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22) 송정규 『해외문견록』/고영자 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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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정규 《해외문견록》, 김용태·김새미오 옮김, 휴머니스트, 2015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가령, 우리가 말하는 ‘옛 기록’만 해도 그렇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적잖은 옛 기록들이 다양한 종류의 도서관·박물관 서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틀어 박혀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 동안 잠자고 있다. 말 그대로 ‘구슬’은 ‘서말’이지만 ‘제대로 꿰지 못해’ 보배에 이르지 못한 기록들이 부지기수다. 

걔 중에는 한때 어느 특정 부족, 민족, 국가, 지방의 문화 전반을 선도하는 데 기여한 기록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당대의 문화적 조류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당대에 외면 받거나 불에 태워진 기록들, 나아가 기록물 보관 주무 부서라 할지라도 출처·국적·의미 불명의 기록들, 거기다 기록은 기록이되 고도의 엘리트 언어로 쓰여서 당대 일반인은 물론 후대인들에겐 번역과 해석 없이는 영원히 해독 불가한 기록 등등.

그러면서도 이렇듯 다양한 운명을 가진 옛 기록물들이야말로 인류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기억하는 증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증인들, 즉 ‘종잇장에 갇혀 있는 글자’들을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누군가, 특히 연구자·번역가들의 부단한 노력이 없다면 옛 기록물들은 구슬처럼 낱알 신세를 영원히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한 국가 또는 지방의 ‘문화’라는 것은 기나 긴 시공간 속에서 이리저리 흩어진 구슬 낱알들을 모으고 모아서 꿰는(구성/재구성) 작업의 축적물이라 하겠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에 소개할《해외문견록》(1705년경)은 필자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이 책은 제주도를 무대로 310년 전에 쓰인 기록이다. 조선 숙종 대에 활동했던 관료 문인 송정규(宋廷奎, 1656~1710)가 17~18세기 제주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해역에서 발생한 표류를 통해 “제주에 떠내려 온 흥미로운 바깥세상 이야기”를 듣고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이 작년(2015년)에 비로소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으니, 낱알로 흩어져 있던 구슬 하나가 제주역사 구축의 현대판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이 책의 원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현재 일본 텐리(天理)대학 고문서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몇 해 전 필자 또한 그곳에 갔다가 원본 열람을 신청, 그것을 받아 페이지를 넘기며 가슴이 두근거렸던 인연의 책이다. 게다가 필자 또한 18~19세기 서양인들이 제주도를 표류·탐사·방문하면서 남긴 기록물들을 발굴·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 이 책의 번역판 탄생은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 필자에게 무한한 ‘구슬 꿰기’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책은 송정규가 제주목사로 부임한 시기(1704~1706)에 쓰였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때는 18세기 들어선 직후다. 이 시점에서 약 30년 전후로 표류 관련 기록들이 국내외적으로 쏟아진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구사회에서는《하멜표류기》가 출간(정본: 1668년 출간.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 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 및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관해서)됨으로써 제주도가 서구사회에 알려지기도 했다.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익태(재임: 1694~1696)의《지영록》(1695년경) 또한 하멜을 비롯한 중국인 표류와 더불어 17세기 제주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1731년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내도한 정운경의《탐라문견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1735년경) 또한 17세기에서 18세기로 이어지는 시기, 바다와 표류, 그리고 바깥세상, 외국인 나아가 제주의 귤과 같은 특정 주제에 관심을 보이며 기록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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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익태 《지영록》(김익수 번역, 1997년/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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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운경 《탐라문견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정민 번역, 2008년)
그러니까 송정규의《해외문견록》(1705년경)은 17세기 말 이익태의《지영록》과 18세기 중반 정운경의《탐라문견록》사이에 탄생한 기록물이다. 우리말 번역서로는 가장 최근에 빛을 보았지만 말이다.

《해외문견록》에 수록된 기사들 중에는 대표적으로 ○1611년 제주목사 이기빈이 별도포(화북포)에서 왜선을 붙잡아 선원들을 살해한 사건 ○1612년 유구(현, 오키나와) 사신들이 탄 배가 제주 모슬포에 표류한 사건 ○1653년 서양인 하멜의 제주표류 사건 ○1652년~1705년 사이 중국 상인들의 제주 표류 ○1687~1688년 안남국(현, 베트남)에 표류했다 돌아온 제주사람들 ○ 당시 중국배의 구조가 있다. 이 중 안남 표류기와 중국배 관련 정보는 송정규 목사가 직접 표류했다 돌아온 이들에게 탐문하여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특히, 1687~1688년 제주사람들의 안남국(현, 베트남) 표류는 당시 이례적인 사건이었는지, 그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숙종15, 1689년) 및 《비변사등록》과 같은 국가사료에는 물론《지영록》,《해외문견록》그리고《탐라문견록》등에도 재기록될 정도였다.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이렇다. 1687년 9월 3일 제주의 진상마 세 필을 실은 진상선(進上船)이 별도포(화북포)를 출발했다. 거기에는 진무(鎭撫, 군영소속 서리) 김태황과 뱃사공 이덕인, 조천관 주민 고상영(당시 나이 17세, 해남 대둔사로 가서 그곳 승려에게 글을 배우려고 승선)등 모두 24명이 승선했고, 저녁에 추자도에 이르러 동북풍을 만나 바람 부는 대로 떠내려가다가, 31일이 지나서 안남국 회안부(베트남 호이안)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여러 복잡한 송환절차를 거치고 거친 끝에 중국을 통해 표류자 21명이 마침내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1년 3개월 10일 만인 1688년 12월 17일이었다. 이때 제주 관리들이 이들을 심문했고, 그 사건 전말과 경험담을 조정에 알리면서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진다. 

송정규의《해외문견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갑신년(숙종30, 1704년) 가을, 내가 탐라에 오니 김태황은 이미 죽고 없었다. 이덕인 등을 불러 사정을 물어보고, 김태황이 남긴 기록과 본주의 문서를 참고하여 이와 같이 그 시말을 서술했다.”(p.68)

한편, 그로부터 30년 후에 나온 정운경의《탐라문견록》(1735년)에는 1687년 표류 당시 17세 나이로 승선했던 조천관 주민 고상영이 제보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동일한 표류 사건일지라도 저자와 제보자가 누구냐에 따라 기록 내용 및 세부묘사(외국의 풍물, 그곳의 생활상 등)가 다르다는 점, 그리고 이 사건이 당시 문인관료들(박지원, 서유구, 황윤석 등) 사이에 화재가 되어 오랫동안 회자되었다는 점이다. 

《해외문견록》이 쓰인 300여 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책은 단순히 당시 빈번했던 ‘표류’ 이야기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자 송정규가 살았던 17세기~18세기는 조선을 제외한 동아시아 일대의 국가들이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활발한 해상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오히려 역자 서문에도 밝히고 있듯이

 “바다를 향한 관심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와 맞물려 국내적으로도 외부를 향한 관심이 크게 줄어들었다. 학술계가 성리학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다양한 학문적 관심이 확연히 줄어들고, 관념적인 소중화론이 정통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지식인들의 자고자대(自高自大)하는 태도 또한 외부에 대한 관심을 누르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 초기와 크게 대비된다. 조선 초기만 해도 여러 지식인들이 한중일을 누비며 국제적 안목을 길렀는데…….”(p.11)

거기다 제주는 ‘출륙금지령(1629년~1830년경)’이 내려지고 있었다. 관의 관할 하에 있는 병선, 관선(官船), 상선, 진상선(進上船) 등의 선박 이외의 사선(私船)은 해상 활동에 큰 제약을 받게 된다. 제주 섬도 예외 없이 유교-성리학에 의해 암흑시대를 맞아 누천년 조선술과 항해술을 발전시켜 바다를 개척한 제주인(해민)들의 기상 또한 점차 꺾였음을 상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동시기 이러한 조선의 패쇄적 학문사상 경향에 문제를 제기하며 등장한 것이 조선의 실학파 그룹이었다. 성호 이익~연암 박지원~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파는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과 서양의 학술 및 세계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물론 이들은 소수파였으며 대세를 바꾸지 못했다……이런 구도 속에서 송정규의 학술 경향은 실학파와 매우 가까운데, 당대 분위기나 송정규가 성호 이익보다 한 세대 위인 점을 감안 하면《해외문견록》은 상당히 선구적으로 문제제기”(p.12)를 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저자 송정규가 ‘중국배의 구조’를 기록하려는 의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제주 뱃사공 이덕인은 안남에 표류했다가 돌아왔기에 절강과 복건의 바다에서 중국 배의 제도를 익숙히 파악했다. 또 표류해온 중국 배들을 제주 사람들이 많이 보았기에 그들에게 중국 배의 법식을 두루 물어 여기에 기록해두니, 앞으로 일을 맡은 자들이 따라 만들 수 있도록 대비하려 함이다.”(p.72)

그런데 이로 부터 100여년이 지난 19세기 다산 정약용의 글을 보면 조선인들의 배(船)에 대한 인식이나 기술 향상은 제자리걸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에 표류하면 일본인들이 매번 새로 배를 만들어서 돌려보내주었는데, 배의 제도가 몹시 정밀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우리나라에 도착하는 즉시 그것을 부수어서 일본의 방법을 배우러 하지 않았다. 다산은 상대의 좋은 점조차 배우러 하지 않는 조선인들의 편협한 시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탐라문견록》서설, p.34)

사실, 송정규의《해외문견록》과 같이 표류 등을 통해 바다 밖의 세상을 전하는 기록은 당시 한반도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는 인기를 끌었지만, 유교주의에 입각한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탐탁지 않았을 법하다. 표류민들의 전언을 통해 해외의 실상이 속속 퍼져나간다면, 여러 측면에서 국가질서가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많은 표류사건에 비해 표류기록은 턱없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표류기록이 있다 해도 독자층이 매우 한정되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면 표류기의 한반도 유통은 국가적 차원에서 크게 심려할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각을 제주도라는 생활현장으로 옮겨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제주인들에게 바다, 배(船)를 통한 조업 및 운송, 표류 등은 거의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먼 과거에서부터 제주인들은 바다를 무대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각종 표류 사건들을 직간접적으로 전해 들으며 주변정세에 밝고 외부 세력에 기민하게 대응할 줄 아는 해양세력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제주는 조정의 변방이자 유배지, 그리고 말(馬)의 산지로 전락하며 과거 동아시아 해상왕국의 위용을 잃어버린 것이다. 조정은 제주특산품인 말(馬), 귤, 전복 등 각종 물품을 정기적으로 진상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것을 실어 나를 배(船) 제조기술 향상이나 안정성은 관심 밖이었다. 오히려 섬이란 자연환경에 어울리지 않은 유교사상을 전파하여 해인(海人)들의 사회적 위상을 깎아 내리고, 그들로 하여금 진상품을 조달하는 고역(苦役)을 떠넘긴 셈이다.

이 맥락에서 최근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기획하여 번역한 이마무라 도모(今村 鞆)의 책 《선(船)의 조선》도 눈여겨볼만하다. 이마무라는 일제강점기 제주 초대 도사(島司, 재임:1915~1919)를 지낸 일본인 관료이자 조선연구자로 제주인들과 별도로 해양문화에 눈이 먼 반도의 조선인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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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도모(今村 鞆)《선(船)의 조선》(원서:1930년/2015년 박현숙 번역)

“조선은 반도국으로 1700여 해리의 연안선과 선박이 통하는 8대 하천을 가진 나라임에도 수운의 발달이 세계 각국의 문화진정의 과정과 비교하여 어느 국가에서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정도로 우둔하게 낙오되었다.……조선 사람, 제주도 및 동남방 연안의 주민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은 해양국가의 남자라 부를 만한 조상 대대로의 귀중한 전통의 피가 흐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p.181)

이 책은 일제강점기 일본 관료로서의 그의 시각, 즉 조선의 미개함 대비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일본의 조선침략과 근대화 정책을 정당화하는 논지로 일관되어 있지만, 각종 문헌자료를 토대로 삼국시대 이래 한국의 해사(海事) 전반을 진단하고, 조세운송 제도, 조선론(造船論), 선박에 관한 행정, 해군, 표착선 등등 조선의 바다와 배(船) 전반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라 하겠다.

18세기 이래, 조선의 실학사상이 대세였더라면, 조선정부가 땅을 중심하는 대(對) 중국사대주의를 벗어나 당시 대세인 해양문화교류에 일찍 눈을 떴더라면, 제주도가 단순히 물리적으로 절해고도(絶海孤島) 또는 유배지, 말(馬)의 산지가 아니라 당시 일본 나가사키처럼 외국선박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국제항구의 한 축이었더라면, 바다와 더불어 사는 제주인들이 조정의 진상품 조달을 위해 맡던 고역을 줄이고, 대신 네덜란드의 하멜 일행처럼 바다를 무대로 국제 무역을 진두지휘하는 주역이었더라면, 또 그들의 항해와 표류를 통해 얻은 외국문화 체험이 백성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국가정책에도 반영되었더라면……, 한국의 역사 나아가 제주의 역사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경지에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송정규의《해외문견록》은 아직까지 한국사의 주류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그리고 제주가 21세기 新해양시대를 선도하고 맞이한다면 이 책엔 분명 오래된 미래가 깃들어 있다.

 ▷ 고영자(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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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및 재일제주인센터 특별연구원

일본 오사카대학 대학원에서 미학(예술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연구원 역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대학원 강사(미학) 역임.

현재, 근·현대 문화매체론, 제주미학론, 제주 ‘이미지’ 생성 및 변천사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크리스틴 조디스 저《미얀마 산책》(2008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2012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1845~1926)》(2013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도 항해·탐사기(1787~1936)》(2014년), 《구한말 佛語·英語 문헌 속 제주도(1893~1913)》(2015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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