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극복할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제주4.3
아버지를 극복할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제주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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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칼럼] 박 대통령이 4.3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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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란 어떤 딸에게는 삶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그리움과 고마움으로 아버지를 기억하는 딸이다. 딸의 마음속에 아버지 표상이 자리 잡고 있다면, 그 딸은 세상의 어떤 풍파도 이겨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자리를 가능하게 했던 절대권력 ‘아버지 박정희’를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덕을 봤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딸’이라는 프리미엄 덕분에 정치세력의 리더가 될 수 있었고,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국민 계층의 지지에 힘입어 최고 권좌에까지 올랐으며, 지금도 그 권좌를 누리고 있다.   

그렇지만 ‘정치인 박근혜’는 박정희의 대리인이 될 수 있었지만, ‘대통령 박근혜’는 ‘대통령 박정희’를 대리할 수 없고, 대리해서도 안 된다. 아버지가 통치했던 시대와 그 딸이 통치해야할 시대는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 아버지의 스타일을 차용한 정치 스타일도 바꿔야 한다. 

심리학자들은 아버지에게 특별한 영향을 받은 딸을 ‘아버지의 딸(father’s daughter)’이라고 표현한다.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는 권위적 통치를 일삼던 ‘아버지 박정희’처럼 민주적 의식과 소통 능력이 부족해 보이고, ‘아버지 박정희’가 구사했던 뛰어난 용인술과 국정 장악력도 갖추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에 첫 여성 대통령이 됐다. 후보 시절 ‘복지국가가 아버지의 꿈’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국민들을 설득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또 다른 정치적 자산 중 하나가 그의 ‘어머니 육영수’였다. 대선 과정에서 그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보인 숱한 지지자들이 떠올린 건 사실 박정희가 아닌 육영수였다. '따뜻한 보수'에 대한 기대인 셈이다. 그렇지만 그 기대는 그야말로 판타지에 그치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흐뭇하게 생각할 일들이 그의 고향에서 벌어지고 있다. 박정희 생가가 있는 경상북도 구미시는 시청 문화예술담당관 산하의 박대통령기념사업담당부서 직원들을 생가 안에 배치해 업무를 보도록 했다. 박정희 생가는 대구·경북 보수 정치권의 성지처럼 취급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구미시(龜尾市)’를 ‘박정희시(朴正熙市)’라고 부를 정도다. ‘박정희 탄신제’에는 구미시장을 비롯해 경북도지사, 국회의원, 시·도의원 등이 참석한다. 선거철만 되면 구미시의 각종 선출직 공무원 출마자들이 박정희 생가를 방문한다. 박정희 관련 기념사업 및 시설에 수백 억 원의 중앙정부 및 지자체 예산이 투입되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권 탄생 첫 해인 2013년 10월 25일, 서울 강남의 한 교회에서는 박정희 추모예배가 진행됐다. 이곳에서는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성경 구절에 빗대어 성찬하고, 찬송가를 불러야 할 때 박정희가 만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보통 십자가가 있는 자리에 박정희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아버지와 동일시하다

미국의 심리학자 모린 머독(Maureen Murdock)의 저서『여성영웅의 탄생(The Heroine's Journey)』에는 ‘아버지의 딸(father's daughter)’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딸’은 “자신을 주로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아버지의 남성적 가치로부터 관심 받고 인정받기를 갈구해온 여자”를 말한다. 여성이 기존의 여성 이미지들과 결별하기로 할 때, 그들은 부득이하게 전통적인 ‘남성영웅의 여정’, 즉 성공을 향한 길을 따라 여정을 시작한다. 아버지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모습은 딸의 야망에 불을 지핀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기념행사장에서 육영수가 문세광이 쏜 권총 두 발을 맞아 사망했다. 영애(令愛) 박근혜는 프랑스 유학 중 그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 대한민국의 영부인 역할을 대행했다. ‘구원자 아버지’ 곁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딸’이 되었다. ‘아버지의 딸’, 영애 박근혜는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아버지의 남성적 가치로부터 관심 받고 인정받기를 갈구하면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다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살해당하자 ‘아버지의 딸’은 청와대를 떠나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특별시 신당동 사저로 돌아간다. 그 10년 후, 시청자들은 기억할까. 1989년 5월 19일 밤, MBC는 <박경재의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 박정희’를 말한다> 프로에 ‘아버지의 딸’을 출연시켰다. 18년간을 대통령의 딸로 지내고, ‘10․26 이후 처음으로’ 토론석에 앉았다. 시청률이 81%까지 올랐다.  

물론 사회자가 ‘몰아세우듯’ 인터뷰를 하였지만, ‘독재자를 위한 그 딸의 변명’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또 5․18광주항쟁 9주기 뒷날, ‘유신독재’자의 딸에게 1백10분간의 시간을 할애한 것은 광주희생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 박정희’에게 불리한 문제는 모두 “사실과 다르다”, “모른다” 등으로 부인하였다. ‘유신(維新)’에 대해서까지도 이를 옹호하는 등 두둔 위주의 솔직하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

모린 머독은『여성영웅의 탄생』에서 “어떤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생각하고, 남성들과 경쟁하고, 남성들의 게임에서 남성을 이기는 방법을 배우는 것에 크나큰 자부심을 느낀다. 이런 여성들은 영웅적인 성취를 이룬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결코 ‘충분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 신경을 갉아 먹히는 듯한 괴로움을 느낀다. 그들은 남성들과 같아지고 싶어 점점 더 많은 일을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아버지 박정희’ 곁에서 아버지가 규정한 기준이 사회적 기준임을 지켜보며 자란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가 규정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온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은 부득이하게 ‘아버지 박정희’가 향한 길을 따라 긴 여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 박정희’가 일을 해내는 모습은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의 야망에 불을 지핀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딸’로서의 정치행로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도 닮은꼴이다.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Sukarno)의 딸인 메가와티(Megawati) 대통령. 아버지가 나라의 초석을 놓은 대통령이고, 그 후광으로 대통령이 됐다는 점부터 박근혜 대통령과 공통점은 시작된다. 제주명예도민으로 위촉될 예정이었던 메가와티가 제주를 찾을 예정이었으나 취소되기도 했다. 

또 있다. 필리핀의 마카파갈(Macapagal) 대통령은 강력한 친미반공 정책을 펼쳐 필리핀의 공산화를 막았고 부패 척결에 매진했다. 그의 딸 아로요(Arroyo)도 대통령이 되었다. 아로요는 자신과 남편의 수뢰·이권 개입은 물론 정부의 부정부패, 민생경제 악화 등 실정을 거듭, 민심을 잃었다.  메가와티와 아로요 대통령 모두 아버지를 극복하는데 실패했다.

“가장 큰 ‘리스크’는 권위주의” 

2012년 미국의 주간지 타임은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을 소개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독재자로 평했다. 기사의 최초 제목은 ‘The Strongman‘s Daughter’였다. 한국 언론과 정치인들이 해석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생기자, 기사의 제목을 'The Dictator's Daughter'로 수정하기도 했다.

미국의 일간지 LA 타임스 역시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전하는 기사에서 “한국은 비록 튼튼한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 있지만, 남북이 모두 독재자의 자식들이 통치하게 되었다는 비아냥을 피할 수 없게 됐다.(Despite the robust democracy in this country of 50 million people, the irony was not lost that both Koreas will now be governed by the offspring of autocratic leaders.)”라고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평가했다.
 
영국의 가디언 역시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전하며, 박정희를 독재자(dictator)라고 평했으며, 프랑스의 르몽드는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소식을 전하며 “Ironie du sort, Mme Park sera arrivée au sommet du pouvoir en battant dans les urnes un des opposants historiques au régime de son père, Moon Jae-In, figure des années noires qui paya de sa liberté son engagement pour les droits de l'homme.(아이러니한 것은 박근혜는 아버지의 잔인한 통치를 부정하면서 당선되었는데, 낙선한 문재인은 박정희의 독재에 맞서 자유를 위해 활동하였다는 것이다.)”라고 밝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잔인한 독재자로 평가했다. 

미국NYT는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알리는 기사에서 박정희를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림했던 독재자(South Korea’s longest-ruling dictator)‘로 평가했다. 지난해 1월13일 ‘정치인과 교과서’라는 사설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교과서 개정 시도를 우려한 바 있다. 당시 신문은 아베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A급 전범이라는 점과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가 일제에 협력한 군 장교였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박 대통령은 일본 식민통치와 독재 시기가 교과서에 반영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NYT는 “역사교과서를 고치려는 두 나라의 위험한 시도는 역사의 교훈을 위협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19일 사설에서는 “한국의 가장 큰 리스크는 박근혜의 권위주의”라고 날선 비판을 내놓았다. 이어 “해외에서 한국에 대한 평판을 좌우하는 가장 큰 리스크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라며 “박근혜 정부가 강압적으로 역사를 다시 쓰고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 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 사설은 특히 박근혜 정부의 ‘억압적 조치’를 보여주는 사례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거론했다. 중·고교 역사교과서를 검정에서 국정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가리켜 신문은 “박정희 장군의 딸인 박근혜가 아버지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려는 의도로 학생들에게 미화된 역사를 가르치려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민주주의와 자유가 산업화의 걸림돌로 여겨진 독재 시대를 미화하려 한다고 꼬집었다. 

제주4․3과 ‘아버지의 딸’ 

“4․3사건 당시 모든 야만적 행위는 자행됐었으나 모두 숨겨져 제주도민의 원한은 한없이 쌓여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에 과도정부는 전력을 기울여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동시 4․3사건 당시 양민을 학살하고 방화 등을 자행한 주동자와 졸도(卒徒)들을 엄정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민심수습의 완전한 효과는 거두지 못할 것이다.” -1960년 5월 일/4․3사건진상규명동지회/ 고순화(高順華) 고시홍(高時弘) 박경구(朴卿久) 양기섭(梁基燮) 이문교(李文敎) 채만화(蔡萬華) 황대정(黃大定)‘-제주신보 1960년 5월 26일(광고/호소문)

제주4·3의 첫 진상규명 운동은 1960년 4·19혁명에서 비롯됐다. 4·19혁명은 도민들에게도 희망으로 다가섰다. 거기에는 도민들이 움츠려서 입을 열지 못했던 ‘4․3문제 해결’이라는 크나큰 과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제주대학생 7인은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결성해 자체 조사활동에 나섰다.  그렇지만 ‘아버지 박정희’는 이를 용납할 리가 없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경 ‘아버지 박정희’가 중심이 된 쿠데타군은 제주4․3에 자갈을 물렸다. 군사쿠데타 이튿날인 1961년 5월 17일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 회원 이문교, 박경구가 검거되었다.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모슬포 유족들도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6월 15일 경찰은 전년도에 건립된 ‘백조일손위령비(百祖一孫慰靈碑)’를 부숴서 땅속에 파묻어버렸다. 백조(百祖), 아니 132명의 유골은 ‘아버지 박정희’의 쿠데타로 흩어졌다. 경찰은 모슬포지서 급사에게 술을 먹인 후 해머를 주어 비석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군사쿠데타 이후 ‘아버지 박정희’의 군사정권 하에서 4․3사건에 대한 논의는 일체 불허되었다. 서슬이 퍼런 반공법, 국가보안법과 연좌제 등의 구도 하에서 4․3사건에 대한 논의는 힘들어졌다. 제주시에서 서귀포시까지 횡단도로를 ‘5․16도로’라 명명하였다. 

그렇지만 역사(歷史)는 항상 정의(正義)의 강물로 흐르는 법.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4․3사건에 대한 논의는 다시 불처럼 일어났다. 1992년 4월,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132구의 두개골이 수습되었고, 다시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를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백 분이지만 그 손자들은 다 한 손자다. 

그동안 제주4.3은 질곡의 역사와 시대적 아픔을 딛고 4.3특별법 제정을 시작으로 진상조사보고서 채택과 대통령의 공식사과 및 4.3 평화공원조성에 이르기까지 유족들과 도민들의 아픔을 달래 왔다. 제주4․3에 대하여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은 ‘제주4․3희생자 국가추념일 지정’을 실천함으로써 제주도민과 유족들의 가슴속 깊은 아픔을 어루만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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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그렇지만 이번 제68주년 4․3희생자 추념식에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4년째 아직까지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 박정희’가 제주4․3에 대한 가해행위로 인한 콤플렉스가 아니고 또 무엇일까? /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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