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나무, 제주에서 길을 묻다] ⑤ 4.3고통 견뎌낸 광령리 동정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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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달 말 필자가 촬영한 광령리 귤나무. ⓒ 장태욱

4.3은 제주인들에게 대대손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고, 장애와 트라우마를 남겼다. 게다가 피해자들의 후손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낙인을 남겼다. 4.3 희생자들은 가족을 잃은 데다 반세기 넘게 빨갱이와 빨갱이의 가족이란 멍에를 짊어지고 살았다. 20세기 가장 잔인했던 만행이 제주도라는 작은 섬에게 벌어졌다.

4.3이 비단 사람에게만 상처를 남긴 게 아니다. 일찍이 오래전부터 제주사람들과 함께해 온 귤나무에게도 고통을 남겼다. 그리고 그 상처의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아 야만의 역사를 몸으로 증언하는 재래종 귤나무가 있다. 그 수령이 무려 300년에 가까운 나무다. 

제주시내 서쪽에서 중심지를 벗어나 농촌으로 들어서는 곳에 광령리라는 마을이 있다. 내가 광령리 귤나무를 처음 찾은 것은 재작년 초의 일인데, 당시에는 귤나무는 확인했지만 집주인을 만나지는 못했다. 마당에 들어섰는데 너무나 조용해서 사람이 살고 있는지 조차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생애 처음으로 동정귤이 고목에 달려있는 모습에서 큰 기쁨과 감격을 안고 돌아갔다.

안내표지에는 나무의 높이가 대략 6미터이고, 수령이 300년에 이른다고 했다. 주민들은 이나무를 ‘돈진귤’이라고 불렀는데, 확인해본 결과, ‘동정귤’로 밝혀졌다고 기록되었다. 동정귤은 제주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마을에서 존재가 확인되자 제주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이 귤나무의 가치는 그 희귀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나무는 48년 불어 닥친 4.3의 광풍에  한쪽 가지가 불타 잘려나간 후에도 지금까지도 그 목숨을 보존하였다. 뼈아픈 역사의 증언자로도 희귀성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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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달 말 필자가 촬영한 광령리 귤나무. 보통 체격의 남성과 비교하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 장태욱

재작년 만나지 못한 나무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서 다시 이 나무를 찾았다. 나무 주변에 사는 주민들에게 소문을 들었더니, 팔순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집에 사시는데, 이른 새벽에 밭으로 나가 해가 지고난 후에나 돌아오신다고 했다. 난감하지만 할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는데, 기다린 시간이 무려 5시간이다. 할머니는 저녁 7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할머니는 연세에 비해 정정하셨다. 멀리서 온 나그네를 반갑게 맞으셨고, 궁금한 점에 대해서는 성심껏 조리 있게 답해주셨다. 어두운 마당에서 짧은 시간동안 할머니는 뇌 한 구석에 저장된 4.3의 공포와 남편을 일찍 여읜 뒤의 고단했던 삶에 대한 기억들을 소환해냈다.

성함이 양옥종(33년생) 할머니로 지금 사시는 댁과 이웃한 집에서 태어났다.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라 어릴 적에는 바로 옆집에 동정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훔쳐 먹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16세 되던 해에 4.3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에 자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와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진동하더니 마을에 있는 초가집들이 불길에 휩싸였다.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할아버지께서는 “소들을 모두 풀어 도망갈 수 있게 하라”고 외치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신다.

양할머니가 기억하는 날은 1948년 11월 15일의 일이다. 이날 밤 11시부터 중엄파출소 경찰과 대동청년단원들이 저지른 일인데, 이들은 마을을 기습해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주민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주민들은 이날 일이 무장대가 11월 11일에 중엄파출소를 기습한 일에 대해 보복의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광령리가 중산간에 자리 잡고 있어서, 광령리 주민들이 무장대와 내통하고 있다는 오해를 사고 있었기 때문에 당한 일이라는 거다.

이날 방화사건 후에 마을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졌다. 주민들 다수는 해안가 마을로 소개(疏開)되었는데, 소개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던 주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토벌대에게 잡혀 총살을 당했다.

이정웅(75세) 광령1리 노인회장은 이때 희생당한 사람들과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목숨을 잃은 자들을 합하면 광령리 전체 희생자는 203명에 이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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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 겨울 귤이 가득 열린 광령리 귤나무. ⓒ 장태욱

한편, 1949년 무렵 소개되었던 주민들이 마을로 돌아왔고, 불타버린 마을이 재건되었다. 양할머니네가 돌아왔을 때 동네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가지가 불타버린 상황에서도 늙은 귤나무만이 기적처럼 목숨을 보존하고 있었다.

양할머니는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이웃 귤나무집 총각과 혼례를 올렸고, 동정귤 옆에 작은 초가를 짓고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양할머니의 남편은 마을에 남아있는 몇 되지 않은 청년이었고, 목수 일에 특히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마을을 재건하는 동안은 쉬는 날 없이 집을 지으러 다녔다. 양할머니가 마흔 무렵이 되었을 때, 남편은 아내에게 “광령에서 가장 멋진 집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하며 돌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신의 집을 짓는 동안에도 다른 곳에서 집을 지어달라는 부탁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불려나갔다. 그런데 과로가 겹쳤는지 다른 이의 집을 짓다가 그만 지붕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남편은 아내에게 지어주겠다던 멋진 집을 완공도 하지 못한 채 여덟 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양할머니는 사람을 사서 남편이 마무리하지 못한 집을 완공했다. 그리고 송아지를 팔아서 귤나무 묘목을 구입하고 귤농장을 조성했다. 양할머니가 지금도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곳이 이때 조성한 농장이다.

양할머니는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어떻게 살았는지 아득하다”고 한다. 상처 많은 늙은 귤나무만이 할머니의 고통을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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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주민들 역시 역사의 광풍을 피하지 못했다. ⓒ 장태욱

* 필자는 지난 2001년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에 새로 들어선 임대아파트에 입주해서 3년을 살았고, 그곳에서 첫 애가 태어났기 때문에 광령리와는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깊습니다. 300년 된 귤나무는 필자가 살던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당시에는 귤나무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필자는 지금 제주 서귀포에서 귤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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