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Brexit)를 읽는 하나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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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21) 오언 존스(Owen Jones) 『차브: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을 통해 본 브렉시트 /서영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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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언 존스(Owen Jones)의 『차브: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북인더갭, 2014년.
chav의 사전적 의미는 “아주 저급한 취향과 패션을 즐기는 일탈 청소년을 이르는 말, 또는 그런 청소년의 문화”다. 하지만 오언 존스의 책 『차브』에서는 노동계급을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1950년대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었고, 1960년대는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자랑이었던 공공임대주택(council house)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해야 하며, 실업과 불안정한 일자리에 고통 받으면서도 정치인과 언론으로부터 세금 도둑(scroungers)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 말이다. 

아주 오래전에도 그들은 경멸의 대상이었다. 1차 대전 이전까지 귀족과 중간계급에게 봉사하는 하인과 하녀 일자리에 만족하며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의 ‘미덕’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전쟁과 노동자들의 투쟁은, 비록  자신들의 역사적인 성취를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와 베버리지(William Henry Beverage)라는 이름에 내어 주었지만, 복지국가의 커다란 양보를 성취했다. 이제 노동계급은 영국이라는 나라를 짊어진 역사의 주인공으로 칭송받았고 노동자임이 자랑스러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그런 노동계급의 전성기였다. 

노동계급의 위대한 성취는 경제위기와 사회적 특권의 잠식에 화들짝 놀란 지배계급의 반격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 ‘역사적 타협’과 민중의 대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배계급은 노골적인 계급전쟁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경제‘위기’는 반격의 좋은 기회였다. 영국에서 지배계급에 의해 도발된 계급전쟁은 ‘대처리즘’(Thatcherism)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스스로를 유턴을 모르는 철의 여인(Iron Lady)이라고 불렀던 시장자유주의 투사 마거릿 대처(Margret Thatcher)는 복지국가 시절 성취되었던 의료, 교육, 전기, 상하수도, 주택, 대중교통의 사회적 성격을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그녀 이후 영국사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던 것이다. 그녀는 외쳤다. 대안은 없다고!(There is no alternative!) 시장(market)만이 답이었다. 국가의 개입은 모두 악이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관료적이었고, 그녀가 핸드백 속에 항상 넣고 다녔다는 자유주의 사상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의 책 제목처럼 노예로의 길(the road to the serfdom)이었던 것이다.

 정말 우습게도 대처와 새로운 우파(new right)가 노골적인 계급전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 영국 좌파(노동당이라는 정당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던 좌파)는 계속되는 선거패배 이유가 계급적 성격이 너무 강해서라는 ‘자기 파괴적인’ 진단을 내린다.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줄이고 당내 좌파들을 축출하거나 무력화 시키는 소위 현대화(modernisation)가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그 끝은 토니 블레어(Tony Blair)라는, 당시로서는 젊은 40대 초반 정치인이 주도한 신노동당(the New Labour)이었다. 

문제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보수당(the Conservatives, 또는 the Tories라고 불리는)은 이제 우리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시장만능주의를 앞세워 영국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었던 사회적 통합과 연대를 경쟁, 능력, 이기적 이윤추구로 대체했다. 유턴을 모른다던 대처의 말처럼 보수당은 모든 저항을 힘으로 누르면서 영국사회를 돌이킬 수 없는 상태까지 ‘파괴’했다. 그 파괴는 직장폐쇄, 실업, 실업수당과 복지혜택의 축소, 빈부격차의 악화, 주택난, 교육 불평등의 심화로 나타났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드라이브는 영국 보통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희생이 가져다 준 달콤한 크림은 주식과 부동산을 소유한 부유층이 거두어 갔다. 사람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그래서 그들은 보수당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노동당에게 정권을 돌려주었다. 1997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블레어의 신노동당이 한 일은 대처의 보수당이 벌여 놓은 일을 수습하고 ‘은밀한’ 대처리즘의 계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영국은 이제 하나의 ‘주식회사’였으며 세계화된 경제가 강요하는 무한 경쟁이 숙명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가정, 학교, 지역사회, 그리고 사회의 구석구석 시장과 화폐의 논리에 따라 재조직되어야 했다. 이제 노동당이 더 큰 소리로 일하려고 하지 않는 낙오자와 세금도둑들에 대해 비난하기 시작했다. 영국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긴 시간을 일하면서도 1960-70년대 노동자들이 누렸던 최소한의 ‘호사’, 인생을 계획하고, 자식의 미래에 투자하며, 노후를 계획할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권리마저도 박탈당했다. 그걸 보장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강요받았다. 

 오언 존스가 『차브』에서 고발하고 있는 것은 보수당-노동당이 공모한 계급전쟁의 참상이다. 영국의 긴 역사에서 잠깐 동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항상 그랬던 상태로 돌아갔다고 할 수도 있다. 영국의 민주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의회에만 존재한다. 여전히 왕정국가이며 귀족들이 존재하고 신분의 차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정치는 유권자들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지극히 엘리트주의적인 정치인들에 의해 좌우된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가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복지국가를 기억하는 세대가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와는 달리 지배계급은 더 이상 그들의 지배와 착취를 날 것 그대로 옹호할 수 없기에 평등과 분배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당-노동당의 공모는 ‘왼쪽’에 정치적 공백을 만들어 냈다. 대중의 불만의 깊이는 점점 더 깊어지고 절망감의 정도는 높아지지만 이러한 절망과 불만을 표현해 줄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정통좌파임을 자임하는 군소 정치세력은 항상 ‘자본주의의 위기’와 ‘혁명’을 외치지만 현실 설명능력도, 대중의 정서와 공감할 마음가짐도 없는 무력한 소수일 뿐이었다. 점점 좌경화되는 녹색당으로 좌파들이 결집하는 흐름이 감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비민주적인 선거제도인 다수득표자 당선 소선거구(first-past-the-post) 제도 아래서 녹색당은 갈 길이 멀었다.  

빈틈을 파고 든 것은 극우파였다. 오언 존스가 보여주고 있는 영국 보통사람들의 상태와 마음은 계속해서 불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기정 정치권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 영국민족당(the British National Party, BNP)과 영국독립당(the UK Independent, UKIP)이 불만에 찬 영국 노동계급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시작한다. 계기는 난민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유럽연합(EU) 내부의 갈등이었다. 인종주의와 영국민족주의는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선동의 결과를 알고 있다. 영국은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 탈퇴를 선택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한다면 브렉시트는 우매한 영국인들의 실수, 또는 극우적 선동에 놀아난 영국민중의 실수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브렉시트에 반대했던 보수당과 노동당 주류는 우민정치의 위험을 언급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30년, 짧게는 보수당-자민당 연정이 수립된 2010년 이후 영국 전역에서 울려 퍼졌던 목소리, 금융가와 상위의 1퍼센트만을 위한 긴축정책과 복지예산 감축에 반대한다는 전 국민적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것이 누구인가? 처음부터 독일을 비롯한 유럽연합을 주도하는 나라들의 금융가들의 배만 불릴 것이 뻔했던 신자유주의적 유럽의 실패를 그리스와 스페인 민중에 떠넘기면서 살인적인 긴축을 강요했던 것이 누구였는가? 영국 사회와 단절된 채 그들만의 민주주의에 도취되어 있는 의회가 듣지 못했던 영국인들의 민주적 목소리, 그리스인들이 국민투표를 통해 표현했던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거부를 묵살하고 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소수의 이익만을 지키는, 돈으로만 살 수 있는 민주주의를 고집하면서 우민정치를 논한다는 것은 너무나 뻔뻔하지 않은가? 아니면 무식한 걸까? 

이 책 『차브』의 저자 오언 존스는 국민투표가 있기 1년 전 <가디언>(Guardian)에 실린 기고에서 영국 좌파는 유럽연합 탈퇴를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올 2월 같은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유럽에 맞서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했다. 폴 메이슨(Paul Mason)이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의 유럽, 금융가와 가진 자들만을 위한 유럽과 대결하는 것은 노동당 좌파가 집권했을 때, 그리고 그 정부의 정책에 유럽이 딴지걸려 할 때(그리스 정부에게 그랬던 것처럼)라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결과는 그의 바람과 달리 나왔지만.

존스는 브렉시트가 결정 된 후 영국이 실존적 위기에 봉착했다고 우려하면서도, 이제 전국의료서비스와 노동자의 권리, 양질의 주택과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한 새로운 투쟁에 나설 때라고 말한다. 그것은 브렉시트를 주도했던 극우파들이 조장한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와의 대결이기도 하다. 유럽연합에 대한 반감은 근원은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와 인종주의가 아니라 ‘차브’라는 낙인, 열심히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더 열심히 일해야 하며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라고 말하는 지배자들에 대한 반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노동계급 사람들은 언론과 유력정치인들이 떠벌이는 것만큼 그렇게 인종주의적이지 않다. 노동계급이 인종주의적이라야 그들을 경멸할 수 있기에 언론과 유력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신화일 뿐이다. 그들이 훨씬 더 인종주의적이고 외국인을 혐오한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일 지도 모르겠다. 

영국인들의 불만은 지속적인 반-긴축(anti-cut, 또는 anti-austerity) 투쟁으로 드러났다. 정치권이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 스코틀랜드에서의 불만은 독립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은 우파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긴축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던 것이다. 똑같은 마음의 상태가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이라는 좌파 정치인을 노동당의 당수로 만들었다. 실업과 불안정한 미래에 고통스러운 청년과 풀뿌리 조직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렇게 좌파적으로 표출되었던 사람들의 불만이 이번에는 브렉시트라는 우파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우리는 브렉시트를 나이절 파라지(Nigel Farage, 영국독립당 당수, 브렉시트 직후 사임)와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 브렉시트를 주도한 보수당 소속의 전 런던 시장)의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선동했던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로는 설명되지 않는 불만의 목소리와 몸짓이 탈퇴를 지지한 표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언 존스가 우리 미래를 위한 캠페인을 시작할 때라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한 가지 우려! 국민투표 직후부터 노동당 당권파들이 좌파 당수 제러미 코빈을 몰아내기 위한 파상공세를 전개하고 있다. 처음부터 신자유주의적인 동맹에 몸을 담근 노동당 주류에게 반-긴축을 전면에 내세운 코빈은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코빈을 몰아내는 것은 이미 지적한 정치적 공백지대를 강화하는 효과만을 가질 것이다. 그 결과는 정치적 무관심과 극우적 포퓰리즘의 득세일 것이 분명하다. 오언 존스와 함께 코빈을 응원하자! Hang tough, Jeremy!! 우리하고 상관없는 일이라고?  눈을 크게 뜨자, 그리고 멀리 보자!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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