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제주도는 그런 섬이 아니다
내가 아는 제주도는 그런 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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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도 여름,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의 필자가 살던 집 앞의 일몰. 몇년 사이 대평리 모습도 많이도 바뀌었다. / 사진=조남희 시민기자 ⓒ제주의소리

[조남희, 제주사름으로 살기]②이웃으로 살수 없는 이유가 ‘치솟는 임대료’라면…

“라면 먹을 때 요것도 같이 먹어요.”
2012년 여름, 제주도에 살기 위해 내려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서귀포의 어느 남쪽 마을에 급하게 빌린 집에서, 주인아주머니는 육지에서 혼자 내려와 사는 나에게 종종 김치를 챙겨주셨다.
가스보일러에 아직 익숙하지 않던 내가 아직 날씨가 쌀쌀하던 어느 날 밤 가스가 떨어져 난방을 못하고 있을 때 아주머니는 걱정하며 딸이 쓰던 전기장판을 내주시기도 했다. 이렇게 자다가 입이 돌아가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나에게 그것은 ‘이웃’이라는 생경한 두 글자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껴두었던 좀 괜찮은 술을 바깥어르신에게 드리는 것으로 나는 어설프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곤 했다. 
주인집은 농사일로, 나는 한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서로 바쁜 처지에 자주 얼굴을 보고 담소를 나누지는 못했어도, 그저 신기하고 고마웠다. 
서울의 아파트와 주택가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늦은 밤 집 앞에 주차를 하다가 차를 잘못 대놓은 아저씨와 한바탕 싸운 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같은 건물 어느 집에 사는지 그때 알았다. 아마 누가 말리지 않았다면 경찰이 와서야 끝날 일이었다. 

서쪽 중산간 마을로 들어가 살 때는 ‘이웃’이라는 개념이 조금 더 보였다. 
역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마을에 들어가 셰어하우스라는 것을 하면서, 나와 우리 동거인 식구들은 주변 어르신들께 종종 음식을 들고 무작정 찾아가 인사를 하기도 했다. 집에서 입고 있는 그대로 어르신들은 우리를 맞이해 주셨으며, 우리도 집에서 입고 있는 몸빼 바지 그대로 찾아갔다. 옆집이었으니까. 
그 뜨거운 여름날 타주시는 달달한 잔칫집커피, 즉 믹스커피의 맛 또한 원두커피를 내려서 먹는 우리 집에선 맛보기 힘든 ‘이웃의 맛’이었다.
집에 있는 먹을 것 중 나눌만한 것이 있어 갖다드리면 반드시 사소한 것 하나라도 다음날 집 앞에 놓여 있곤 했다. 어르신들은 육지 젊은 아이들이 걱정도 되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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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제주로 이주해와 처음 머물렀던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의 앞집 할머니께서 차려주셨던 밤참. 이웃이란 단어를 가슴으로 처음 느끼게 해준 할머니다.  / 사진=조남희 시민기자 ⓒ제주의소리

그 분들이 우리 집에 너무 자주 찾아오시면서 나는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매일 아직 장가 안간 아드님을 만나보라고 하시는데 곤혹스럽기도 했다. 
자주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시는 상황에 우리는 가끔 지치기도 했던 것 같다. 
‘이웃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마을에서 살면서 어디까지 내 삶을 오픈할 수 있는가. 나는 좋은 이웃인가, 나는 마당에 검질(잡풀이란 뜻의 제주어)도 잘 안 매서 혼나는 사람인데…’ 
나는 생각이 많아지곤 했다.  
그 분들이 우리를 이웃으로 생각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었을지 어떨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어떤 이웃으로 남게 될지 제대로 실험을 해보기도 전에 결국 내가 그 마을들에 길게 살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임대료였다. 

내 생애 첫 이웃들은 나날이 올라가는 촌의 땅값에,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대로 계획이 많았다. 연세를 배로 올려 줄 테니 집을 빌려달라는 사람들은 줄을 섰고, 목이 좋으니 집을 다 뜯어고쳐서 식당을 하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그 마을들에 살기 시작한 게 그리 오래된 과거의 일도 아닌데, 몇 년 만에 동네의 모습들은 많이도 변했다. 육지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고, 관광객들이 찾아오면서, 카페와 식당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마을의 명소에서 몇 백 미터 가지 않아 콘셉트를 그대로 카피한 장소가 생기는가 하면, 어느 집 식당이 장사가 너무 잘되는 걸 질투한 나머지 인근 식당이 위생문제를 신고했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한다. 
서쪽 마을에서 가장 가까이 지내며 의지했던 이웃 중 하나는 곧 남쪽 마을 어딘가로 이사를 간다고 한다. 
카페를 하는 그이들은, 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임대료가 비싸 듣는 사람마다 혀를 내두를 정도였는데 주변 시세가 더 올랐으니 임대료를 더 올리겠다기에 계약기간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다른 곳을 알아봐야했다. 
종종 뮤지션들을 초청해 작은 공연을 하기도 했던 그 곳은 관광객들 뿐 아니라 마을주민들도 수시로 오가며 함께 하던 카페였다. 

내모는 주체와 내몰리는 대상이 선주민이든 이주민이든 그런 것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복잡하게 얽혀있으니 말이다. 
다만 그저, 우리는 언제 제대로 이웃이 되어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싶다.
서로 소통하고 잘 지내야 한다고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다.  
억울하면 집을 사라고, 땅을 사라고는 하지 말자. 
돈이 있어야 이웃이 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니, 내가 아는 제주도는 그런 섬이 아니다. 

 조남희 시민기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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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넘게 쭉 서울에서만 살았다. 잘 나가는 직장, 꽤 많은 월급, 떠들썩한 도시의 삶은 그녀에게 허울 좋은 명함, ‘소맥’을 제조하는 기술, 만성적인 어깨 통증과 뱃살을 남겼다. 삶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던 어느 날, 미치도록 좋아하던 제주로 왔다. 이곳에서라면 숨통이 트이고, ‘조남희’다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푸른 섬 제주에 정착한 지 4년이다. 제주살이에서 겪은 다사다난 좌충우돌 이야기를 ‘서울 처녀 제주 착륙기’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 연재해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응원을 받았다. 셰어하우스 ‘오월이네 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제주에서 살아보려는 이들과 ‘개념 있는’ 정착을 꿈꾼다. 일하고 글 쓰고 가끔 노래하며 살고 있다. '푸른섬 나의 삶' 저자, 제주행복나눔마트협동조합 기획팀장, 온라인쇼핑몰 베리제주 점장을 맡고 있다. 2016년 <제주의소리>를 통해 ‘조남희, 제주사름으로 살기’를 연재하고 있다. *'사름'은 사람이란 뜻의 제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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