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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우리 곁으로 온다. 매주 한편씩. 시보다 사람이 큰 시인 김수열. 제주 섬에서 나고 자란 그가 30여년 정들었던 교단을 떠나며 시를 담은 도시락(島詩樂)을 들고 매주 월요일 아침, 독자들과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살다가 시가 된 제주 시인과 그들의 시를 김수열 시인이 배달한다. 섬(島) 시인들이 토해 낸 시(詩)가 주는 소박한 즐거움(樂)이 쏠쏠할 테다. 시 낭송은 시를 쓴 시인이 직접 맡고, 김수열 시인은 시 속에 살아 숨 쉬는 소리를 끄집어내 우리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닮은 시인의 목소리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가슴을 든든히 채워줄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 산책’에 <제주의소리> 독자들도 함께 동행하길 기대한다. [편집자]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島詩樂) 산책](52·끝) 등대 / 김수열


가슴 깊숙한 곳에 빨간 등불 하나 켜놓지 않은 사람은 등대를 보았다거나 등대의 마음을 안다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어둠이 내려앉은 화북 바닷가 방파제 끝에 서면 항상 가슴 뜨거운 등불 하나 수줍게 서 있는데 어떤 사람은 갯바람소리에 귀 기울이며 추레하게 늙어가는 그를 보면서 언뜻 스쳐간 사랑을 떠올릴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내뿜는 담배연기만큼이나 아름다운 그러나 속절없는 옛사랑을 묵은 수첩 뒤지듯 들춰내겠지만 등대가 서 있는 그 자리에 서서 등대의 눈을 가져보지 않고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애타는 간절함이랄까 지독한 그리움에 대해 함부로 안다고 말해선 안 된다

바람이 불어도 시간은 흐르고 눈비가 와도 구름은 흘러 등대머리엔 하얀 서리가 내리고 하염없이 찰랑이는 바닷소리에 귀멀고 수평선 언저리에 걸린 집어등에 눈이 어둡고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바닷가 아파트 불빛에 키는 점점 작아져 더는 멀리 내다볼 수 없지만 등대의 눈을 가져본 사람은 닳고 닳은 비석처럼 서 있는 저 등대의 마음을 절절하게 알고 있으니 귀가 멀수록 사랑은 가까워지고 눈이 어두울수록 마음은 오히려 환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생각은 점점 깊어진다는 것을 그래서 등대는 언젠가 소복이 눈 덮인 물살 위를 삐걱거리며 돌아올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늙은 옛사랑을 위해 이 밤도 졸음에 겨워 가물거리는 눈을 비비고 비비며 기다림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김수열 :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생각을 훔치다』, 『빙의』 등이 있음. 제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도시락 산책>을 시작하고 어느덧 일 년이 지나 이제 마무리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육성으로 자작시를 낭송하면서 <도시락 산책>에 함께 동행해주신 제주의 시인 여러분께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 동안 제주의 많은 시인들의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저에게는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관심을 가져주시고 격려를 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 김수열

김수열: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생각을 훔치다』, 『빙의』 등이 있음. 제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 시·시낭송 / 김수열 시인
* 도시락(島詩樂) 배달 / 김수열 시인
* 영상 제작 / <제주의소리> 박재홍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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