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16) J.K. 깁슨-그레엄,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여성주의 정치경제 비판』/서영표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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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K. 깁슨-그레엄,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여성주의 정치경제 비판』엄은희, 이현재 옮김. 출판사 알트, 2013.
여든 살의 사회주의자 영화감독 켄 로치(Ken Loach)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로 두 번째 칸영화제 대상을 받은 직후 “절망의 시대, 극우파들이 이득을 보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말해야만 한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가 체험하고 있는 절망의 시대는 우리가 겪고 있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는 시장의 논리가 일상까지 넘어 들어와 친밀성, 유대, 연대마저도 화폐적 가치로 평가받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지그문트 바우만(『사회학의 쓸모』)과 리차드 세넷(『뉴캐피털리즘』)을 통해 이야기했다. 맹목적이고 돌진적인 성장 추구가 얼마나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맥마이클의 증언(『거대한 역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희망을 갖기에는 너무나 절망적인 현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80세의 영국 좌파 감독은 ‘희망’을 이야기한 것이다. ‘다른 세상’을 믿지 않고서는 그것이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희망을 품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단단한 것 같지만 유연하고, 유동적인 것 같지만 매우 촘촘하게 짜여 있는 자본의 논리와 시장의 관계가 우리의 심성마저도 변화시켜버린 지금이 절망의 시대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린 학생들은 공부에 지쳐 절망하고, 청년들은 불안정한 고용과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절망하고, 4~50대는 경쟁의 압박과 퇴출의 위협 때문에 절망하고, 60대 이상의 노년층은 빈곤과 외로움에 절망한다. 하지만 절망할 뿐이다. 그저 절망에 빠져서 스스로의 처지를 한탄할 뿐이다. 수십억의 수임료를 받았다는 전직 검사와 판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원자로 고립되어 체험한 절망을 분노로 공감하고, 분노를 공통의 저항으로 발전시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는 재벌들의 파렴치함이 단골로 등장하지만 그건 거실과 영화관에 갇혀 버린 박제된 분노에 멈춰 버린다. 이런 판국에 희망은 ‘가능하고 필요한’ 어떤 것 아니라 꿈속에서나 가능한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캐서린 깁슨(Katherine Gibson)과 줄리 그레엄(Julie Graham)은 1996년 세상에 나왔고 2006년 재판이 출간된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에서 희망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 두 사람은 1992년 이후, 2010년 줄리가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J-K Gibson-Graham이라는 공동필명으로 작업했다. 따라서 깁슨-그레엄으로 표기한다.) 그리고 그 희망은 근거는 공간, 시간, 그리고 몸과 마음까지도 규율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자본의 논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강력하지도, 촘촘하지도 않다는 사실에 있다고 논증한다. 영어 제목인 ‘우리가 알고 있던 자본주의의 종말(The End of Capitalism As We Knew It)’은 저자들의 주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실상 엄청나게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반자본주의적, 탈자본주의적 관계들에 의해 지탱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절망은 지금 당장의 고난과 역경에서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미래에 나아질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절망한다.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은 것은 오로지 개인으로 맞서야 하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괴물이다.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희생과 단결을 강요받지만 그 국가와 민족 안에서 ‘나’는 종종 무능력자로 낙인찍히고, 실패자로 지탄받으며, 국가에 기생하는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으로 내몰리기에 절망한다. 이렇게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깁슨-그레엄이 던지는 메시지는 자본주의의 지탱을 통해 이득을 얻는 집단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집단은 역설적으로 이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좌파 이론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너무나 강력해서 사람들은 옴짝달싹 못하게 체계 안에 묶여 있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제는 논쟁의 시야에서 거의 사라졌지만 20세기 중반 세계 지성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들은 ‘문화산업’(culture industry)이 제조해낸 이데올로기적 상품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일차원적인 바보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들의 근본적인 비판의 끝은 비관주의였을 뿐이었다. 희망은 사라져버렸다. 짧지만 강렬한 흔적을 남겼던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루이 알튀세(Louis Althusser)가 말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작동도 사람들을 순응하는 꼭두각시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다. 소위 신자유주의의 공고화 이후 비판적 학자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해야 신자유주의가 출현시킨 새로운 통치성(governmentality), 몸과 마음을 규율하는 권력의 작동기제를 분석하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깁슨-그레엄은 절망할 뿐 희망을 가지 못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좌파들의 자본주의에 대한 과대평가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깁슨-그레엄의 주장은 아주 단순하다. 지금 우리는 무엇인가 다른 것, 자본, 시장, 화폐의 논리와는 다른 어떤 것을 실천하고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대안화폐나 협동조합일 수도 있고, 의료와 교육에 대한 국가의 공적서비스일 수도 있다. 가사노동과 친인척 사이의 협력관계는 또 어떤가? 여전히 남아 있는 마을단위의 협동과 연대, 공동 목장과 공동어장의 공동체적 관리, 비영리 기업과 사회단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강력하고 지배적인 자본주의의 성격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이미 ‘다른 세상’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깁슨-그레엄은 ‘다른 세상’의 사례들을 발굴하고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지역 활동가들을 지원했다. 그들이 참여한 공동저작인 『타자를 위한 경제는 있다』(동녘)를 참고할 수 있다.) 

깁슨-그레엄은 노동계급의 타락과 파시즘을 경험했던 20세기 중반 좌파 사상가들이 가졌던 비관주의적 관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자본주의의 틈새들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자본주의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선언과 좌파 사상가들의 비관주의적 시각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켄 로치는 희망을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깁슨-그레엄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를 수는 없을 것 같다. 과도한 비관주의만큼이나 위험스러운 것이 과도한 낙관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힘은 위기를 체계 안으로 흡수하면서 스스로를 변형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주기적 위기와 파국에 대한 사회주의적 도전을 흡수해서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를 창출했고, 경직된 복지국가를 비판하는 정체성과 다양성에 대한 요구를 신자유주의적 소비주의로 전화시키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제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환경위기와 경제위기를 ‘녹색’을 앞세워 돌파하려 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미세먼지는 지금 우리가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고, 이동하는 방식 자체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지만 ‘녹색’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체험하고 있는 모든 위기와 위험을 새로운 상품이 개발되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축적의 기회로 간주한다. 깁슨-그레엄이 발굴하고 증명했던 무수히 많은 ‘다른 방식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들은 새롭게 변형되어 출현한 자본의 논리에 접속하거나 고립된 채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로 낙인찍히는 선택을 끊임없이 강요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깁슨-그레엄의 주장을 ‘과도한’ 낙관주의로 읽어서는 안 된다. 깁슨-그레엄이 하고자 했던 것은 개인으로 고립되어 연대의 끈을 상실하고 절망하거나, 그 절망을 약자를 향한 분노로만 표출하는 파시즘적 경향(우리 사회에 만연한 약자를 향한 혐오범죄를 생각해 보라)을 넘어 ‘다르게 살 수 있는 권리’,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은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려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이미, 그리고 항상 자본주의와는 다른 실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현실이다. 이 현실이 미래의 모습을 청사진처럼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깁슨-그레엄의 증언을 통해 옴짝달싹도 못하게 자본논리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저항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세상’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것이다! 

한 가지 더. 깁슨과 그레엄은 모두 페미니스트 지리학자들이다. 한국의 극악한 남성우월주의 이데올로기는 남성들의 무의식에 깊이 자리 잡은 근거 없는 여성에 대한 멸시와 혐오가 사회적 쟁점이 되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다. 억압받고 착취 받는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곧 남성우월주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강인하고 도전적이어야 한다는, 만들어진 남성성을 견디지 못해 고통스러워 하지만 결국 그 고통을 다시 여성과 약자들을 향한 공격성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들은 남성우월주의와 가분장주의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이 ‘남성해방’의 길이다. 그리고 그러한 남성해방 우리가 직면한 여러 위기들(기후위기, 경제위기, 정치위기, 사회위기)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쟁’과 ‘정복’이라는 남성적 가치가 아닌 ‘연대’와 ‘공존’이라는 여성의 가치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깨닫는 것이다. 깁슨-그레엄이 ‘다른 삶의 방식들’을 조금 더 잘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여성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성과 남성성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본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성의 가치로 남성의 가치를 비판하는 것은 세상의 반인 남성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불평등과 억압을 재생산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기제로서의 남성주의를 비판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다른 삶’의 방식은 불평등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논리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인 동시에 강요된 성차를 넘어서는 ‘교육’과정이어야 한다. 여성해방이 남성해방인 ‘다른 세상’의 실천을 통한 교육 말이다.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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