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 사회에서 사는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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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23) 우에노 치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장이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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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2012.
우리는 ‘여성 혐오(女性嫌惡) 사회’에 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문제로 여겨진다. 남성들이 여성을 멸시해왔다는 것은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성의 자기혐오에 대해서도 우리는 대체로 알고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는 말이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성 혐오’는 자주 개인의 인성 문제로 환원되곤 한다. 그것이 결코 개별적인 인성 문제만은 아님에도, 우리는 그것이 다른 저열한 사람들의 일이고 나와는 관계가 없는 문제로 치부해온 면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손쉽게 ‘안전지대’로 퇴피해온 셈이다.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일본 사회의 ‘여성 혐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녀는 나가이 가후(永井荷風)에서 요시유키 준노스케(吉行淳之介)로 이어지는 호색한 소설의 계보에서 근대 일본문학의 여성 혐오를 추적한다. 그녀는 근대 일본 남자들이 ‘여성’이라는 타자의 중개에 의해서만 ‘남성됨’이라는 지표를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남자들이 현실의 여성에게서 도주하여 환상 속의 ‘여자’, 파편적인 여성성의 기호에 의지하여 비로소 남자임을 승인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호색한이 아니고는 남자가 될 수 없다는 듯이 구는 남성들의 나약한 자존감을 그녀는 비웃는다. 

이 ‘나약함’은 사실 우에노 치즈코가 ‘호모 소셜’이라고 부르는 ‘남성적 유대가 강한 사회’의 산물이다. 그녀의 독창성은 이 ‘호모 소셜’에 여자들 간의 유대로만 된 여성 버전이 없다고 본 데 있다. ‘호모 소셜’에서 여자의 가치는 남자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며, 남자의 가치도 역시 남자에 의해 결정된다. 남자는 남성 세계의 패권 게임 속에서 다른 남자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아버지와 같은 동일시의 대상을 그들만의 호모 소셜에서 부단히 찾아 헤맨다. 남성들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욕망과 ‘어머니’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추구하면서 호모 소셜의 일원으로 성장해간다. 삽입 당하는 것, 소유 당하는 것, 성적 객체가 되는 것, 다시 말해 ‘여성화 되는 것’은 호모 소셜에서 낙오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화된 남자로 여겨지는 동성애자에 대한 거부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한다. 그러니까 이 사회는 여성 혐오에 의해 성립되고 호모포비아에 의해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를 근대 제도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일부일처제와 매매춘의 양립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녀는 두 제도의 양립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남성들이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분단하여 지배해왔음을 지적한다. ‘성녀’라고 해도 그것은 결국 남성들이 소유하게 될 여성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창녀’에 대한 남성들의 인식은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근대는 ‘성’을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프라이버시’라는 말은 우선 ‘성’을 환기시킨다. 로버트 마이클의 말을 원용하여 우에노 치즈코는 ‘성 관계’도 복수의 개인 간에 이루어지는 이상 전적으로 사적일 수는 없으며, 그것도 또한 사회관계의 일종이라고 본다. 남성들은 ‘성의 관계성’을 애써 무시한다. 춘화나 포르노에서 ‘관계’는 철저히 배제된다. 거기에는 ‘관계’가 ‘성기’로 환원되어버린 페티시(Fetishi)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성은 ‘관계’를 갈구하지만, 남성은 ‘소유’만을 추구한다. 남자들이 바람 난 여자 친구에게 가혹한 공격성을 보이는 것은 그가 그녀를 일종의 소유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성의 프라이버시화’의 피해자는 결국 여성이나 동성애자, 아동들과 같은 약자들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프로이트가 등한시한 모녀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프로이트 이론을 보충하면서 여성 혐오에 대한 논의를 이론화한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말을 “아들은 어떻게 여성 혐오적인 아버지가 되고, 딸은 어떻게 여성 혐오적인 어머니가 되는가?”로 패러디한다. 그녀의 구도 속에서 여성 혐오는 아버지에게서 시작하여 가부장제 대리인인 어머니를 통해 내면화된다. 어머니는 딸에게 ‘아들로서 성공하라’와 ‘딸(=여자)로서 성공하라’는 두 개의 메시지를 동시에 발신한다. 거기에는 제발 자신처럼은 되지 말라는 부탁과 바로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하는 원망이 섞여 있다. 이것을 토대로 여고생들의 원조 교제에 대해 우에노 치즈코는 ‘자책/자해하는 딸’이라고 하는 정신분석을 시도한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복수로서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녀는 모든 페미니스트가 여성 혐오에서 출발했음을 역설한다. 정신분석 자체가 그녀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다. 오히려 그녀는 성의 탈자연화, 역사화를 추구한다.
 
‘아키하바라 무차별살상 사건’(2008)을 중심으로 우에노 치즈코는 ‘비인기남과 여성 혐오’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분석을 하고 있다. 이 사건의 범인 가토 도모히로(加藤智大)는 스스로 여자 친구만 있었어도 이런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회한에 찬 말을 남긴 바 있다. 그 말은 여자 친구, 즉 ‘자기 소유의 여자’만 있었다면 자신은 호모 소셜의 일원, 즉 ‘진정한 남성’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다른 모든 사회적 요인에 있어 훌륭하다고 평가 받는 남자라고 해도 여자 하나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남자는 남근 중심적 호모 소셜에서 ‘하자 있는 남자’로 치부된다. 남녀를 막론하고 비혼에 대해 사갈시하는 사회적 풍토는 그 이면에 여성 혐오를 숨기고 있다. 

‘도쿄전력 OL 살인 사건’(1997)은 다소 오래된 감이 있지만, 이 책에서 우에노 치즈코가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사건의 희생자는 낮에는 도쿄전력의 사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프리랜서 매춘부로 일한 30대 후반의 여자였다. 이 극단적인 이중성이 매스컴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우에노 치즈코는 이 희생자 여자가 남성들에게 돈을 받는다는 행위를 매개로 자기 신체가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했다고 본다. 그 여자는 남성을 단순한 성기로 환원함으로써 자신을 배제한 남성 사회에 필사적인 복수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적은 화대를 받아가면서 일한 희생자는 그것으로 자신을 헐값에 산 남성들의 가격을 매기고 있었으리라는 일각의 해석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우에노 치즈코는 가해자의 심리 대신 피해자 여성의 심리를 특권화한다. 

우에노 치즈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성성의 핵심에 여성(과 여자 같은 남자)의 타자화를 위치시키는 사회적 풍토를 일소하지 않고는 여성 혐오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매우 요원한 일일지 모른다. 여성 혐오가 오랜 시간에 걸려 만들어져 왔듯이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여성 혐오 사회에서 사는 것은 남성들에게도 그리 유쾌한 일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호색한이 되지 않고는 진짜 살 수 없을까. 혼인하지 않고도 이상한 시선을 받는 일 없이 잘 살 수 있을까. 호모 소셜에서는 공범이 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렵다. 최소한 나는 성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술집 화장실의 바깥에서 웃고 있는 일행 중 한 명이 되고 싶지 않다. /장이지 제주대 국문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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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이지 교수

시인. 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김구용시문학상, 오장환문학상 등 수상

현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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