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성공의 닻(anchor)? 또는 덫(trap)?
인문학, 성공의 닻(anchor)? 또는 덫(t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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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⑫ 이원석 인문학 페티시즘 /고영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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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석 『인문학 페티시즘』 필로소픽. 2015년.
살아가면서 ‘행복’과 더불어 ‘성공’이라는 말을 되뇌며, 그 경지를 잠시나마 또는 집요하게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행복이나 성공’과 같은 이슈가 동서고금 누구에게나 당연하고 보편적인 가치인가라고 물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저마다 행복과 성공에 대한 이해와 기대치가 다르고, 어떤 이들은 굳이 그 말에 목매지 않고 아니 그 말을 떠올리는 것조차 사치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오늘도 무사히’로 위안삼아 하루를 마치고 있을 터, 위 물음은 어쩌면 뜬금없는 ‘개’소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이나 성공’ 같은 이슈가 우리사회의 보편적인 가치로 급부상하고, 그것에로의 도달의 열쇠를 ‘인문학(humanities)’에서 찾고자 하는 광풍(狂風)이 우리사회를 휩쓸고, 숱한 사람들의 눈과 귀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자기계발서부터 독서, 글쓰기, 기업 컨설팅, 강연회, 북콘서트 등을 통해 인문학이 부적과 같은 신력(神力)마냥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그 결과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가 행복과 성공의 경지에 다다른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언제부터 인문학이 그 본령인 무용성을 벗어나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행복과 성공의 열쇠를 대변하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인문학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러한 인문학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게다가 행복과 성공의 열쇠를 인문학에게 짊어지우는 게 진정 온당한 일일까? 이런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현대판 인문학이 일부 누군가들에게는 닻(anchor, 정신적 지주)일 수는 있지만, 다른 다수의 누군가들에게는 온전히 덫(trap, 올가미)일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호에 소개할 책, 이원석의 《인문학 페티시즘: 욕망과 인문의 은밀한 만남》(2015년)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저자는 인문학 ‘열풍’은 있으나 인문학 ‘위기’는 더 심화되고 있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인문학 페티시즘’이라 규정하고, 대중의 욕망과 우리 사회의 병리학적 현상을 날카롭게 분석하며 모순에 빠져버린 인문학의 현실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이원석은 본인을 “자기계발 분야의 선구적 독자였으나 모두가 자기계발을 외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자조(自助) 신앙을 배교하고, 자기계발서 비판에 뛰어들게 되었다”고 소개한다. 특히 2013년 한국출판평론상을 받은 그의 책 《거대한 사기극》(2013)에서 저자는 시간, 인간관계, 직업, 사랑까지 (자본주의와 미국적 종교가 결탁한) 자기계발의 대상이 된 상황을 지적한다. 자기계발 이데올로기는 “국가와 학교와 기업이 담당해야 할 몫을 개인에게 떠넘김으로써, 사회 발전의 동력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는 거대한 사기극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므로 자기계발서는 더 이상 필수사항이 아니라고 처단하는 대목은 참으로 도발적이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출간된《인문학 페티시즘: 욕망과 인문의 은밀한 만남》은 우리사회 인문학 ‘열풍’ 현주소를 여러 사례를 통하여 소개함과 동시에 저자가 생각하는 인문학의 본령 내지 그 쓰임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저자가 보여주는 곳은 인문학이 우리의 “스펙을 늘려주는 훌륭한 문화적 액세서리”이며 동시에 “다른 이들과 거리를 벌리기 위한, 구별짓기(distinction)의 수단”(p.10)으로 활용되는 소위 인문강단 또는 인문학 아카데미 현장이다. 주최는 대개 대기업 문화센터가 하고, 강사는 국내 최고의 인문학자들이 맡고, 고객은 시간 여유가 많은 유한계급의 마나님들의 조합이 대표적이다. 물론 인문학을 둘러싼 이러한 고급진 구성은 결코 우리사회만의 독자적 문화현상은 아니다. 

이런 현상은 동서고금 “인문교양이 철저히 비실용성을 전제했던 학문”(p.11)의 전통을 잇고 있다. 이른바 ‘유한(有閑) 계급을 위한 인문학’이 그것이다. “원래 자유인, 즉 지배계급은 한가한 이들이다.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이들인 것이다. 즉 지극히 잉여로운 시간을 교양 추구로 채우던 이들이다.”(p.13) 이 대목에서 저자는 《유한계급론》을 쓴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어쨌거나 “이들은 근면한 노동이 아니라 소모적 유희와 과시성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재강조 하고 있다. 

물론 이와는 결이 다른 ‘유한 계급을 위한 인문학’도 있다. 서양의 엘리트(귀족)주의나 동양의 ‘선비정신’이 그것이다. 현실과 직결된 살아 있는 학문을 한다는 자체가 어쩌면 이들 계급들에겐 불명예이고 수치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철저히 비실용성을 지향하는 전통적인 학문(현실적인 질서를 넘어서는 근원적인 질서에 대한 일관된 성찰)을 고수한다. 바로 이것이 이른바 ‘유한계급’들 사이의 인문학이고 그 전통이 일부 계층에선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지향하는 인문학에 대해 우리는 함부로 가치 평가를 내릴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순수로의 회귀가 아니라, 계급적인 퇴행”(p.190)으로 전개되는 점이 우려스러울 뿐이다. 

그 다음으로 저자가 주목하는 현장은 소위 ‘사장님의 인문학’ 교실이다. 소위 공부하는 사장님들의 등장이다. “인문교양이 한가로운 지배계급의 구별짓기 수단으로 활용되던 시절은 지나갔다. 외려 (인문학은) 철저한 실용성을 획득”(p.14)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이 책에서 인용한 김상근 교수의 주장, 즉 “옛날 유럽의 부자와 상공인들이 자기 사업을 키우고,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는 수단이 인문학이었고, 그러니까 기업과 인문학이 찰떡궁합”(p.96)이라는 맥락에서 인문학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일례로 사장님들을 위해 대구 지역 공단에서 개설한 <인문학 강좌> 내용을 홍보하는 기사를 저자는 소개한다. 

“이병철, 정주영, 스티브 잡스, 박태준 등 세계적 경영자의 삶과 경영철학……은 물론 부자들의 철학과 인문학, 성공하는 사람들의 관상과 인문학, 패션과 디자인 역사의 인문학”(p.55) 등등. 한 마디로 푸짐한 밥상 같다. 그런데 ‘인문학’이라는 말을 빼고도 강좌의 핵심을 헤아릴 수 있을 법한데 ‘인문학’이라는 말을 굳이 덧대는 저의는 무엇일까?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지금 인문학은 완전히 텅 빈 기표가 되고 말았다.”(p.57) 

한편, 서울대학교 등 각 대학에서 개설하는 소위 ‘고위(최고) 경영지도자 인문학과정’에 대한 저자의 주장 역시 흥미롭다. 소위 ‘사장님의 인문학’은 다음 장에 이어지는 “인문학은 경영학이다”에서도 전개된다. 그런데 ‘사장님과 인문학’ 이나 ‘경영학과 인문학’이라는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두 체계의 융합이란 것이 우리에게는 낯설어 보일지 몰라도 분명 ‘기업가들’ 사이에서는 그 나름의 전통과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탈리아 피렌체를 거점으로 한 메디치 가문이 14세기~16세기 유럽 르네상스(문예부흥)의 중심에 있었고, 기업 가문으로써 오랜 기간 예술과 인문학에 후원한 역사적 사례처럼, 오늘날 한국판 메디치 기업 가문을 자처하는 일부 기업 프로젝트를 보더라도 “인문학이 기업과 대중의 담론 한가운데 진입”(p.87)하고 있는 현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다만, 저자의 말마따나 궁극적으로는 “고도의 실용성을 추구하는 경영학과 극단적인 무용성을 지향하는 인문학이 만나는 방식에 대해 좀 더 고민할 필요”(p.91)가 있다는 점이다.

한편, 대학 밖의 대학 즉 “배움의 공동체”(p.199)라는 현장에서 펼쳐지는 인문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 역시 자신이 지향하는 인문학의 본령과 쓰임을 이 현장에서 찾고 있는 듯하다. 책의 맥락상 필자는 이 현장에서 펼쳐지는 인문학을 ‘소크라테스의 아고라 인문학’이라 칭해본다. ‘아고라’? 저자 이원석은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아고라’는 어떤 곳인가? 고대 희랍 폴리스(도시국가)의 광장으로, 이곳에 시민들이 모여서 재판이나 친교, 매매 등을 행했다.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끝없는 논쟁을 통해 폴리스의 왜곡된 권위에 도전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참된 앎이었다. 반면에 지금의 대학의 지식인은 아고라 속의 소크라테스라 보기가 어렵다. 지식의 공공성을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기업의 영혼이 대학을 재구성했기 때문이다.”(p.198)

이런 맥락에서 ‘소크라테스의 아고라 인문학’이 지금 대학 밖에서 확산되고 있다. 그 예로 저자는 인문학 연구공동체인 ‘수유너머’(고미숙, 권보드래, 고병권, 이진경 등), 철학의 대중화 운동을 펼치는 철학아카데미, 대안연구공동체, 다중지성의 정원, 세미나 네트워크 ‘세움’, 문탁네트워크, 인문학협동조합, 참여연대 부설조직인 ‘아카데미 느티나무’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제1장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 ‘인문계의 어른돌, 거리의 철학자, 돌직구 철학자, 독설의 상담가’ 강신주의 인문학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저자는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소개하는 고미숙의 표현 즉, “지식과 일상이 하나로 중첩되고, 일상이 다시 축제가 되는 기묘한 실험이 이루어지는 곳”(p.205)에 재차 주목하고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아고라 인문학’을 통해서 말이다. 고미숙의 표현을 곱씹어 보면, “지식과 일상이 하나로 중첩된다는 것은 앎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는 전통적인 공부의 개념에 근접한다. 일상을 축제로 만드는 실험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앎의 기쁨을 회복하고, 나아가 앎과 삶의 융합에서 삶 자체의 변혁을 통한 기쁨을 향유한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p.206)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 이원석의 인문학에 대한 이해와 정의는 이 책 곳곳에서 읽혀진다. 프랑스 시민혁명과 근대화를 통해 널리 확산된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덕목의 실천으로서 인문교양(192), “세상이 부여하는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p.215),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보여준 주인공 앤디의 인문교양, 즉, 영혼의 자유를 위한 “세상의 지배 질서와의 불화(不和)”(p.220) 등등. 그러므로 “인문학의 공부는 다른 삶, 다른 세상을 꿈꾸며 현실화하는 일이다……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세상의 규칙을 넘어서서 다른 규칙, 바로 자기만의 규칙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세상이 새겨놓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힘 말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세상의 위계와 인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이다.”(p.227)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인문학의 본령에서 보면, 인문학의 쓰임은 세속적인 성공의 ‘닻’이 아니라 ‘덫’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사실 인문학적으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논리는 세속적으로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논리보다 불리할 때가 많다. 오죽하면 ‘모난 돌은 정 맞지만, 가만히 있으면 본전은 뽑는다’라는 속담이 생겼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아테네 법정에서 정의를 외치며 독배를 들이켰던 소크라테스처럼, 우리시대에도 대학 밖 아고라 속의 소크라테스들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인문학이 성공의 ‘닻’인가 ‘덫’인가를 묻기 보다는, 무엇이 진정 ‘성공인가’를 묻는 것이 본령임을 독자들 역시 짐작하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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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의 죽음 /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 1787년 작. 독배를 마시기 위해 손을 뻗으면서도 의연하게 연설을 이어가는 소크라테스와 이에 격앙된 아테네 시민들.
마지막으로 필자의 ‘인문(人文)학’에 대한 이해를 거칠게나마 피력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일단, 우리가 말하는 인문학은 서구의 성(聖)과 속(俗) 사상에서 속(俗)에 사는 ‘인간’을 중심으로 세상을 재구성하고, 심지어는 (하늘의 무서움도 모르고)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근대민주주의 사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도발적이며 문제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천·지·인(天·地·人)을 우주의 구성 원리로 보는 동양사상에서 인문(人文, 사회·인권·자유)은 천문(天文, 우주·보편·초월)과 지문(地文, 문화·역사·전통)과 짝을 이루어, 이는 특히 인간세계를 관장하고 그 법칙과 질서를 다루는 한 축이지, 그 자체로 만물의 법칙과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데에는 매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에서는 천문(天文)이나 지문(地文) 위에 인문(人文)이 군림하고, 급기야는 앞의 두 영역이 인문(人文) 내에 흡수되는 현상이 당연시 되고 말았다.

인간들이 살기 위해 동물들의 서식지를 점령하고 파괴하거나, 자동차 또는 공장 매연으로 지구 온난화, 기후 변화, 빙하 융해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에 2000년대 들어 지질학계에서는 오죽하면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을 발표하여, 인류(인간)의 자연환경 파괴가 지구의 환경체계를 뒤바꿔 놓을 것이라는 경종을 울리고 있겠는가! 혹자는 이것이 인문(人文)과 무슨 관계냐고 물을 것이다. 정녕 몰라서 묻는가? 천문(天文)과 지문(地文)의 질서를 인간 위주의 인문(人文)의 질서에서 제단하고 무시한 결과라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필자 또한 인문학에 몸담고 있지만, 어쨌든 인문(人文)만이 알파이자 오메가라는 폐쇄적 주장이 아니라, 인문(人文)은 천문(天文)과 지문(地文)의 동행자이자, 보조자이고 협력자다는 폭 넓고 겸허한 자세와 노력이 진정 21세기 인문학의 본령이라 주장해 본다. 바로 그런 노력이 이 책 제목이기도 한 ‘인문학 페티시즘*’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페티시즘(fetishism): 드 브로스 용어. 신격화된 동물 혹은 존재에 대한 숭배 또는 부적과 같이 사물에 속성을 부여하고 이에 대한 숭배를 하는 행위.

 ▷ 고영자(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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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및 재일제주인센터 특별연구원

일본 오사카대학 대학원에서 미학(예술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연구원 역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대학원 강사(미학) 역임.

현재, 근·현대 문화매체론, 제주미학론, 제주 ‘이미지’ 생성 및 변천사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크리스틴 조디스 저《미얀마 산책》(2008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2012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1845~1926)》(2013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도 항해·탐사기(1787~1936)》(2014년), 《구한말 佛語·英語 문헌 속 제주도(1893~1913)》(2015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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