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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DC대학생아카데미 강사로 나선 한명기 교수. ⓒ제주의소리.
[JDC 대학생아카데미] 한명기 “주변국 변화에 한반도 요동, 국민들 깨 있어야”


G2로 떠오른 중국, 주변국과 마찰이 잦은 일본, 그리고 세계 최강 미국. 강대국 사이에 놓인 한국이 어떻게 하면 국제 정세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답은 과거에 있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주변국이 변화에 휩싸일 때마다 영향을 받아왔기에, 늘 국제 정세에 주목하고 실리적인 외교를 추구하는 역량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특히 이런 노력은 정치 지도자 같은 이른바 ‘높은 사람들’만의 몫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는, 즉 깨어 있는 시민에 의해 변화가 일어난다고 강조했다.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주최하고 제주대학교와 <제주의소리>가 공동주관하는 'JDC 대학생아카데미' 2016학년도 1학기 세 번째 강연이 17일 오후 2시 제주대학교 국제교류회관에서 열렸다.

이날은 한명기 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조선시대 역사에 대해 탁월한 식견을 가진 한 교수는, 14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약 6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동아시아 정세의 흐름을 요약하며,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외교 문제의 해답 실마리는 이미 과거에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최근 동아시아는 사드(THAAD),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북한 핵문제 등 한국·중국·일본·미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이슈로 가득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런 대립은 단지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그랬고, 그 이전 고려나 삼국시대에도 똑같이 부딪혔다”면서 “현재를 사는 우리가 과연 조상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따져보면 정확한 해답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방향으로 가야겠다’ 정도의 전망은 얻을 수 있지 않겠냐”고 되물었다.

한 교수는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 사이에 놓인 한반도의 상황을 복배수적(腹背受敵)으로 표현했다. 앞에도, 뒤에도 적이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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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 정세 속에서 전략적인 자세를 강조한 한명기 교수.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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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기 교수의 강의를 경청하는 학생들. ⓒ제주의소리

그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우리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기존 질서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질서가 생길 경우에, 한반도는 그 영향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 어김없이 위기에 처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1350년경 중국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난'부터 예로 들었다.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원나라가 쇠퇴하고 한족이 중심이 된 명나라가 신흥세력으로 등장하는 혼란 속에 홍건적이란 집단이 등장했다. 그리고 홍건적은 약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고려로 쳐들어 왔다. 고려의 의지와는 무관한 침략인 셈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1550년 무렵, 일본의 국력이 급성장한다. 100년 가까이 이어오던 내전이 종지부를 찍고, 서양에서 신무기 조총을 들여오고, 무수한 전투 속에 실전 경험이 쌓인 군사력도 갖췄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선을 중국 대륙으로 향한다. 명나라를 충분히 정복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게 명나라로 향하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한다.

오랜 시간 동안 명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조선은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고, 그 결과 7년 간의 임진왜란이 벌어진다.

한 교수는 “임진왜란은 단순히 일본이 조선을 공격하는 전쟁이 아닌, 강대국(명나라)에게 신흥 강대국(일본)이 도전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 한반도가 피해를 입은 사건”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당시 조선과 일본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정치 상황에 있어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면서 “조선은 200년 가까이 전쟁을 모르고 지냈고, 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내부 정치가 엉망이 되면서 국제 정세를 읽는 능력까지 떨어졌다”고 강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국토와 국민이 유린당한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위기는 또다시 밖에서부터 찾아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동안 북만주 지역에서 여진족들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왜란이 끝날 무렵이 되자 무시할 수 없는 통일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훗날 청나라가 되는 후금이다.

조선은 또 다시 위기에 처한다. 오랫동안 우호 관계를 이어온 명나라냐, 떠오르는 세력인 후금이냐.

한 교수는 “당시만 해도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에서 건너온 학문을 위주로 공부하며 ‘한족이 아닌 종족은 모두 오랑캐’라는 생각을 주입식으로 배웠다”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의 지도자들은 명나라를 선택했고 그 결과 일어난 전쟁이 병자호란”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이 침략한지 35년 만인 1635년, 이제는 청나라가 조선을 다시 침략한다. 당시 조선 정부는 청나라 병력이 국경을 지나 600km 거리를 5일 만에 돌파해 침공하는데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고, 군수 물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무능을 보였다. 결국 인조는 청 태종에게 큰 절을 올리며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만주땅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는다.

역사의 반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세기 초반 청나라는 ‘아편전쟁’으로 영국에게 사실상 굴복한다. 당시 일본은 청나라가 패배한 실상을 면밀히 파악했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군사력을 키우자는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조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청나라와 계속 잘 지내면 큰 문제 없다’는 안일한 태도를 취한다.

그 결과 1894년 청일전쟁과 이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두 나라를 물리치고, 조선을 식민지로 점령한다.

한 교수는 조선 정부의 안일한 자세를 꼬집는 사례 하나를 설명했다.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이 작성한 ‘징비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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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기 교수 강의. ⓒ제주의소리

임진왜란의 교훈이 담긴 징비록은 시간이 지나며, 조선에서는 없어지다 시피 한 책이 됐다. 이에 반해 일본은 몰래 징비록을 가져다 번역까지 해가며 널리 읽고서, 책이 주는 의미를 공유했다.

한 교수는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강적을 옆에 둔 나라는 주변 정세를 민감하게 파악해야 하고 국가 운영이 철저하게 전략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면서 “다음 세대가 이런 고통을 겪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고자 징비록을 썼지만, 이후의 역사를 보면 위기의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꼬집었다.

그는 “국가 리더와 정치인들은 각자의 노력을 통해 국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별도로 일반 국민도 역할이 있다. 지난 역사와 지금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며 “국민 스스로가 지혜를 키우고 성찰력을 키우는 노력이 뒷받침돼야 국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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