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뒤흔든 ‘유지사건’ 진실 밝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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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의 4·3칼럼> (61) 제헌국회의원 선거 낙선 후 제주도지사에 취임한 김충희   

김충희.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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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대 제주도지사 김충희(1949.11.~1951.08.)
‘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 제주도지부 결성 만 1주년 기념대회는 거(去) 9일 하오 1시부터 이도리 불교 포교당에서 거행되었다. 먼저 국기경례, 애국가 합창, 묵상이 있은 후 박우상(朴雨相)씨의 개회사에 이어 국민회 확대에 이른 경과 보고가 끝나 임시집행부 선거로 들어가 긴급동의로 명예의장에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김규식 박사를 추대하고 의장에 김충희(金忠熙)씨를 선출한 후, 고정일씨의 국외 정세보고가 끝나자 긴급동의로 반탁결의문을 공위(共委)에 보내자는 의견에 일치를 보았고, 의장으로부터 국내 정세보고, 김덕준(金德俊)씨로부터 반탁운동상황의 본부 발표문 낭독이 끝난 후, 동씨로부터 반탁시위를 감행하자는 동의에 만장박수로 가결이 되어, 지방 정세보고 각계 인사의 축사가 있은 후, 위원장에 박명효(朴明效)씨, 부위원장에 고인도(高仁道) 고은삼(高殷三) 양씨, 집행위원에 고창기(高昌基)씨 외 60여명을 선정한 후 폐회하였는데 반탁시위 감행의 기세는 농후하였으나 간부의 제지로 평온리에 해산하였다.’-제주신보 1947년 7월 12일

‘입후보자 명부 (전략)제주도 : △남제주 양기하(梁基河․무․34) 오용국(吳龍國․무․44) 강성건(姜成健․대청․34) △북제주(갑) 김충희(金忠熙․독촉․59) 문대유(文大侑․독촉․41) 양귀진(梁貴珍․독촉․ 41) 김시학(金時學․무․70) △북제주(을) 박창희(朴彰禧․독촉․53) 김덕준(金德俊․대청․ 34) 임창현(任昌鉉․독촉․64) 양병직(梁秉直․대청․40) 현주선(玄周善․독촉․44) 김인선(金仁善․대청․27) (후략)’-동아일보 1948년 4월 18일

‘요즘 다시 험악해가는 제주도 사태에 관하여 그 편린(片鱗)을 짐작할 만한 소식이 제주도 독촉(獨促)지부장 김충희(金忠熙)씨로부터 독촉국민회 부위원장 명제세(明濟世)씨 앞으로 전해 왔는데 그 서한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러하다. “본도의 사태가 나날이 험악해져서 납치 또는 피살자는 매일 같이 속출되는 형편일 뿐더러 소위 경비대원이 본부대를 탈출하여 폭도측에 가담하는 자가 적지 않다. 북한으로부터 폭도의 수괴인 김달삼은 수로(水路)로 무기를 만재(滿載) 입도(入道)했다고 하는데 그 탓인지 습격과 봉화사건이 연발하여 민심은 극도로 불안해지고 이로해서 민족진영 지도자들은 요새 본토로 소개하는 인원이 수천명에 달하는 모양이다” 운운.(같은 기사 동광신문․현대일보 48. 10. 16)’-조선일보 1948년 10월 16일

김충희(金忠熙, 1890~1960)는 제주시 외도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1910년 사립의신(義信)학교를 거쳐 상경, 서울의 보성학당에 재학 중 나라를 빼앗기자 이듬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했다. 구좌면에서 1년여 사숙(私塾)의 교사로 재임하고, 외도에서 희문의숙(熙文義塾)을 개설해 숙장으로 후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며 청년운동을 주도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왜놈들이 으스대는 꼴을 보면서 시회(詩會)에 나가 다음의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지었다가 곤욕을 치렀다. “莫笑吾人 此地遊 世上風兆更何流 小身雖出半東島 豪氣放蕩大六洲 可畏南山薙子斤 桴恐北海釣人舟 天運巡還유知否 勿惜脫時百萬頭”(내가 이 땅 일본에서 노는 것을 비웃지 말라. 세상바람 징조가 어데로 흐를 줄 아느냐! 이 작은 몸 비록 제주섬놈이지만 내 호탕한 기운이 육대주에 얽매랴! 산에서 푸나무하는 도끼를 무섭다할까 뗏목인들 북해에서 낚시배를 두려워 할까! 천운이 돌고 돈다는 것을 뉜들 모르랴 굴레에서 벗어날 때 백만두인들 아깝지 않으리) 

해방 후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조직될 때 제주도위원장이 돼 이승만 노선에 동참했다. 대한독립촉성회는 1946년 2월 8일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촉성협의회와 김구(金九)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가 통합해 탄생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제헌국회 총선에 전체 의석의 27.5%인 55석을 확보했다. 김충희도 북제주(갑구)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김충희는 임시정부 요인 김구(金九)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 등과도 교분이 있었다. 그는 초대 도지사가 경질될 때부터 줄곧 도지사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가 제5대 도지사로 부임한 것은 1949년 11월 15일이었다. 도정의 방향은 4·3피해 복구를 우선 과제로 삼아 대중앙 절충에 정치역량과 행정력을 집중시켰다. 제주도부흥위원회를 만들어 전도지사 임관호(任琯鎬)에게 위원장직을 맡겼다. 도지사 부임 전 도청이 소실(燒失)되어 관덕정을 임시 도청사무실로 사용하였으나, 비좁아 후보지 물색에 신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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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북교에서 열린 해병4기 입대식.

결국 현 제주시청자리로 결정을 보고 ‘도청건립 11인 위원회’를 구성해 추진 중 한국전쟁으로 사업이 유보됐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해병대사령관이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을 겸임했다. 사령관에 해병대령 신현준(申鉉俊)이 임명됐다. 피난민 수만 명이 몰려오고 전쟁고아가 공수돼 제주농업학교에 수용됐으며 쌀은 부족하고 생필품은 공급이 극히 어려워졌다. 이런 때 제주도유지사건이 발생해 도민을 경악하게 했다. 유지들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는 무고(誣告)로 계엄사령부에 구금된 것.

1951년 7월말 육군제5훈련소가 제주주정공장에, 제1교육대가 모슬포에, 제2교육대가 한림에, 제3교욱대가 제주주정공장에, 제5교육대가 제주농업중학교에 각각 설치되고 각 중학교 학생들은 해병대에 지원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이 무렵 피난민의 수는 14만8794명이었으니 정부에서도 사회부제주도분실(분실장 최승만)을 설치, 피난민 구호사업에 특별한 조치를 내렸다. 이러한 구호사업에 도청과 사회부분실과의 갈등이 심해 같은 해 8월 1일로 사표를 제출하자 후임으로 최승만이 도지사로 임명됐다. 김충희는 퇴임 후 1953년 11월 국민회제주도지부장을, 또 1954년 1월 자유당 제주도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경남지사 문시환(文時煥)씨의 사퇴와 제주지사 김용하(金容河)씨 면직에 따르는 경남, 제주, 강원 3도 장관의 임명이 15일부로 발령되었는데 경남지사에 현 강원지사 양성봉(梁聖奉)씨, 제주지사에 김충희(金忠熙)씨, 강원지사에 최규옥(崔圭옥)씨가 각각 임명되었다. 그런데 제주지사 김충희(60)씨는 제주도 출신으로서 현재 국민회 제주도지부장이며 강원지사 최규옥씨(49)는 강원도 춘천군 선출 일민구락부 소속 국회의원이라고 한다. (같은 기사 경향신문․조선일보 49. 11. 17)’-동아일보 1949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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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0선거에 참여하는 제주도민들의 모습.

대동청년단, 진압대의 일원으로 활약

‘이청오(李靑午) 장군을 영수로 한 대동청년단은 그간 경향 각지에서 우익 각 청년단체 및 중간 청년단체가 통합하면서 결성될 것은 이미 주지하는 바이거니와 제주도에서 독청(獨靑) 및 광청(光靑)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지단부 결성주비위원회를 조직하고 9월 2일 이래 독청과 광청간 수차에 걸쳐 통합에 대한 논의를 거듭하여 오던 중, 거(去) 9월 30일에는 광청 중심인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단부 결성식을 거행하고 역원까지도 이미 본지에 기보한 바이어나, 거(去) 10월 3일엔 독청 중심인 대동청년단 제주도단부결성식이 조일구락부에서 각 면 대의원 참석 하에 성대히 거행되었는데 독청 대변인은 여좌히 말하였다. “광청과의 의견 불일치로 말미암아 각기 대동청년단이 결성되게까지 된 것은 유감이나 목하 중앙에 그 주선을 의뢰중이고 당분간 이대로 꾸려갈 것이나 장차는 대동단결될 것이다 그리고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단부에 독청 일부가 참가했다는 것과 선전부장에 고정일씨 피선은 전연 사실무근이다.” [제주신보 1947년 10월 10일 정정 : 본지 6일 2면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부 결성」 기사 중 ‘이청오(李靑午)장군’은 ‘이청천(李靑天)장군’의 오식이옵기로 자에 정정하나이다.‘-제주신보 1947년 10월 6일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부가 독청(獨靑)을 중심으로 지난 2일 결성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동일 피선된 역원은 여좌하다. 위원장 김충희(金忠熙)씨, 부위원장 김덕준(金德俊)씨 강성건(姜成健)씨, 집행위원 고원찬(高元燦)씨 외 38명, 상임위원 11명.’- 제주신보 1947년 10월 10일    

‘성명서/ 쌍방의 견해차이로 인하여 결렬되었던 대동청년단 통일문제는 거월 21일 독청(獨靑) 대표대회에서 상호 양보정신 밑에 완전 합의를 보았사오니 동지 제위들은 용기백배하여 자주독립 전취에 일로 총진군하여 주심을 앙망함. 대한민국 29년 11월 4일/ 독청(獨靑)대표 김충희(金忠熙)/광청(光靑)대표 김인선(金仁善)’-제주신보 1947년 11월 8일

‘지난 21일 하오 2시 북국민학교에서 대동청년단 도단부 임시대회가 관하 7개면(4개면 불참가) 대표 약 100명과 본도 역원 다수 참가한 가운데 고원찬(高元贊)씨 사회로 개회되어 전원 기립으로 국기경례 묵상 애국가봉창이 있은 다음, 단장 김충희(金忠熙)씨의 개회사에 이어 부단장 김인선(金仁善)씨의 경과보고가 있었고, 임시집행부 선거로 들어가 고원찬씨를 의장으로 추천한 다음, 의장 고원찬씨로부터 일반 정세보고가 있었다. 다음 토의사항에 앞서 지난 13일 도단부 역원이 사의를 표해 왔는데 대하여 임원 개선이 있었는데 선출 방법은 무기명 투표제로 하는가, 전형 위원제로 하는가에 약간의 분의(紛議)가 있었으나 결국 무기명투표로 단장을 선출하였는데, 최고 득점은 김인선씨가 30표로 단장에 선출되었고 기타 역원 선출은 당장(當場)에서 도위원을 각 면 대표 2인, 읍 대표 6인으로 구성하여 이에 임하기로 하고 임시 단장 취임사가 있었는데, 다음 토의사항에 들어가 시간관계로 조직강화 재정대책 등 문제는 도위원에 일임하여 기타 식순에 들어가 만장일치로 구 단장 김충희씨를 고문으로 추대하였고 김충희씨의 사임사가 있은 다음 동 씨 선창으로 만세삼창을 하여 하오 6시경 폐회하였다.’-제주신보 1947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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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우파진영에서는 8‧15 직후 홍순녕(洪淳寧)을 중심으로 건준 운동에도 참여했으나 점차 좌파세력에 밀렸다. 좌파세력에 밀렸던 우파진영은 반탁운동을 통해 다수의 대중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1945년 12월 26일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주도지부가 발족됐다. 위원장은 박우상(朴雨相)이 맡았다. 이 무렵 우파진영에서 활동한 인물들은 박명효(朴明效), 강지수(康芝洙), 홍순용(洪淳容), 홍순녕, 김근시(金根蓍), 박종훈(朴鍾壎), 김충희, 김희수(金希洙), 황순하(黃舜河), 문재숙(文在淑), 박치순(朴致順) 등 이었다. 우파진영은 세력 확장에도 1947년 초까지 좌파세력에 밀렸다. 우파진영은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3월 21일 방첩대 보고서에 의하면 제주도의 우익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독립당 제주도지부는 조직도 빈약하고 자금 면에서도 결핍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두 당은 섬 전체적으로 약 1,000명 가량의 당원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 우익 정당들은 좌익계의 강한 반발에 부닥쳐 정치적 활동을 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486, March 22, 1947.

1946년 3월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제주도지회(위원장 김충희)가 처음으로 발족됐으며 1947년 2월에 광복청년회 제주도지회(단장 김인선)가 창립됐다. 이들 두 단체가 1947년 10월 대동청년단으로 합쳐졌다. 대동청년단 단원들은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압대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양측은 11월 4일 공동으로 대청으로의 통합 성명을 발표하고 12월 21일 대청 제주도단부 임시대회를 열어 단장에 김인선을 선임하고 김충희를 고문으로 추대함으로써 분열상을 매듭지었다.  

이밖에 1947년 11월 서북청년회 제주도단부(위원장 張東春), 그 해 12월에는 조선민족청년단 제주도단부(단장 白璨錫)가 결성되었다. 제주도 우파진영은 1947년 3‧1사건 이후 좌파세력에 대한 검거선풍이 일면서 좌익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자, 더욱 활기를 띠고 세력 확장에 나섰다.  

처음 미군정은 표면적으로 좌‧우익에 대해서 똑같이 대우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제주도 관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1947년 8‧15 기념일을 앞두고 실시된 좌익 검거사건은 그 시발이었다. 8월 12일 새벽부터 경찰은 좌파세력에 대한 검거작전에 들어갔다. 경찰당국도 8월 14일부터 민전 간부와 남로당원, 공무원 등에 대한 일제단속에 나섰다. 검거된 사람은 제주도청 공무원 8명을 포함해 민전 간부와 세무서 직원, 도립병원 의사와 간호사, 우편국 교환수 등 20여명에 이르렀다. 구금된 인사 가운데는 초대 도지사를 지냈던 박경훈도 포함돼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제주도는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층 지도자들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다. 좌익인사들은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으며, 소위 좌익분자라고 불리우는 인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은 국내외적 정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익이나 좌익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종류의 선전선동에 쉽게 휩쓸린다. 우익인사들은 ‘빨갱이 공포’를 강조하며 주로 청년단체와 공직에서 좌익인사들의 척결을 통하여 섬을 장악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를 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의 테러는 우익이 선동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주도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다.”- Hq. USAFIK, G-2 Weekly Summary, No. 123, January 23, 1948.  

‘도민의 총력을 집결함으로써 다난한 시국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민회 도위원장, 대한부인회 도회장, 한청 도단부 단장, 여한청 도단부 단장, 도 문교사회과장, 북제주군수 등의 공동 발기로 작 1일 상오 10시부터 한청 삼도리 단부 사무소에서 도지사, 법원장, 검찰청장, 도 총무국장 등 관계 대표를 비롯하여 약 60명의 읍내 민간 유지 참석 아래 시국좌담회를 개최, 진지한 토론을 전개한 바 있었는데 특히 동석 발기인 측에서 일찍부터 심의 연구 중에 있던 군경 및 청방 원호 추진의 건을 중요 안건으로 채택하여 토의한 바 “국민정신 통일을 강화하여 총진군으로 최후 승리를 획득함과 아울러 국군장병, 경찰관, 청방(靑防) 및 군속에 복무하는 용사 및 유가족 원호를 기함”에 목적을 두는 제주도 총후보국회(銃後報國會) 결성을 보았는데 계속 전형위원제에 의한 회장, 부회장 및 역원 선임의 결과 다음과 같이 각각 결정되어 하오 1시반경 폐회하였다. 회장 강지수(康芝洙) 부회장 이윤희(李允熙) 홍순재(洪淳宰), 명예회장 도 총무국장, 명예부회장 남북 양군수/ 고문 김충희(金忠熙) 박명효(朴明效) 박종실(朴宗實) 김재천(金在千) 원복범(元福範) 김근시(金根蓍), 총무부장 강정삼(康正三), 차장 김인지(金仁志), 재정부장 조응만(趙應萬), 차장 홍종언(洪宗彦) 의원 홍(洪)식은(殖銀)지점장 김형종(金亨鍾) 백형석(白亨錫) 오규삼(吳奎三) 김문희(金汶熙) 양홍기(梁洪基) 김호상(金浩相) 김범준(金範俊) 박종훈(朴鍾勳) 이한철(李漢哲) 김희수(金希洙) 박치순(朴致順) 신두방(申斗방) 김순양(金順洋) 김석호(金錫祜) 오(吳)무선국장 고원찬(高元燦) 문임숙(文任淑) 양용팔(梁龍八) 김덕훈(金德訓) 김영희(金영熙) 오달순(吳達順) 강창수(康昌洙) 문영백(文永伯)’-제주신보 1950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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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남보육원.

한국전쟁 전후의 상황 

‘제주도부흥자금 융자요청의 건/1950년 2월 10일 / 제주도지사, 제주부흥위원회위원장 김충희(金忠熙)/ 국무총리 각하/ 제주도부흥자금 융자요청의 건/ 1948년 4월 3일 본도에 돌발한 4․3폭동사건은 일찍이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민족적 일대 참화로서 1년 유여(有餘)를 계속한 이 사건으로 인하여 3만 유여(有餘)의 존귀한 인명을 희생하였을 뿐아니라 약 4만 동(棟)의 가옥과 막대한 재산을 회신(灰燼)에 귀(歸)케 하여 그 피해액은 실로 200여 억원(円)에 달하는 바 이 참상에 대하여는 누차 행정당국으로부터도 보고가 유(有)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 각하를 비롯하여 국무총리 각하 및 관계부처 장관 각하가 친히 본도의 실정을 시찰하신 바도 유하므로 그 피해가 여하히 참혹하였던가를 잘 양찰(諒察)하실 줄로 신(信)하오며 이래(爾來) 정부로부터 수회에 긍(亘)하여 보조금품의 하부(下附)가 유하였으나 이는 응급구호의 자(資)에 충당하였음에 불과하고 사태가 수습된 지 이미 1년 유여를 경과한 금일에 있어서 10만 이재민은 의연히 소실가옥의 복구가 불가능하여 그 대부분이 토막혈거(土幕穴居) 생활을 계속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산자금의 결핍으로 그들의 생활은 도탄에 헤매고 또 전면적으로 파괴된 시설은 자금난으로 말미암아 우금(于今) 복구를 못본 관계로 제반산업은 의연 마비상태에 있어 일반도민은 경제적으로 타격을 면치 못하여 국가경제 재건상 파급하는 영향은 실로 막대하므로 본도의 복구는 급무 중에도 급무임은 재언을 요(要)치 않는 바, 이에 본도 관민은 총궐기하여 작년 12월 20일 제주도부흥위원회를 조직(별지규약 및 업무실시 규정 참조)하고 좌기(左記) 및 별지 계획에 의하여 본도 재건에 일의(一意) 매진하기로 되었던 바 그 재건복구사업에 요할 자금총액은 약 90억의 거액에 달하며 그 중 약 48억은 정부의 보증융자에 의존치 아니하면 도저히 그 목적을 달성키 난(難)하오니 군사상 또는 산업상으로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본도의 재건복구가 국가적으로 절실히 요청되는 사실을 십분 통찰하시와 시급 선처하여 주시옵기 자(玆)에 요청하나이다. 기(記)  1. 복구계획의 중점/ 피해를 받은 주택 및 각종 산업기관 기타 공공시설의 복구와 이재민에 대한 생업자금의 조달에 중점을 두었음은 물론 본도는 반농반어의 특수한 실정에 비추어 건설적인 견지에서 항구적 시책으로 농림, 수산, 축산 등 제반산업의 진흥을 주안으로 하였음. 2. 복구사업자금 소요액 개산(槪算)/ 본도 부흥에 필요한 자금총액은 89억 583만 3,000원(円)인 바 그 내역은 좌(左)와 여(如)함. 좌기(左記) 가. 자기부담액  27억 1,906만원 나. 국고보조요구액  14억 2,092만 6,000원 다. 융자요구액  47억 6,584만 7,000원  3. 융자금의 기채(起債) 및 상환방법/ 부흥자금에 융자금은 1950년 1년거치로 최고 10개년 균등상환 방법에 의하여 정부보증 하에 제주도부흥위원회 읍면 및 사업주체 단체(또는 회사 공장) 대표자 연대책임으로 기채(起債)하되 수시 필요액을 정부 지정의 금융기관으로부터 차입하고 상환에 대하여서는 제주도지사의 책임 하에 무위(無違) 상환토록 지도할 것임. 단, 자금에 있어서는 피융자자의 형편에 의하여 일시 또는 월부상환 등의 방법을 취함(별지 위원회 업무실시규정 참조)   4. 부흥조합 설치/이재민의 상부상조의 정신을 함양하여 재해복구와 생업 보도(輔導)의 목적을 달성시킴과 동시에 피융자자의 연대채무제를 확보하기 위하여 지역별 또는 업종별로 부흥조합을 조직함.’-국무총리실 관계서류/ 1950년 2월 10일

‘금반(今般) 일반 사무연락 및 산업부흥자금 융자 교섭차 상경한 제주도지사 김충희(金忠熙)씨는 작(昨) 17일 상오 사회부에서 기자단과 회견하고 폭풍 지나간 3년 후의 제주도 근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는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보릿고개’를 극복할 앞으로 45일간의 10만에 가까운 기아자의 식량대책과 수산물을 주로한 20여억원의 산업부흥자금 융자문제라고 한다. 김(金)지사 담  “나는 작년 11월 부임 이후 50만 도민의 경제부흥에 힘써왔다. 폭동 진압 후 일부 도민은 소개하였으나 현재는 치안이 완전히 회복되고 앞으로의 5월 총선거에도 아무 지장없이 제반준비는 착착 진행 중에 있다. 다만 ‘보릿고개’를 앞둔 도민의 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여 10만 가까운 기아자는 의식주가 전부 없다.”’-한성일보 1950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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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이재민 복구사업.

4‧3사건으로 인한 피해 마을은 160곳이고 피해 호수는 1만5228호, 3만5921동이다. 1950년도 정부는 완파가옥은 1만5000원, 반파는 1만원, 가족이 철수한 세대는 5000원을 지급한다는 기준을 세워 주택피해자에게 전국적으로 총 3억 원을 주택보조비로 지급하면서 제주도에는 2700만원을 배정했다. 

1950년 2월, 김충희 제주도지사 겸 제주부흥위원회 위원장은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4‧3사건으로 인한 이재민 10만여 명의 대부분은 토막혈거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피해주택과 각종 산업기관 및 공공시설의 복구와 이재민에 대한 생업자금 조달에 제주도 부담액 약 27억1000만원, 국고보조 약 14억2000만원, 융자액 약 47억7000만원 등 부흥에 필요한 자금 총액은 약 89억원이 소요된다고 했다. 그러나 융자요청이 실현되기 전에 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과 반정부혐의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경찰‧검찰‧법원 조직 등은 모두 군의 관할로 귀속됐고, 계엄사령관이 예비검속을 주관하게 됐다. 예비검속 지시에 따라 요시찰인에 대한 일제 검거가 진행됐다. 당시 예비검속 인원은 경찰 공문서에는 820명이라고 적혀 있고, 미국 대사관 직원의 보고서에는 경찰이 국민보도연맹 임원 700명을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제주지역에서는 7월 말부터 8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제주읍과 서귀포‧모슬포 경찰서에 검속된 자들에 대한 군 당국의 총살 집행이 이뤄졌다. 예비검속자 사살은 극도로 비밀리에 수행됐다. 모슬포경찰서 관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총살된 현장은 우연히 주민들에 의해 발각됐지만, 나머지 제주‧서귀포경찰서에 검속돼 있던 사람들의 희생 일시 및 장소 등 당시 상황은 철저히 기밀로 처리됐다.

1950년 9월이 되자 제주지역에서 예비검속자 총살 집행은 정지됐다. 당국의 심사 결과, 9월 18일 예비검속자 153명이 석방됐다. 이어서 제2차로 제주경찰서에 수용 중이던 48명의 예비검속자에 대한 석방도 이뤄졌다. 서귀포경찰서에서는 9월 17일 전원 석방했다. 모슬포경찰서에서는 9월 18일 이전에 전체 검속자 344명 중에서 90명을 석방했다.

‘일시 : 1951년 8월 3일 금요일 오후 2시/ 처(處) : 경상남도청내 국무회의실/ 출석원 : 국무총리 내무 외무 재무 법무 상공 보건 체신 무임소 총무 법제 외자관리 (합 12인)/ 결석자 : 국방 문교 농림 사회 교통 공보/ 사회자 : 국무총리/ ○ 의결사항(총무) : 인사부의의 건/ (1) 최승만(崔承萬) 제주도지사에 임함. (16) 검사(대전지검 차장검사) 윤준영(尹峻榮)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에 보함. (19) 검사(제주지검 검사장)   원복범(元福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에 보함. (20) 제주도지사 김충희(金忠熙)  원에 의하여 본직을 면함.’-제88회 국무회의록(1951년 8월 3일)

제주사회를 뒤흔든 ‘유지사건’

1950년 8월 법원장‧검사장‧제주읍장 및 변호사‧사업가‧교육자 등 유지급 인사 16명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는 혐의로 연행됐다. 소위 ‘유지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제주지역계엄사령부는 8월 8~9일 이들을 전격 구속했다.

연루된 인사 16명은 다음과 같다. 김재천(제주지방법원장, 판사), 원복범(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 홍순원(제주도 총무국장), 전인홍(제주도 지방과장), 최남식(제주농업학교장), 이인구(전 제주도 사회과장), 백형석(상업, 제주적십자사 지부장), 최원순(변호사), 김차봉(제주읍장), 김무근(변호사), 김재홍(제주도립병원장, 의사), 이윤희(제주조흥자동차부 대표), 김영희(주정회사 사장), 장용문(총후보국회 서기), 한상용(제주농업중학교 준교사), 조규환(제주농업중학교 훈련교관). 

‘해병대 정보참모부(G-2)는 제주도 저명인사 13명이 7월 10‧15‧22일에 북한군이 제주도에 올 경우에 그들을 환영하기 위한 절차를 논의하기 위하여 회합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이 정보는 소위 공산주의 선전삐라를 뿌리다가 체포된 두 사람의 자백에 근거하고 있다. 그들은 차례로 제주도 유지 13명을 삐라 살포의 배후로 지목했고, 위에서 언급한 회합의 개최에 연관되었다고 지목했다. 그 뒤 체포된 13명 중 4명이 회합의 개최와 성격에 대해 자백했다. 해병대는 이들 중 몇 명이 3년 전 제주도 반란에 연관된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Memorandum for the record, Subj.:Conditions on Cheju Island, John P. Seifert, Naval Attache, Donald S. MacDonald, Third Secretary of Embassy, Philip C. Rowe, Vice Consul, Aug 17, 1950.

김충희 도지사는 진상을 밝혀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조병옥 내무부장관과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보냈다. 결국 1950년 8월 28일 군경 합동수사대가 설치됐고, 중앙에서 내도한 육군 2명, 해군 2명, 경관 2명으로 조사단이 구성됐다. 군경합동수사대의 조사 결과, 소위 제주도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는 전혀 실재하지 않은 조직으로 불순분자의 중상모략으로 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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