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17) 앨러스테어 보네트 『장소의 재발견』/고영자 박사 

x9788962605471.jpg
▲ 앨러스테어 보네트 《장소의 재발견》 박중서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5년.
‘장소’는 무수한 기억을 머금은 저장고다. 물론 그런 장소들의 기억을 소생시키는 것은 사람들의 증언이나 지도 및 기록물들이다. 그렇다고 이들 증언과 기록물들이 그 장소가 누천년에 걸쳐 겪으며 헤쳐 간 모든 것을 일일이 전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필자는 오래전부터 ‘(인간에 의한) 기억의 장소’ 보다는 ‘장소의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전개되는 장소 담론과 장소 탐험에 깊은 흥미를 갖고 있다.

필자가 최근 몇 해 전부터 ‘제주풍경미학’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지면에 기고하고 강의하는 내용들은 이런 여정에서 나온 것이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하나의 풍경이 된 장소’ 또는 ‘한 장소가 빚어낸 풍경’을 따라 여러 장소에 연루된 이러저러한 삶의 무한한 이야기를 추적하고, 듣고, 음미하면서 그 장소를 추체험(追體驗)해보자는 취지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만나고 언급하는 자연적 풍광이나 개별 구축물들은 그 자체의 역사나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들 구축물들을 세웠다가 해체하기를 반복했던 그 장소의 무수한 기억(이야기)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나 배경이 되었으면 한다고 어느 지면에 쓰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에 소개할 앨러스테어 보네트(Alastair Bonnett)의 저서,《장소의 재발견(2014)》, (박중서 옮김, 책읽는 수요일, 2015)은 무엇보다도 필자에게 매우 반갑고 의미 있는 책이다. 저자는 현재 영국 뉴캐슬대학 사회지리학 교수로 서양의 사상(문화·정책·역사), 향수와 기억의 지리학과 정치문제, 반인종주의와 ‘백인성’의 국제역사, 유럽 아방가르드의 지리학적 이론 등을 연구하고 있다. 

《장소의 재발견》은 우리들 감각에서 사라진 이른바 ‘게니우스 로키(genius loci, 장소의 혼)’에 대한 경외심, 즉 장소의 특별함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표명하는 한편, 예측불허에 파편화되는 대도시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걱정이 담긴 책이다.

저자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런던 인근의 소도시 에핑(Eping)을 이렇게 소개한다. 자동차를 타고 런던 외곽 순환도로를 따라 운전하다 보면 ‘어디도 아닌 곳’에서 역시나 ‘어디도 아닌 곳’으로 점철된 곳. 너무 개성이 없고 천편일률적이고 무장소(진정성을 상실한 장소)적인 곳. 그저 지나치기만 하는 경유지로 쇠락해버린 곳……이라며. 

거기다 과잉 이동의 시대이다 보니 “장소에 있는 것보다 장소로 가는 것이 더 중요”(p.381)해지고 말았다 지적한다. 그런 까닭에 이러한 “뭔가 독특하고 두드러진 장소들이 점차 천편일률적으로 단조롭기만 한 경관으로 대체되고, 사람들이 뭔가 중요한 것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이야기”(p.6)는 이미 전 지구적 차원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저자는 이러한 밋밋한 도시 경관의 탄생을 공간(space) 개념으로 장소(place)를 극복해 온 역사의 결과물로 본다. 대체 무슨 말일까? 그의 논지를 따라가 보자(p.7~8).

고대와 중세의 사고방식에서 장소란 종종 무대 중심, 다른 모든 것들을 위한 토대이자 배경이었는데, 차차 유일신 종교가, 나중에는 계몽주의가 내놓은 보편주의적 요구와의 공모 때문에, 장소는 결국 지역적인 것으로, 즉 장소는 전 지구적인 일치라는 웅장하지만 추상적인 전망과 비교했을 때에는 오히려 단조롭고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현대 지식인들과 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이 세상 어디에서나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함으로 장소에 대해서는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소는 추방되었으며, 급기야 약간은 우쭐대고 적당히 추상적인 지리학상의 경쟁자인 공간(space) 개념이 대두하면서 이런 강등과 추방의 과정은 더욱 촉진되었다. 공간 개념은 가능성으로 가득한 텅 빈 풍경을 보장하듯, 이는 가득한 분주함과 기묘함이 깃든 장소에 직면했을 때는 그 장소를 곧게 펴고 합리화하고, 또한 관계를 우선시하고 장애물을 지우는 역할을 자임했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발언이다. 종교적·철학적·지리적 차원을 아우르면서 장소와 공간 관계를 이토록 간결·명료하게 비교·설명한 문장이 어디 또 있을까 싶다. 이와 같이 보편주의(공간) 입장에서 특수성(장소)을 극복해 온 사례는 우리 주변 제주역사를 통틀어서도 얼마든지 있다. 

가령, 조선시대 유교주의, 유교정책, 유교교육 등이 그렇다. 중앙 차원의 유교적 ‘보편주의-계몽주의’가 제주도에까지 비집고 들어오면서 제주도 마을경관이 점차 유교식으로 위계화·단일화 된다. 제주도 토속 신앙 및 신당(神堂)들은 보편가치에서 밀려나 배척된다. 백성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마을 지명(地名)은 식자(識者)들이나 쓰고 읽을 수 있는 한자명(漢字名)으로 둔갑한다든지. 가깝게는 1970년대 전후로는 관광이다, 새마을운동이다 하면서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자”더니 마을은 장소로서 ‘어딘가’가 아니라 ‘어디도 아닌 곳’ 같은 공간들로 재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제주라는 지역적 특수성(독특함, 내밀함, 기묘함, 난해함 등)은 중앙에서 요구하는 보편주의(깔끔함, 간소함, 명료함, 질서정연함 등) 또는 전 지구적 차원의 국제규격이라는 다리미로 곱게 다려지고 윤색되길 오랫동안 반복하다보니 소소하지만 무궁무진한 이야기로 넘치는 장소의 기억은 희미해져 버렸다. 노래 제목처럼 ‘강남 스타일’ 바람이 온 섬을 휩쓸다시피 하고 있으니 우리가 ‘섬’에 있다는 감각마저 무디게 한다.

다시《장소의 재발견》으로 돌아오자. 저자는 잃어버린 곳, 숨어있는 곳, 주인 없는 땅, 죽은 도시, 예외의 장소 등으로 이야깃거리를  묶어서 그야말로 기기묘묘한 세상 구석구석의 장소들을 (재)발견하고 그것들 고유의 (사회적·문화적·역사적) 정체성을 탐색한다. 여기에는 무심코 지나치는 도심의 교통섬부터 북극에서 떨어져 나온 얼음 섬, 떠 있는 섬, 가라앉은 섬, 마닐라의 주거형 공동묘지, 지하도시, 시칠리아의 고고유적공원, 사방이 국경으로 쪼개어져 있는 나라, LA국제공항 주차장, 여성 배척의 수도원, 제네바 자유무역항의 면세창고 등등 세상 구석구석 다양한 장소들이 그곳에 숨은 이야기들과 함께 소개된다.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낯설지만 흥미진진 그 자체다. 그러기에 책 읽는 재미도 쏠쏠하고 그곳으로 가고 싶은 탐험의 욕망도 배가된다.

한편, 이 책에 소개된 장소들 중에서 ‘제8장 일시적 장소’에 소개되는 <일주일간의 유토피아: 노웨어축제 Nowhere Festival>를 별도로 주목하고 싶다. 여기에는 현대인들의 ‘장소의 재발견’을 넘어서 그들만의 장소를 만들고, 또 장소를 기억하는 기술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앞으로 우리사회의 ‘장소 문제(창조, 탄생, 보존, 파괴, 기억)’에 관한 성찰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nowherefestival.jpg
▲ 2015년 스페인 북부에서 열리는 노웨어축제장(출처: http://brokeassstuart.com)

노웨어축제는 매년 7월에 스페인 북부 아라곤에서 열린다. 이 축제는 “미국에서 생겨난 버닝 맨 Burning Man을 향한 유럽의 답변”(p.393)이라는 유럽판 유토피아 축제다. 2004년부터 열렸으며 ‘별도의 장소 탄생’ 그 자체가 축제인 셈이다. 사막 한가운데 일종의 집단 야영지를 일시적으로 만들고 생활하다가 끝나면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말아야한다는 이 축제의 철학이다. 행사 기간 동안엔 이곳에선 무슨 일이건 온갖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그야말로 그들만의 유토피아가 된다. “하나의 공동체 전체가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생겨나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장소를 사랑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지극히 매혹적인 일이다.”(p.398)

저자는 별도의 장소로서의 축제에 대한 발상의 뿌리는 1960년대 반(反)문화운동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때부터 장소에 대한 관념에 새 장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막의 텅 빈 경관에다가 새로운 세계를 불러내어 그들만의 일시적이지만 완벽한 장소와 공동체를 만들었다 흔적 없이 지워버리는 데서 오는 희열. 이러한 행위에 대해선 여러 평가와 해석이 따르겠지만,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장소 만들기 행위야말로 ‘토포필리아(topophilia), 즉 “장소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사랑”(p.393)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장소 만들기의 기술’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이 축제의 조직자들과 참가자들은 이 “장소를 만들어 냈다가 접어서 치워 마치 마법처럼 새 것 같고 텅 빈 경관만이 남는 모습을 지켜보며”(p.394) 장소의 혼에 대한 경외심과 장소의 특별함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표명한다. 이 맥락에서는 장소들이 중요한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영구적인 구조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기존의 장소 관념 따윈 맥없이 깨지고 만다. 

“여러 세대 동안 우리는 기초를 땅에 묻음으로써 새로운 장소들을 수립해왔다. 우리의 웅장한 설계의 무게와 내구성을 이용해 불멸성을 손에 움켜쥐었던 것이다. 하지만 건축적 기념물주의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신뢰를 품지 않는 후기 산업 사회에서는, 이것도 더는 확신을 주는 장치가 아니다. 그리고 노웨어(축제)는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그런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만드는 곳처럼 보인다.”(p.394) 

위의 인용문에서 ‘건축적 기념물주의’라는 표현에 방점을 찍어 두자. 

건축가 승효상은《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라는 에세이에서 모든 건축과 도시는 무너질 운명이며 ‘영원한 것은 우리가 같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 기억만이 진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가 공동체의 영원한 문제다. 그래서 국가마다 세대마다 시대마다 공동체의 상징적 장소를 만들고 그것을 기억하는 다양한 기술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 일환으로 ‘건축적 기념물주의’ 가치관에 입각한 ‘장소’ 만들기 그리고 기억하기 기술이 여러 세대에 걸쳐 각 나라, 각 지역에 대대적으로 퍼져 오늘에 이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건축적 기념물주의! 오늘날 제주사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특히 제주시 원도심을 중심으로 하루가 멀다하여 건축물, 시설물, 광장, 문화공간, 표지판, 표석 등등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물론 이들 역시 원도심이라는 ‘장소’를 살리고 기억하려는 장치로 탄생했음엔 틀림없다. 하지만 이러한 장치들이 탐라 천년·제주 천년을 지켜 온 ‘장소의 혼’에 대한 경외심과 그 특별함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 그곳을 찾고 걷는 이들의 몫이다. 그리고《장소의 재발견》과 같은 책을 흥미롭게 읽는 취향의 독자에게도 그 답을 듣고 싶다.

 ▷ 고영자(미학자·번역가)

KakaoTalk_20160214_091204364.jpg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및 재일제주인센터 특별연구원

일본 오사카대학 대학원에서 미학(예술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연구원 역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대학원 강사(미학) 역임.

현재, 근·현대 문화매체론, 제주미학론, 제주 ‘이미지’ 생성 및 변천사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크리스틴 조디스 저《미얀마 산책》(2008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2012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1845~1926)》(2013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도 항해·탐사기(1787~1936)》(2014년), 《구한말 佛語·英語 문헌 속 제주도(1893~1913)》(2015년)가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