고, 평등하다고 부르짖으면서도 실상은 낙인과 배제가 횡행하는, 그러니까 교묘하게 ‘자기희생이 의무화’ 되어가는 현대사회. 그런 사회의 ‘사람·장소·환대’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책은 묻고 있다. 환대와 영구평화(칸트), 사회화된 인격(뒤르켐), 공동체 내 상호작용의례(어빙 고프먼), 선물과 환대(데리다) 등등에 대한 사유 또한 적절하게 호출되며 책의 논점을 탄탄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사람, 사람다움, 사람의 신성함’을 이해하고 정의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신성함은 함부로 범할 수 없다는 뜻인데, 이때 “이 신성함의 원천은 개체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갓난아기의 둘레에 금줄을 치고, 함부로 손댈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은 사회이다. 사람은 신성하기 때문에 (사회적) 의례의 대상이 아니라, 의례의 대상이기 때문에, 의례의 수행을 통해 비로소 신성해지는 것이다.”(246) 그러므로 우리가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그 사람 개체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깃든 ‘신성함=사회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장소’ 역시 성찰의 이유가 될 수밖에 없는 근거로 저자는 마르크스가 본 근대의 이중혁명에서 찾고 있다(282). 마르크스에 따르면 (봉건제) 주인의 땅에 예속되었던 노예들이 그 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도시의 노동자들로 모여들어 자유를 획득했는지 몰라도, 정작 그들이 땀 흘리며 살아오던 기억의 땅으로부터는 ‘뿌리 뽑힘(장소에 대한 상실감)’의 경험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작금의 국제 난민들 그리고 비자발적인 이주민 출현 문제 등과 연관시켜 볼 수도 있다.

한편, ‘환대’와 관련해서 이 책은 절대적인 환대(즉,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복수 하지 않는 환대)를 강조하고 있다. “(공동체) 구성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하는 것, 그들 모두에게 자리를 주고, 그 자리의 불가침성을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247)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공리주의적 사람관을 경계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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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문명의 환대 이미지: ‘아브라함과 세 천사들’ / B.E. 무리요(B. E. Murillo, 1617~1682, 스페인 화가). 중세 기독교 문명에서는 순례자나 이방인들을 무료로 재워주는 환대 행위가 이뤄졌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절대적 환대’란 신념이 한국인들에게 얼마만한 설득력을 가질지는 미지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엔 언급되지 않았지만, 칸트와 데리다 등에 의한 ‘환대의 철학’이 적어도 어떤 문화적 토대에서 가능했는지 정도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대부분 철학적 개념은 해당 문명의 문화적 신념과 관습이 빚어낸 어휘에서 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말 ‘환대’에 해당하는 말 hospitality(영어, 불어, 독어도 어원 구성이 동일)는 로마문명에서는 비로마인 즉 이방인(타자)을 로마인과 동등하게 받아들이는 제도(制度)에서 온 말이다. 그것이 중세 기독교 맥락에서는 순례자를 무료로 재워주는 (의무) 행위로 발전했다. 서구적 맥락에서 환대의 철학은 다름 아닌 이와 같은 환대 제도 또는 의례 전통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렇다면 이를 확장해서 한국(제주도를 포함한 각 지방)의 환대 전통은 어떤 의례·제도·축제·서사 등과 맞물리며 정착하고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을까? 자문해 볼 수 있다. 가령, 쉽게 떠오르는 말로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물 한잔이라도 준다’는 작은 베풂-환대 미덕은 어떤 문화적 맥락에서 생겼는지 등등.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독교 문명에 기반을 둔 서구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한때나마 삼무(도둑, 거지, 대문)로 상징되었던 제주사회에서조차 환대 미덕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는가 하면, 일부 주민들은 각종 토지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다든지, 심지어 ‘사람다움(사람자격)’의 기준 조차 계량화되는 현상이 도를 넘고 있는 현실이다. 바로 이처럼 공동체의 문화적인 신념이 무너지고 있는 위기에 인문학적 도전장을 던진 것이 바로 이 책 《사람, 장소, 환대》이다. / 고영자 미학자·번역가

 ▷ 고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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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및 재일제주인센터 특별연구원

일본 오사카대학 대학원에서 미학(예술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연구원 역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대학원 강사(미학) 역임.

현재, 근·현대 문화매체론, 제주미학론, 제주 ‘이미지’ 생성 및 변천사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크리스틴 조디스 저《미얀마 산책》(2008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2012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1845~1926)》(2013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도 항해·탐사기(1787~1936)》(2014년), 《구한말 佛語·英語 문헌 속 제주도(1893~1913)》(2015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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