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과 민주주의...권력순응 '자동인형' 안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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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⑬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이유선(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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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김석희 역, 휴머니스트 펴냄.
1. ‘여론’이라는 허상

지난 총선은 대부분의 여론조사 기관이 여당의 압승을 예측했음에도 결국 여소야대의 결과를 낳았다. 여론조사의 신뢰도에 대한 다양한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여론조사 방법을 개선하는 문제가 아니라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도대체 ‘여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지를 따져보는 일일 것이다. 여론조사를 통해서 조사되는 ‘여론’이 도대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를 고찰하지 않는 한 우리는 늘 우리주변을 떠도는 허상을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사소통을 통해 합의된 공동체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는 대화와 연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올바른 의미의 여론을 형성하는 과정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요건이라 할 수 있다. 여론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서만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론 형성의 주체들인 각각의 개인들은 자율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합리적인 행위자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원론적인 주장은 현실적인 맥락에서는 그 의미가 매우 모호해 진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나 자신의 자율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남의 생각을 나의 생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아마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를 설정하는 문제로 볼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는 스스로 생각하는 개인들을 교육하는 과정이어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무엇이 여론 형성의 주체인 스스로 생각하는 개인들이 형성되는 것을 가로 막고 있는가 하는 데로 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어서 어렵지 않게 열거할 수 있다.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를 했을 경우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고 그에 따라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정하는 일이다. 민주적인 사회의 개인이라면 자신의 선택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사실과 가치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주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여론이라는 것 자체가 형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사회를 통해서 쉽게 엿볼 수 있다. 권력의 관점에서 해석된 사실과 가치만이 전달될 경우 개인들은 그것이 자신의 생각이라고 여기게 되고, 여론은 곧 권력자의 생각과 같은 것이 된다.

언론의 역할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매체가 다양해지는 것과 개인들이 다양한 정보를 전달받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언론이 권력의 기호에 맞는 정보만을 다룰 경우 개인들의 합리적인 판단은 애초에 불가능해진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형편은 북한보다 조금 낫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기에 합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소위 주류 언론 매체들의 뉴스 보도 행태는 북한의 매체가 보여주는 행태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획일화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개인의 합리적인 사고능력 자체를 훼손하는 방식의 선전도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프롬은 언론 매체, 특히 TV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전달되는 광고가 포르노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예컨대 아름다운 연예인이 광고하는 제품을 소비하면 갑자기 자신의 인생이 행복해질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광고는 우리의 논리적인 사고능력을 떨어뜨려 합리적인 판단을 마비시킨다는 것이다. 선택과 결과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그와 같은 사고에 물들 경우, 우리는 정치적인 판단을 할 때에도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면서 거기에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율적인 사고를 가로막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요인은 경제적인 불안에서 찾을 수 있다. 청년실업률이 전례 없이 높다는 사실과 반인륜적인 온라인 사이트가 등장한 것은 깊은 연관이 있다. 삶의 불안정성이 가중될수록 개인들은 자신보다 큰 힘에 의지하여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고자 한다. 한편에서는 현실의 막강한 권력을 편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륜적인 규범을 깨뜨리고 그것을 공개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함으로써 불안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성도착증 환자와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소위 보수를 자처하는 시민단체가 재벌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탈북자들을 일당 2만원짜리 시위꾼으로 고용했다는 슬픈 사실도 우리 사회의 경제적인 불안과 관련이 있다.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은 자신을 돌보아 줄 빅 보스가 출현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맡길 것이다.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율적인 생각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2.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유로부터 도피하지 않는 방법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1941년에 출간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가 처한 민주주의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현재적인 의미를 갖는 책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정신분석학을 연구했던 에리히 프롬은 나치를 피해 1933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하면서 중요한 저작들을 남겼다. 특히 나치가 광란에 휩싸여 대량학살을 막 시작한 1941년에 프롬은 나치즘의 심리를 사회심리학의 관점에서 설명함으로써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이 책이 나치즘의 심리를 분석했다는 점에서 유명세를 얻기는 했지만 프롬의 관심은 나치즘의 심리를 설명하는 데 있었다기보다는 무엇이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전체주의를 불러오는가를 밝히는 데 있었다. 프롬은 이 책의 말미에서 “인간이 사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에만 인간은 지금 자신을 절망에 빠뜨리고 있는 고독과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개체적 자아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실현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 있어야만 허무주의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 사회는 개인들이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 때에만 도달가능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만연해 있는 허무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롬은 자유의 양면성을 고찰하는 데서 민주주의가 당면한 현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란 늘 긍정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며, 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실현할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오히려 개인을 절망에 빠뜨리는 큰 부담감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세의 신분제적인 공동체 사회가 제공했던 유대감은 근대의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오면서 사라지게 되고, 개인들은 전통적인 공동체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게 된 대가로서 각자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었다. 프롬의 관심은 사회적인 현실 때문에 이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뜻대로 영위할 수 없게 될 경우 어떤 사회적 성격을 형성하게 되는지를 밝히는 데 있었다. 루터와 칼뱅에 의해 이루어진 종교개혁은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근대인들의 사회심리를 드러낸다.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구원을 대가로 개인을 철저히 부정할 것을 요구했다. 막스 베버는 근면한 삶을 강조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가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했다고 분석했지만 프롬은 그와 같은 윤리 역시 고독과 무력감이라는 자유의 무거운 부담으로부터 강박적으로 도피하려는 병적인 심리라고 해석한다. 종교개혁과 나치즘은 구원을 위해 개인의 자아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입각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프롬의 이 책이 여전히 현실적인 유효성을 갖는 이유는 그가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그와 같은 허무주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자율적인 개인을 전제로 한다. 자율적인 개인이 되려면 자신의 개성을 긍정하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공동체의 의미 있는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노력이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여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 마치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개혁가들이 자아를 멸절시킬 것으로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게르만 민족의 융성을 약속한 히틀러가 개인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무력감을 주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거대한 자본의 위력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느낀다. 경제적인 불안감은 생존을 위해 자존감을 포기하도록 만들며, 백화점의 화려한 진열대 앞에서 개인들은 스스로를 왜소하다고 느낀다. 이런 삶의 조건들이 만연할 경우 개인들은 쉽사리 권위주의적인 인간형이 되어 권력에 순응하는 자동인형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 스스로 자동인형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을 왜소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들과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프롬의 대안은 “인간의 본래 모습을 희생시키지 않고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자발적인 활동” 혹은 “사랑”이다. 물론 이런 낭만적인 해결책은 비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를 계획 경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포함한다. 이런 주장은 계획 경제의 실패를 이미 경험한 우리에게는 물론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가 사회문제를 합리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진정한 ‘여론’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긍정해야 한다. 매체에 의해 휘둘리지 않으면서 여론을 만들어나갈 때 비로소 사회문제를 제어할 힘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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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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