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⑤ 오에 겐자부로 『오키나와 노트』/박경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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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 노트> 오에 겐자부로 지음, 이애숙 옮김, 삼천리, 2012.
오키나와에서 제주의 미래를 보다

지난 2월 26일 강정 제주해군기지가 완공되었다. 천혜의 구럼비 암반을 다이너마이트로 부수고, 콘크리트를 퍼부어 축구장 70개를 합친 규모로, 지난 2007년부터 시작되어 9년 만에 완공된 것이다. 그 사이 강정마을의 공동체는 갈가리 찢겨 나갔으며, 처절하며 지난한 주민들의 반대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제주사회에선 강정해군기지문제가 언제나 핫이슈였다. 이날 강정주민들은 준공식에 대한 맞불로 기자회견을 열고 ‘생명평화문화마을 강정’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서 주민들은 “강정마을을 군사기지 마을이 아닌 생명평화문화마을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명했다.

신설된 이 '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코너에 필자의 첫 추천서적으로 왜 ‘오에 겐자부로’의 《오키나와 노트》를 선택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 강정해군기지 준공식이 있었던 당일, 지역신문과 방송을 도배한 기사들 때문이었다. 그 기사들은 문득 잊고 있던 오키나와를 떠오르게 했다.

2013년 오키나와를 다녀온 뒤 바로 이 신문, 필자의 연재코너를 통해 오키나와 기행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 글에서 필자는 “미래의 제주도가 오키나와의 재판(再版)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필자만의 상상일까?(제발 상상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은 미래 제주의 모습이 평화나 행복과는 거리가 먼, 본토의 내부식민지로 항상적인 군사적 위험과 기지가 운용되면서 벌어지는 각종 사회문제에 휘둘리는 불행한 모습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지 않아도 될 미래를 우리는 착실히 가고 있는 느낌이다.”라고 예견한 바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때 처음 읽었던 책이기도 하다. 강정해군기지의 준공은 바로 그 착실히 가고 있는 첫 계단에서 둘째 계단으로 옮겨가기 위해 발을 떼는 순간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본토인의 눈으로 본 오키나와의 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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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오키나와 노트》는 일본의 작가로 패전 이후의 전후세대를 대표하는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1935년생, 이상 ‘오에’로 약칭)가 30대 초반에 쓴 오키나와 르포로서 월간 《세카이(世界)》에 연재했던 글들을 묶은 것이다. 그는 반전·평화와 사회적 불복종을 실천하는 실존주의자요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며, 199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키나와 노트》는 1969년부터 1970년 4월까지의 현장 취재를 통해 쓴 9편의 글로 엮은 것이다. 이 시기는 1945년 오키나와전투로

상륙한 이래 미군정이 실시되던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되기 직전이었다.(오키나와는 1972년 5월 15일 27년 만에 일본에 반환되었다.) 이 기간은 오키나와 본토복귀에 대한 논란이 격렬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책이 가지는 미덕은 류큐-오키나와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시기를 그려낸 긴장감 있는 르포르타주이면서 동시에 류큐 처분 이래 근대일본과 맞물린 오키나와의 역사를 섬세한 문학적 필치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당시 그는 오키나와를 방문할 때마다 자신에게 되묻는다. “나는 오키나와에 왜 가는가?”하고. 이 질문에는 묵직하면서도 꺼내기 부담스러운 일본과 오키나와, 일본인과 오키나와인, 일본인으로서 바라보는 오키나와, 오키나와인들이 바라보는 일본인, 본토와 내부식민지, 영토와 식민지, 지배와 피지배, 국민과 식민, 본토의 생존을 위한 준비된 사석(死石), 본토의 장기지속을 위한 요석(要石)으로서의 오키나와 등 감저줄(‘고구마 줄기’를 가리키는 제주어) 하나에 줄줄이 꿰어 나오는 일본과 오키나와의 역사와 당대성의 해결과제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에는 오키나와인들에게 ‘야마톤추(일본인, 본토인을 뜻하는 오키나와 방언)’로 불리는 ‘일본인’에 그 자신이 속해 있지만, 또한 오키나와의 역사와 오키나와인들의 지난한 삶과 투쟁을 이해하는 지식인으로서 느끼는 오키나와에 대한 죄책감, 미안함 등이 범벅이 된 그의 내면의 상태가 그의 글에서는 잔뜩 묻어난다.

‘나는 왜 오키나와에 가는가?’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너는 왜 오키나와에 오는가?’라고 거절하는 오키나와의 목소리와 겹치며 언제나 나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 두 목소리가 동시에 ‘바보!’하고 조롱한다. 이처럼 오키나와에 가는(오는) 것이 쉬운 일인지 언제나 스스로 되묻는다. ‘아니, 오키나와에 가는 것은 나에게 쉬운 일이 아니야’하고 남몰래 생각한다. 오키나와에 갈 때마다 그곳에서 나를 거절하라는 압력이 점점 더 커져 간다. 그런 거절의 압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역사이며 현재의 상황, 인간, 사물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것이다. 압력의 핵심에는, 여러 차례 오키나와 여행으로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들의 더 없는 친절함과 공존하는 단호한 거절이 있기에 참으로 난처하다.(18p)

이러한 그의 고백은 아홉 번에 걸친 오키나와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마다 시작되는 질문이었고, 그의 오키나와 르포를 써 나가는 이야기의 끈이기도 한데, 저자의 이러한 태도에는 오키나와와 근대일본의 역사가 가로지르고 있다. 오에의 부단한 자기검증과 다짐(?)들은 결국 일본인은 누구인가? 오키나와인은 누구인가? 본토는 실재하는가? 등의 의문으로 책의 전편을 관류한다.

오에는 메이지 12년인 1789년 슈리성이 이양되고 쇼타이(尚泰王) 류큐국왕이 동경으로 소환되었다는 폐번치현(廢藩置縣, 두 번째 유신이라 불리는 중앙집권제의 행정체제 개편으로 3부 43현에 국왕이 직접 지사를 파견해, 봉건제의 잔재를 청산한 대대적인 행정 개혁)이 단행된 소위 ‘류큐 처분’이 이루어지던 시기 중국의 푸저우(福州)에 머물다 베이징의 청나라 조정으로 가 일본에 넘어간 류큐왕조에 원조를 구하면서 자살한 ‘린 세이코’와 폐번치현 이후 현지사로 파견되었던 나라하라 지사의 학정에 맞섰던 ‘자하나 노보루’의 불꽃같은 삶도 불러낸다.

야마토와 외지인 오키나와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즉 구조적 차별의 오랜 역사를 오에는 1903년 오사카에서 열린 ‘내국권업박람회(内国勧業博覧会)’의 인류관(人類館)사건을 호출해 사유한다. 당시 일본은 박람회 기간에 ‘학술 인류관’이라는 부스를 만들어 오키나와 여성 두 사람을 소위 ‘진열’했다. “그녀들은 곰방대와 야자수 잎 부채를 들고 오두막에 앉아 있었고, 채찍을 든 남자가 여인들을 ‘이놈’이라고 부르며 설명했다”고 한다. 오키나와 현의 부인이었던 그녀들은 박람회장의 원숭이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때 오키나와뿐만 아니라 조선과 아이누 등을 포함해 32명의 소위 식민지사람들의 인종전시가 이루어졌다.

1903년은 오키나와의 일본귀속을 결정지은 소위 ‘류큐처분’이 최종적으로 완료된 해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의 지도층이나 일반국민들 사이에 오키나와가 제국의 영토로 편입된 후 소위 ‘오키나와 문제는 종결되었다’는 정서 속에 벌어진 일이었다. 본토인들의 오키나와에 대한 부박한 인식과 시선은 내부식민지로서의 오키나와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 오랜 단면이기도 한 것이다. 오에는 예리하게도 이 사건이 지닌 함의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오에는 여기에다가 67년만인 1970년에 다시 오사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오버랩 시킨다. 이때 역시 일본의 지도층과 일반국민들은 ‘오키나와 문제는 종결되었다’는 느낌을 공유하면서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에도 일본은 사토-닉슨 공동성명의 위험과 배신. 즉, 오키나와에 본토의 미군 기지를 몰아넣고(일본 주둔 미군기지의 75%) 핵무기 배치까지 허용하는 어쩌면 제2의 인류관을 만드는 일은 알리지 않은 채 말이다. 결국 일본은 1903년에서 1970년까지 오키나와에 대한 구조적 차별의 인식을 깨거나 오키나와에 대한 일본영토내의 국민으로서의 인식을 재구성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2016년의 오늘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오에는 오키나와 전쟁의 비극적인 집단자결의 기억을 끌어내어 일본인의 만행을 고발하기도 한다. 당시 집단자결을 명령한 젊은 수비대장이 27년의 세월이 지나 7백여 명이 마을주민들을 집단자결의 비극으로 내몰았던 현장을 방문하겠다는 뻔뻔한 시도에 유대인학살의 설계자인 아이히만을 떠올린다. 또한 집단자결의 근저에 도사린 굴절된 일본인의 정신구조를 조명하고 그 굴절된 일본인의 야만적인 행태를 단순히 한 개인의 것이 아닌 전체 일본인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도려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과제로 삼는다. 이러한 목표 설정은 장래 일본인이 당시와 같은 ‘군의 수직 구조’ 틀 속에 넣어진다면 오키나와전에서 겪었던 비극을 다시 반복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에는 패전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전후의 일본인이 이 수직 구조의 약점을 잘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왜곡하는 일본인이 아닌 새로운 일본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를 반복해서 묻는다.

이 책은 메이지시대를 시작으로 하는 근대일본과 오키나와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오키나와를 비극의 섬으로 몰아간 오키나와의 내부 이야기를 통해, 미군기지의 철수를 도모하기 위해 선택한 본토반환이 오키나와인들의 염원과는 달리 일본인들에 의해 어떻게 배신당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반환이 ‘내부식민지’로서의 오키나와로의 복귀였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조인하고 오키나와를 버린 정치가의 '국장'날, 나는 우연히 나하에 머물고 있었다. 본토의 텔레비전 전파로 중계되는 오키나와 텔레비전은 너무나 장황한 '국장' 모습과 장중한 거짓 뉴스로 넘쳐났다. 하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식당이나 이발소에서 가만히 그걸 지켜보고 있었고, 나는 묵묵히 응시하던 그들의 우울한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만국박람회 개회식 중계를 오키나와 텔리비전 화면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는 수많은 우울한 뒷모습으로 기억한다.(163p)

너무나 제주다운 난바다의 이국, 오키나와

굳이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오키나와의 운명이 제주와 묘하게도 겹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상대적으로 작은 면적과 적은 인구수라는 규모의 한계를 타고난 섬들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태평양전쟁 당시 결국 다른 길을 갔지만, 제2의 오키나와가 될 뻔했던 제주 섬의 상황을 이해한다면, 어쩌면 오키나와와 제주 섬은 쌍둥이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의 해군기지 건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바다와 가장 큰 나라가 만나는 경계부에 위치해, 또 하나 그 바다를 경계로 세계 초강대국과 제국주의 근대시기 오키나와와 우리나라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일본이라는 나라의 반성 없는 현재성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에의 오키나와 이해를 위한 여정을 접하노라면 몽골의 탐라경영과 일제의 제주지배, 미군정기의 제주4·3이 시간대를 해체한 채 기괴하게 합체된 기이한 제주도의 역사가 오버랩 된다.

오키나와가 14세기 명조에서 시작해 청조대의 중국과 17세기 이후 사쓰마번의 속현이 되어 중·일 양속(兩屬)의 시대를 겪었던 것처럼, 제주 역시 그 보다 이전 시기인 몽골 지배기에는 몽골과 고려 조정에 대한 양속시대가 이어졌다. 또한 미군정이 끝나고 군대만 남긴 것이나, 탐라목장만은 직영하고 나머지는 돌려주었던 몽골지배기의 제주와도 비슷하다. 또한 우리도 오키나와처럼 3년간의 미군정기를 겪었다. 왜정시대 말기 미군의 본토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군이 제주섬에 옥새작전을 감행하기 위한 대대적인 진지공사를 벌여 결전을 준비하던 결7호 작전의 역사는 바로 오키나와 전투의 2부작이었다. 다행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으로 인해 일제의 무조건 항복이 먼저 이루어짐으로서 제주에서의 옥새작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12만 명의 민간인 목숨을 앗아간 오키나와의 사례를 본다면 제주에서의 옥새작전과 집단자결은 아마도 전 주민의 희생을 야기 시킬 정도로 끔찍했을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쌍둥이섬의 운명은 길이 갈렸다. 물론 제주도 역시 얼마 안 가서 그에 못지않은 미증유의 사건을 맞는다. 4.3이 바로 그것이다.

2012년 6월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아로의 귀환(Pivot Back to Asia)’을 선언하였다. 중동에 매달려 있던 미국이 이미 부쩍 경제적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군사적으로도 강대해지는 중국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초유일 강대국인 미국은 정치적·경제적 영향력 유지를 위해 중국을 봉쇄하는 군사전략을 다시 짜기 시작한다. 한·미·일 군사동맹의 추진 역시 그 하나다. 그 결과 냉전시대 경계부였던 난바다의 섬들과 섬나라들은 다시 중국 봉쇄를 위한 지정학적이고 군사전략적인 가치를 재평가 받게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필리핀의 수빅만해군기지와 클라크공군기지, 베트남의 깜라인만 해군 및 공군기지, 태국의 우따빠오 로열 타이 해군 비행장, 호주의 다윈기지 등에 다시 미군이 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해양으로 팽창하고자 하는 중국과 해상국경을 맞댄 주변국들의 군사적 불안감이 증대되면서 해당 국가들의 이해관계와 미군의 전략적 필요성이 만나 이루어지는 파트너십이다.

제주도의 강정해군기지 역시 단순히 한국군의 해군기지로서만 사용되지는 않을 것임을 세계의 평화운동가들이나 군사평론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도 중국의 팽창과 미국의 대중국 봉쇄 군사전략 때문이다. 아시아의 큰 형님이 귀환하면서 이미 가지고 있던 불침항모와 더 많은 불침항모들이 필요해진 것이다. 소련과 미국 주도의 냉전이 저물고, 다시 중국과 미국 두 패권국가들이 주축이 된 신냉전의 전장으로 아시아의 바다는 역진(逆進)하고 있다. 이는 결국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다시 ‘기지의 섬’으로서의 가치가 증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그 섬에 사는 주민들이 떠안아야 하는 고통으로 돌아올 것이다.

한편, 일본 극우세력들은 《오키나와 노트》에 실린 오키나와 공방전 때 일본군 장교가 주민들에게 집단자결을 강요했다는 내용이 그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2005년 오사카법원에 제소했다. 재판이 진행되던 2007년 일본의 문부과학성은 교과서 검정에서 군의 강제부분을 삭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오키나와 주민 116,000여명이 궐기했고, 대법원은 2011년에야 무죄판결을 내렸으나 교과서의 관련 내용들은 검정과정에서 크게 약화됐다.

말의 위장망, 그 의미심장하고 음울한

오에는 미군기지와 관련한 말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오키나와에서 막연한 말과 모호한 표현은 색을 덧씌우고, 나뭇잎을 꽂아 감추는 위장망 역할을 하고, 위장망은 항상 그 속에 이상하고 엄청난 실체를 숨기고 있다.”(44p).

“B-52전략폭격기도 처음에는 말의 위장망 속에 가려져 있었다. 태풍을 피해 임시로 괌에서 오키나와에 온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B-52전략폭격기는 오키나와에 상주하면서 베트남으로 바로 폭격비행을 갈 수 있도록 점점 강화될 것이라고 누군가 막연한 표현으로 웅성거렸다. 그리고 1968년 11월 1일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이 베트남 북폭 전면중지 명령을 내렸을 때, 오키나와에서는 이미 위장망을 벗겨낸 B-52전략폭격기가 수시로 발진하는 모습을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사실에 입각하여 11월 3일자 《류큐신보》는 50대나 되는 대량의 B-52전략폭격기가 날아다니고, 남베트남 폭격 비행이 계속되고 있다고 완곡하게 보도했다. …그리고 3주도 채 지나지 않아서 막연하게 회자되던 불안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현실화되었다. 가데나 비행장에서 발진하려던 미군 전략 폭격기 B-52가 충분히 상승하지 못한 탓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비행장 동쪽 탄약 반입게이트 부근에 추락했다. B-52는 탄약을 싣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락과 동시에 10여 차례 대폭발을 일으켜 활주로에 인접한 16호선 도로와 ‘지바나 탄약창고’ 일대는 불바다가 되었다. 불바다는 B-52전략폭격기가 도대체 오키나와 민중들에게 어떤 위험을 초래하고 있으며, 또 초래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그때까지 이야기되던 모든 사실을 한순간에 확실히 보여주었다.”(46p)

처음에는 말의 위장망에 가려 막연하던 추측과 우려들이 결국에는 적나라하게 그 진실의 전모를 드러낸다. 이처럼 군 기지의 소문들은 대부분 무서운 진실을 ‘말의 위장망’으로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장망이 벗겨져 실체가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 태도를 보이는데, 하나는 “아니, 여기 드러나 보이는 것은 사실 실재하지 않아. 실재하지 않는 이상 그것이 거기에 실재하는지 어떤지를 조사해서는 안돼. 우리가 분명히 말할게. 그것 실재하지 않아”라는 태도이고 또 하나는 “그래, 위장망 속에서 이런 괴물이 나타났어, 괴물을 괴물인 채로 그대로 내버려 둬. 괴물을 정당화시키고 보강하는 공작은 우리가 할게. 그리고 이 괴물을 너희 섬보다도 훨씬 거대한 괴물인데 너희가 뭘 할 수 있겠어? 위장망이 벗겨져 이미 괴물은 드러났어. 너희는 거기 익숙해져야 해. 아아, 너희들은 모르는 편이 좋았어. 그렇지 않아? 릴리퍼트(소인국) 주민 제군들!”이라며 걸리버처럼 뻔뻔하게 말한다.(45p)

미군기지의 핵무기의 존재나 나하항에 드나들던 원자력잠수함이 배출한 1차 냉각수로 인한 측정치가 미국·오키나와 합동조사단의 조사한 측정치보다 몇 배나 많은 코발트-60이 어패류에 축적된 오염사실을 밝혀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키나와 주둔 미군 화생방부대의 신경가스 누출사고가 드러났을 대도 미군은 확인할 기회를 주지 않고, 본토 일본 정부는 침묵하거나 대놓고 ‘시치미’를 떼고, 민중운동은 아직 핵무기를 철폐할 힘이 없기에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는 생각에 신음한다. 그리고 걸리버로 표현한 미군은 “알아서 무슨 도움이 됐어. 불안과 공포의 독소를 더 강하고 확실하게 나를 위해 다시 조합한 것뿐이잖아, 릴리퍼드 주민 제군들!”이라고 말한다.
 
최근에 전모를 드러낸 주한미군 오산기지 탄저균 배달사고의 경우도 말의 위장망이 쳐져 있었다. 메르스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인 2015년 5월에 일어난 탄저균이야기도 처음에는 풍문인 듯했다. 그러다가 29일 미국CNN의 보도로 한국의 오산공군기지에 배달이 됐고, 또 주한미군이 연구소에서 실험을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날 주한미군은 즉각 논평을 내어 “탄저균 샘플 실험훈련은 최초로 실시된 것”이라고 다급하게 해명했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까지 미군의 입장을 되풀이했지만 이는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진다.

7월 23일, 미국 국방부는 《살아있는 탄저균의 우연한 배달:검토위원회 보고서》라는 제목의 진상조사 보고서 발표하는데, 지난 10년간 미국과 다른 7개국에 살아있는 탄저균이 의도치 않게 배달된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하게 된다. 이후에도 미국은 단순한 배달 사고라고 주장했지만, 2008년 호주 실험시설에 살아 있는 탄저균을 보낸 사실이 확인됐다. 미국은 처음에는 18곳에 탄저균 배달사고가 있었다고 하였다가, 며칠 후에는 탄저균 배달 사고 지역이 51곳으로 늘어나고, 나중에는 탄저균 오배송이 대한민국과 호주, 캐나다, 미국 19개 주 등 66곳으로 늘어난다. 장막이 하나 더 걷힌 것이다. 주한미군은 “실험요원 22명이 탄저균에 노출됐고 현재 감염 증상을 나타내는 사람은 없다”고 해명했고, 현재 실험 목적 등은 밝히지 않았다. 단지 “오산기지에 있는 응급격리시설에서 탄저균 표본을 폐기처분 했다”고만 밝힐 뿐이다. 이를 확인할 방법은 없는 셈이다. 방송 언론은 다만 미군의 발표를 그대로 옮길 뿐이다.

12월 17일 지난 5개월 간 탄저균 배달사고를 조사해온 한·미 합동실무단은 주한미군 용산기지에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합동실무단에 따르면 미국은 2015년 주한미군 기지로 탄저균과 페스트균 샘플을 1차례 보낸 것 외에도 2009년부터 2014년까지 15차례나 탄저균 샘플을 지속적으로 배송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미군은 오산기지만이 아니라 용산기지에서도 실험을 실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장막이 한 겹 더 걷힌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말의 위장막은 얼마나 더 남아 있는 지 알 수 없다. 군사기밀이라는 이유로 한국정부의 승인 없이도, 심지어 민간택배로 국경을 넘는 위험한 모험에도 말의 위장막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정작 문제는 이러한 조사결과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또한 취한다하더라도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어 일방적인 해명만 들을 뿐이다. 여전히 탄저균은 치외법권지역인 미군기지를 통해 드나들 수 있는 구조적 모순 속에 있다. 바로 한미SOFA협정 때문인데, 지난 이 협정은 이런저런 국민적인 공분을 일으키는 주둔지 사고가 발생해도 불평등한 독소조항이 개정된 사례가 없다. 현재 미국은 일본, 독일, 호주, 필리핀 등 40여개 국가와 SOFA를 맺고 있다. 그런데 한미SOFA 내용은 다른 나라에 비해 지나치게 불평등하며 후진적인 협정으로 유명하다. 이번에도 추미애 의원이 재발방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SOFA가 개정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돌아온 답은 앞으로 한국에 반입 시 우리 정부에 통보하는 내용의 ‘합의 권고안’에 서명했을 뿐이다. 한국에서의 걸리버는 오키나와에서의 태도와 똑같은 입장인 것이다.

강정제주해군기지는 공식적으로는 대한민국 해군이 운영하는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다. 현재 대한민국해군 제7기동전단과 93잠수전대, 제주기지전대가 사용하는 해군기지가 먼저 준공되었다. 크루즈터미널은 2017년 6월 준공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향후 완공되면 강정항은 해군과 민간이 공동사용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오키나와와 오산기지의 사례를 통해 볼 때, 강정 역시 두꺼운 말의 위장망으로 가려져 있지 않을까 의심의 눈길을 거둘 수 없다. 표면에는 한국 해군기지이며 관광미항이라는 말의 위장망으로 말이다. 그렇게 위장막이 걷힌 최후의 모습은 핵잠수함이 오가는 군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가장 핫플레이스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 말이다. 미군의 핵잠수함이나 일본 자위대의 이지스함이 어느 날 태풍을 피해 잠시 오고, 그리고 어느 순간 강정엔 미군과 자위대 함정이 들락날락거린다고 소문이 나다가, 나중에는 한·미·일 전략해군의 전초기지라는 기사로 언론에 도배되고, 그리고 오키나와처럼 제주도 어딘가에 미군의 핵무기가 저장되어 있다는 풍문이 돌고. 나중에는 “그래서 뭐 어쩌라구?”라는 걸리버의 반응을 확인할 뿐인 벽에 부딪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오키나와 노트》는 여러모로 놓아버렸던 정신줄을 다잡게 하는 지성의 풍모를 담고 있다. 오에가 취재를 위해 찾을 때마다 만났던 오키나와의 수많은 연구자들과 활동가들 그리고 책을 통해 만난 저자들과 기자들, 그리고 묵묵히 항의대열에 참여한 오키나와 주민들, 결국 그들이 오키나와의 구조적 차별에 저항하는 주력군이다. 오에 역시 그들의 모습을 통해 지속적으로 오키나와를 사유한다. 그는 글의 말미에 이렇게 쓴다.

나는 오키나와 노트를 도저히 내 가슴속에서 닫을 수 없다. 피비린내 나는 내면의 암부로 자신을 밀어 넣으며 전후 민주주의와 윤리적 상상력을 생각하기 위한 실마리로 절실히 필요하다. 그것을 손에서 내려놓으면 혐오스럽고 무서운 허공 속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점점 더 크게 자각하기 때문이다.(119p)

그의 글에 공명하는 것은 삶과 자신에 대한 이 무서운 자각 때문이리라. 일독을 권한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유려한 문학적 필체가 자꾸 버벅거리는 것이 흠.

▷ 박경훈 화가

민중미술가, 문화운동가

전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전 제주민예총 이사장

현 도서출판 각 대표

* 필자 사정으로 지난 주 '북세통, 제주읽기' 한 주 연재를 쉬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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