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고용석 생명사랑채식실천협회 대표,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

1920년대에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타자와 맺는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자아의 본질적 차이에 관한 개념을 발표한다. ‘나와 그것’ 관계는 ‘나와 너’와 달리 상대를 물건으로 여기는 관계이다. 상대를 비인격적으로 바라보면서 우리는 소비 착취하는 대상들의 고통을 감지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영적 전통과 문화는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 관계에서 출발한다. ‘네가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베풀라’를 윤리적 근간으로 삼는다. 불교 기독교 유대교 힐레니즘(유대교 신비주의)은 물론 힌두교도 아힘사(Ahimsa)란 이름으로 황금률의 실천을 중시한다. 공자 역시 평생 동안 행할 만한 것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상대에게 베풀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도 마찬가지다. 옛사람들은 콩을 심을 때 세 알을 심곤 했다.  하늘의 새가 한 알, 땅의 벌레가 한 알, 사람이 한 알을 먹도록 배려한 것이다. 오합혜(五合鞋)와 까치밥 고수레 문화도 예외는 아니다. 심지어 상대의 범위를 인간 뿐 아니라 동식물 무생물까지 자연스레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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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9년 서울 청계천 광장에서 열린 '지구와 생명구하기' 행사.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지구와 생명구하기' 이벤트에서 채식주의자 수 백명이 채식으로 지구와 생명을 구하자는 내용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날 행사는 전 세계 25개국 이상에서 채식주의자들이 오후 2시께 동시에 퍼포먼스를 진행한다고 주최측은 밝혔다. ⓒ오마이뉴스 
 ‘까치밥’ ‘고수레’에 담긴 옛 사람들의 정신  

생명의 존엄성에 기초해 모든 생물과 공존 없이는 지속가능한 사회가 될 수 없음을 옛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나 보다. 사실 영적 전통과 문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인간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최대한 해방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현대문명의 산업화과정은 지구와 생명체를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며 상품화한다. 이는 모든 동물과 자연에 생명과 감각을 박탈하는 데카르트의 제한된 인식에 따른 영향이기도 하다. 현재의 법률체계도 이 과정을 적법한 것으로 보호한다. 미국 헌법의 기초는 유럽 왕정의 통제에서 해방되는 것에 초점을 두고 개인 인권의 새로운 법위 즉 재산권의 확보를 주된 목적으로 두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개인적 인권의 보호는 기업과 산업체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지구를 파괴하는 다국적 기업체까지 확장한다. 이들의 활동을 국민의 안녕과 동일시하며 당연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여기게 된다. 심지어 이들의 생태계 약탈을 지원할 뿐 아니라 보조금까지 지급하는 실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소비지상주의가 국경의 장벽을 넘어 글로벌 사회의 집단의례이자 지배적 문화 패러다임으로 자리했다. 제한된 자원에 무한성장을 추구함은 극심한 불평등과 지속가능성 위기를 낳을 수밖에 없다. 필요와 나눔의 미덕은 사라지고 탐욕과 경쟁이 대신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더욱 황폐화된다. 자연과 동식물들뿐만 아니라 인간과 종교 영성까지도 마치 소비의 대상으로 여기는가 하면 그러한 소비를 유일한 행복의 척도로 생각한다. 

이토록 인간 존엄과 잠재력을 억압하는 문화를 진정한 문화라 할 수 있을까? 죽음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이다. 파국을 치닫는 지속가능성 위기는 상대를 도구로 여기는 ‘나와 그것’의 불안한 자아가 초래하는 예정된 결과일지 모른다. 특히 오늘날 육식을 둘러싼 거대한 고통과 죽음의 쳇바퀴는 ‘나와 그것’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심층부에 음식 선택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보이지 않고 감지하기 어렵기에 더욱 그러하다.

 육식이 부른 공장식 사육환경과 도살 ‘현대판 홀로코스트’ 

밥상에 오르기 위해 연간 700억 마리의 동물이 무자비하게 도살당한다. 어류의 50%와 세계 농지의 80%, 물소비의 70%가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낭비된다. 또한 세계 식량의 40%가 가축사료로 투입되면서 연간 10억 명은 배고파 죽어가는 반면, 20억 명은 배불러 만성질환으로 죽어간다. 그리고 치료용 신약개발을 위해 연간 수억 마리의 동물들이 실험대상으로 희생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제구조의 왜곡과 지구온난화는 물론 치명적 생태계 파괴를 초래한다. 이는 미래의 아이들과 생명들에게 무의식적 폭력과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평화를 기대하겠는가! 현대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는 폭력, 아동학대, 자살, 약물중독, 비만, 스트레스 등을 성찰해보면 모든 것이 우리가 오로지 이익을 쫓아 고기를 빨리 살찌우기 위한 과정에서 동물들에 가한 행위들이다. 인공수정을 통해 갓 태어난 새끼들을 떼어놓고 강제 임신을 거듭시키며 온갖 약물을 투여한다. 

공장식 사육환경과 도살과정은 현대판 홀로코스트와 다름 아니다. 동물들에 엄청난 두려움과 스트레스 분노 등을 야기한다. 고기를 먹는 것은 이 보이지 않는 모든 것도 먹는 것이다. 동물들에 가한 폭력은 부메랑이 되어 인간사회 곳곳에서 똑같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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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9년 서울 청계천 광장에서 열린 '지구와 생명구하기' 행사.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지구와 생명구하기' 이벤트에서 채식주의자 수 백명이 채식으로 지구와 생명을 구하자는 내용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날 행사는 전 세계 25개국 이상에서 채식주의자들이 오후 2시께 동시에 퍼포먼스를 진행한다고 주최측은 밝혔다. ⓒ오마이뉴스 

내면의 영향도 없겠는가. 하루 세 끼 동물의 살을 먹으며 부지불식간에 생명체를 물건으로 보는 것을 훈련한다.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인간을 올려놓고 특권과 지배의식을 무의식적으로 흡수한다. 소수가 부와 자원을 독점하는 약탈적 경제체제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반복적 식사행위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들, 황폐해진 생태계 그리고 후손에 끼치는 고통과 단절하는 데도 익숙해진다.

그런 면에서 동물을 식용으로 삼아 학대하는 행위는 단연코 우리 문화 최대의 그림자라 할 수 있다. 사실 끔찍한 것은 동물의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어리석음이다. 고기를 먹는 것은 본연의 생명에 대한 연민과 자비심을 짓뭉개고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일종의 집단적 죄의식을 형성하고 이 집단적 죄의식은 우리가 먹는 폭력을 감추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도록 조장한다. 지구적 생태계 파괴, 소비지상주의, 여성억압, 인종차별, 약물중독 등은 어떤 면에서 소위 그림자의 외부적 투사이다. 

 비건이 평화와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인 이유?

육식을 둘러싼 죽음과 고통의 쳇바퀴는 우리 자신과 문화에 내재한 폭력과 미망이다. 게다가 시장효용성 효율성 합리성의 이름으로 제도적으로 자행되기에 감지하기가 더더욱 어렵다. 한 곳의 부정의는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 매끼의 자비로운 식사는 거대한 고통과 죽음의 쳇바퀴에 대한 ‘알아차림’이며 ‘나와 너’ 관계로의 전환이다. 한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들의 희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감사의 마음과 자비를 키우는 방향으로 최소한의 폭력이 행사돼야지 탐욕은 곤란하다.

현대과학과 환경운동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이후 산업화의 무한질주를 제한하는 규제위주에서 새로운 전환에 눈뜨고 있다. 어쩌면 영적 전통과 문화에 드러난 우주관과 인간관을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기본 속성이 생명과 의식일 가능성에 관한 도도한 각성이다. 우주는 완전한 상호의존체계이며, 만물은 하나하나 고유하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우리 행동의 결과도 살아있는 우주에 공명해 윤리적 되울림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생명의 그물을 찢어놓는다면 그 덫은 곧 우리의 존재자체에 구멍을 뚫어놓는 것이다. 파국으로 치닫는 지속가능성 위기는 결국 인간의 위기이며 스스로 그러하는 자연과 생명이 우리에게 주는 준엄한 경고인 셈이다. 

우리는 생명 속에 깃든 영성과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는 존재이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부분에서 이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제 두 눈이 하는 일은 그만두고 마음의 일을 행해야 한다. 환경·문화·정치·경제 위기도 깊게 바라보면 영성의 문제이다. 

영성의 회복은 자비심을 갖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현실의 상식에 기초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새로운 존재방식의 근거를 찾는 것이고 당연이 현재의 법률체계도 가장 원초적 토대에서 검토하는 것을 포함한다. 현대의 비건(vegan, 완전채식) 운동은 모든 생명을 향한 자비심과 그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마음살피기에 기초한다. 낱낱의 ‘너’는 영원한 ‘너’를 들여다보는 틈바구니이다. 비건은 이름일 뿐 사실상 상호의존성에 대한 자각의 한 표현이다. 석가탄신일에 비건 운동을 다시 강조하는 이유다. 

 고용석 대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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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용석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
비건채식운동가. 1994년, 환경・시민・종교단체가 총망라된 국내 최초의 국제 채식 심포지엄 ‘채식이 지구를 살립니다’를 비롯해, 지구온난화 관련 글로벌 컨퍼런스를 수차례 기획했다. 지구온난화비상협의회 대표와 식생활교육부산네트워크 공동대표를 역임하고, 국제채식연합IVU을 대표해 세계 NGO대회와 유엔회의 관련 활동에 참여했다. 2005년부터 생명사랑채식실천협회 대표로 활동하며 현재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를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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