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의 총선분석(1)] 영남인들의 심리분석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청와대에 '위리안치'되어 있다. 3공 5공 때 많이 듣던 '가택연금'상태이다. 위리안치란 조선왕조 시대 '정치범'을 귀양보내고도 '반정'이 두려워서 울타리와 출입구를 모두 가시나무(요즘은 철조망과 부비트랩)로 둘어치고 외부인사와의 접촉을 금하는 조치를 말한다. 가택연금에서는 무장경찰들이...

고위 공무원 선거운동 혐의로 탄핵소추된 노 대통령은 이번에도 청와대에 위리안치되어 있으면서도 또 선거법을 위반했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청와대 정원에서 꽃망울을 만지면서 흘려보냈다. 덧붙여, 두개의 판을 밝고 지나야 진짜 봄이 온다고 호소했다. 이보다 더 강한 메시지가 있으랴, '총판'과 '탄판'이란 발판이다. 김 아무개 소추 검사는 추가로 이 사실을 적시할 것이다. 이미 그렇게 주장했다. 열린우리당이 16대 50석보다 더 많은 좌석을 차지하면 그것은 '노짱의 선거운동 효과'때문이고 그로 인해서 탄핵사유가 충분히 된다고...이제 152석이란 과반수를 넘겼으니 이것은 약 3배의 탄핵이유가 되리라.

과연 이번 '총판' 결과는 '노짱의 입김'이 주효했을까? 그런데, 왜 부산 경남인들은 노짱을 버렸나? 좀 거칠지만 과감하게 영남인들의 심층분석을 시도해 본다.

바둑도 훈수하는 사람이 수를 더 잘 읽는 것처럼 국내에서 총선에 직접 참여한 사람보다는 국외에서 총선을 관전한 사람이 아마도 '판'을 좀 더 잘 읽고 '훈수'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먹는 것도 먹는둥 만둥...정말로 '타는 목마름으로' 탄핵정국 이후 보냈다.

총선결과 확연하게 들어난 것은 아직도 속칭 '영남 수구지역주의'였다. 필자는 왜? 어떻게?라는 강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젊었던 시절 약 15년이란 세월을 대구에서 보냈던 그곳이기 때문에 연민의 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지금 총선정국을 통해서 들여다 보는 한반도 남쪽은 마치 1950년 7월 초 '낙동강 방어전선'을 연상케 한다. 나만의 착각이길 바라면서 이글을 쓴다.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서울 대전 전주 대구 방향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사수'한다는 녹음기를 틀어놓고 대전을 거쳐(7월 3~4일 경) 목포로 호남선을 타고 갔다. 거기서 부산으로 줄행랑했다.

그래서 '낙동강 전선'을 최후보루로 피땀흘리며 방어하게 되었다. 그후 영남지역에서는 엄청난 '빨갱이' 소탕전이 내부에서 벌어졌다. 대전 형무소 정치범 처형(7월초 3일간)과 거의 동시에 대구 형무소 정치범 처형이 비밀리에 행해졌다. 국민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이 대량학살 암매장되었다. 이런 일은 김천, 포항, 마산, 부산, 진주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이 지역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뇌리속에는 아직도 '빨갱이'란 키워드를 넣으면 소위 '경끼'를 일으킨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나는 공산주의가 싫어요"라고 외친다. 충분히 '생존의 가치'가 있다.

54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지만, 한 번 당한(경험한) '쇼크'는 그 쇼크가 다시 일어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구적으로 '소거'(extinction)되지 않는다. 이런 학습현상을 심리학에서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라고 부른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성공하고 제주를 비롯한 영남지역에 벌린 소위 '빨갱이 소탕전'은 '살아남은 자'에게는 제2의 강화학습이었다. 양민학살을 규명하던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들이 체포구금되고 그들이 찾아내었던 학살터의 유골들은 거의 대부분 비밀리에 폐기처분되고 말았다. 이 이상의 엄청난 쇼크학습이 또 있을까?

지금 대구에 계신 나의 은사님 중 한 분은 나에게 노골적으로 경고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한국전 때 그 분은 예비검속되어 처형되기 직전에 국군을 지원하여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 사선을 넘어 휴가와 보니 동네에는 숱한 우익청년들이 군대도 안가고 호의호식하고 있더란다. 그래서 우익청년단의 아지트인 동네 파출소에 들어가서 난동을 부렸다. 너무 화가 치밀어서...

그리고 탈영하고 국방 방위군으로 잠입하고 휴전될 때까지 숨어지냈다고 술회하면서, 만약 "이XX가 대통령이 되면 넌 이제 출입국을 자유롭게 하지 못할 것이다."

서울에서 목회를 하는 부산출신 친구집에 일년전에 가서 며칠을 기거한 적이 있다. 그 전에도 서울가면 그 친구집에 기식을 한다. 아주 절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는 그 친구 부인이 나더러 웃으면서 경고(?)했다. "우리 시 아버님이 이 선생을 집에 들여놓지 말라"고. 나는 속울음을 울어야 했다, 겉으로는 씁쓰름한 웃음을 웃으면서도.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 당시 부산 지역에서 '대한청년단' 간부를 지냈다고 오래전에 들었었다. 그만큼 완고한 지는 아주 후에 경험하게 되었다.

대구에서 교장을 하고 있는 친구들은 나에게 활동자금을 대준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경고(?)를 늦추지 않는다. "몸조심하라"고.

나를 미국 유학갈 당시 출국을 쾌히 허락해준 경북대 선배(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는 "나의 친구(연좌제로 패가망신)를 생각하니 너를 내 보내 주겠다"('죽음의 예비검속 참조).

박정희가 죽어서 이 세상에 없는 오늘 날에도 박근혜 모습만 봐도 왜 경북 대구인들은 아직도 '경끼'를 하는 지 좀 이해가 될 것이다. 부산 마산 진해 진주 사람들도 마찬가지임을.

이 '낙동강 전선'은 아직도 우리 뇌리에서 살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언제 해소될까? 그것은 죽어서 무덤속으로 가지고 가야만 하는 엄청난 쇼크학습이다. 즉, 불가능하다.

언제든지 '빨'자만 들어도 이들은 방어태세 아니면 도피행각을 해야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색깔론'이 주효했다. 3공 또는 5공 공안출신 '악질꼴통'들이 그대로 살아남는데 주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바드 대학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스키너씨는 바로 이런 행동의 지속은 '생존의 가치'(Survival value)'가 있기 때문이라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1971)에서 설파한 바 있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 못하면 반복된다고 하겠다.

'낙동강 전선'은 그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반드시 방어되어야할 최후의 요새인 셈이다. 난공불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 날 '정치공세'에서도 유효하다.

 그래서 부산 경남에서도 이들은 '노무현'을 눈물을 머금고 버려야 했다. 내가 살아남아야 하니깐. 망국병 그것은 바로 '색깔, 지역감정론'이다. 진짜 '빨갱이'는 바로 '박정희'이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빨갱이가 싫어요'라고...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라고. 친일부역자의 유일한 생존의 가치는 '반공' 또는 '멸공'투사로의 변신이었으니 어쩌랴!

영남인들 참으로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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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 제2탄 왜 호남인들은 '김대중 선생'을 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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