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칼럼> 관덕정은 최고(最古)의 유산이면서 바로 죽임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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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관덕정 마당에서의 입춘굿놀이. 사진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제주 근현대사의 중심지 

관덕정(觀德亭)은 조선시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유산이다. 조선시대의 누정(樓亭)으로, 대한민국의 보물 제322호이다. 1448년(세종 30) 제주목사 신숙청(辛淑晴)이 병사들의 무예 수련을 위해 현 위치에 훈련청으로 창건했다. 

관덕(觀德)은 《예기(禮記)》 사의편에 ‘사자소이 관성덕야(射者所以 觀盛德也)’란 문장에서 따왔는데,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일이라는 뜻이다. 관덕정의 현판은 세종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나, 1601년(선조 34)에 그 현판이 불타 없어져서 이산해(李山海)가 쓴 현판을 걸었다. 

제주목 관아(濟州牧 官衙)는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일본과 가까이 있고 외진 섬인 관계로 병영의 성격으로 이곳의 목사들이 무인 출신들이 많았던 이유가 되고 있다. 그래서 관덕정도 사장터나 무예를 닦는 장소로 이용됐다.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 행정의 중추 역할을 해왔던 제주목 관아는 문헌상에 나타나는 중심건물인 홍화각(弘化閣), 연희각(延羲閣), 우연당(友蓮堂), 귤림당(橘林堂), 영주협당(瀛洲協堂) 등 30여채의 건물의 흔적이 확인됐고, 일대가 국가 사적지 제380호로 지정됐다. 조선 유학자 신석조(辛碩祖)의 기문에, “동지중추원사 고상공(高相公)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 제주가 비록 먼 곳에 있으나 특별히 성스러운 임금의 덕화를 입어서, 가르치고 다스려서 문(文)에 대한 일이나 무(武)에 대한 방비가 모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안무사영(安撫使營) 남쪽에 사청(射廳) 한 구역이 있는데 사졸을 훈련하는 곳이다"다고 말하고, "지금 안무사 신후(辛侯)가 정사를 시작한 다음해 무진년 가을에, 일이 닦아지고 풍년이 들어 노는 목수들을 불러서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굽고,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새 정자를 그 위에 일으키고, 이름을 관덕(觀德)이라 하였다"고 적고 있다.
 
또 서거정(徐居正)은 “관덕정 앞에는 청산이 흡사 그림 같고 / 조천관 밑에는 물이 하늘에 떠 있으리/ 만리 밖 신기한 유람은 남아의 일이라 / 응당 부상의 가지에 일찍 활을 걸겠지(觀德亭前山似畫 朝天館下水浮空 奇遊萬里男兒事 應向扶桑早掛弓)”라고 읊고 있다.  또 김낙행(金樂行)이 제주성의 모습을 기록해 돌아가서 아버님께 올리는 시 ‘기제주성형 귀정대인(記濟州城形 歸呈大人)’에서도 “관덕정이 큰 길거리 가에 있고 / 관덕정 앞 백 보 밖에 과녁이 내걸렸네/ 무기고 서쪽은 정사를 펼치는 관아이니 / 그 가운데 병영 건물은 깊고도 그윽하도다/ 겹겹 문과 에워싼 담장은 길을 헤매게 하고 / 영롱한 단청 빛은 사람 눈을 어지럽게 하네(觀德亭在衢路上 亭前百步懸鵠帿 武庫西畔布政司 其中營舍深而幽 重門繚垣迷所向 朱碧玲瓏盪人眸)”라고 읊고 있다. 

관덕정은 수백 년간 제주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관덕정 앞 활쏘기 대회에선 목사와 판관, 현감 등이 정자에 앉아 시합 상황을 지켜봤다. 과거시험인 승보시(陞補試)도 열렸다. 승보시)는 원래 성균관 유생을 상대로 치러진 소과(小科)의 초시(初試)에 해당하는 시험인데 지방에서는 제주·개성·수원에서 시행됐다. 고시관 3원(員·9품 이상 관료에 붙이는 칭호)이 매년 2명을 뽑았고 소과 복시(覆試)의 응시자격을 줬다. 조선시대 백성들이 모여 큰일을 의논하거나 진상용 말을 점검할 때는 물론 중차대한 일도 관덕정에서 열렸다.
 
광해군 시체가 안치된 곳

“바람 불고 비가 날려 성 머리를 스쳐가는데/ 드높은 누대에 짙은 안개만 자욱./ 창해의 성난 파도 소리 어스름에 들려오니/ 푸른 산 스산한 모습 가을도 깊어/ 돌아가고픈 마음, 왕손들 볼 적마다 괴롭고/ 나그네 꿈속에서도 서울을 보고 놀라네/ 고국의 존망 소식도 끊기었으니/ 물안개 서린 강 위, 외로운 배에서 쉬어나 볼까(風吹飛雨過城頭 瘴氣薰陰百尺樓 蒼海怒濤來薄暮 碧山愁聲帶淸秋 歸心厭見王孫草 客夢頻驚帝子州 故國存亡消息斷 煙波江上臥)孤舟)”
 
인조실록에는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제주적중(濟州謫中 ; 제주 귀양 가운데)'이 있다. 권좌에서 절해고도로 내쫓긴 패자의 비통하고 고독한 심경이 잘 드러난 시이다. 광해군은 ‘환란무도(昏亂無道)․ 실정백출(失政百出)’이라는 죄명 아래 인목대비의 명령에 따라 강화도로 추방돼 안치됐다가 그 후 다시 교동으로 옮겨졌지만 또 제주도로 옮겨져 성안에 존극안치(拵棘安置)됐다. 가족도 강화도로 유폐됐는데 폐세자 이질과 세자빈은 강화 서문 쪽에 안치됐고, 광해군과 폐비 유씨는 동문 쪽에 안치됐다. 폐세자는 강화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자빈은 자결했다. 

광해군이 유배중 제주에서 숨을 거두자 제주목사 이시방(李時昉)은 삼읍의 수령을 모이게 한 후 서인의 예로 입관했고, 쾌속선으로 조정에 알렸다. 장례식을 치르는 일로 예조참의 등이 제주도로 들어왔고, 빈소를 관덕정으로 옮겨 세 읍이 돌아가며 대제를 지냈다. 

인조실록에 “仁祖十九年辛巳 光海君卒濟州圍內 年六十七 郞接鎖開門 歛殯以禮 朝議以爲非 而識者是之 光海之自喬洞 遷濟州也”라고 기록돼 있다. 광해군은 인조19년(1641) 7월 1일 제주적사에서 병몰하고 만다. 그 때 나이가 67세였다. 인조는 부음을 듣고 3일간 조회(朝會)를 중지, 5일간을 소찬(素饌)으로 지냈고, 신하들은 4일간 조삭(粗食)으로 각각 조의를 표했다.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왕(재위 1608~1623)이다. 선조 26년(1592) 세자로 봉해졌다가 1608년에 즉위했다. 폭군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둥은 광해군을 옹립해서 전행(專行))을 일삼았다. 임금이 임금 같잖고, 신하는 신하 같잖았으며, 따라서 나라는 나라꼴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언로는 막히고 직언이나 감언(甘言)하는 자는 재판이란 것도 없이 없애지고 뇌물정치는 공공연히 판쳤다. 광해군은 형제나 외조부 등을 죽이고 임금의 어머니를 폐한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강화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가 이듬해 살해당했다.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정치 행위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서인 주도의 반정(反正)에 의해 1623년 광해군은 폐위(廢位)당했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축출되기에 이르렀고 끝내 묘호(廟號)조차 갖지 못한 군주가 되었다. 조선시대 국왕들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묘호는 국상을 마친 뒤 신위를 종묘에 안치할 때 붙여지는 이름이다. 당사자 사후에 붙여지는 이름이니 당사자들은 알 리가 없는 이름이다. 흔히 묘호에는 조(祖)나 종(宗)이 붙게 마련이다. 그런데  광해군은 15년간을 왕위에 재위했음에도 그는 왕자, 그것도 적장자가 아닌 후궁 소생의 왕자에게 붙여지는 군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에도 불려지고 있다. 

제주도에는 “칠월도 초하루는 대왕이 돌아가신 날, 볕이 쨍쨍한데도 비가 내리고 있다”는 민요가 있는데, 광해군이 돌아간 음력 7월 1일에는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재수 효수되다 

1886년 한불통상우호조약 이후 선교의 자유를 얻은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은 공세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한다. 프랑스 신부들은 조선 국왕이 직접 내린 ‘여아대(如我待-국왕처럼 대하라)’라는 신표를 지니고 다니면서 치외법권을 행사했다. 1898년 제주도에 가톨릭이 전래되기 시작했고, 1899년 페이네(한국명: 裵嘉祿) 신부와 김원영(金元永) 신부가 파견되면서 본격적인 전교가 이뤄졌다. 그 뒤 1900년 라쿨(한국명: 具瑪瑟), 무세(한국명: 文濟萬) 신부가 들어오면서 교세가 급격히 확장됐다.  

그 결과 제주도의 천주교도는 급증했으나, 이들 중 신앙심과는 무관하게 개종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봉세관이 파견된다. 봉세관(捧稅官)이란 국가에서 직접 파견한 세금징수관을 말하는데, 그들의 권한은 막강했다. 이 두 세력이 결합하면서 이재수(李在守) 난의 비극의 싹을 틔운다. 여기에 프랑스 신부들을 등에 업은 일부 천주교인들은 폭행과 약탈 등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 또 교회 부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을 없애면서 도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01년 2월 대정읍 인성리에서 천주교를 배척하던 오신락이 교회당에서 매를 맞은 후 죽음에 이르렀다. 이에 맞서 채구석 대정군수가 조직한 비밀결사 ‘상무사(商務社)’는 봉세관과 결탁해 백성을 괴롭히는 천주교인들의 횡포를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열면서 무장봉기를 촉발하게 됐다. 

관노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民軍)은 무장을 한 후 서진과 동진으로 나눠 제주성으로 향했다. 1901년 민란을 일으킨 이재수, 오대현(吳大鉉), 강우백(姜遇佰)은 교회사적인 측면에선 학살의 원흉이지만 도민들의 시각에선 농민항쟁을 일으킨 삼의사(三義士)로 받들여진다. 그들 셋은 분노한 민중을 이끌고 제주성으로 집입했다. 그리고 난의 원인이 되었던 천주교도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때 이재수가 제주성 안으로 들어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관덕정 광장에 모여 있던 제주 민중이었다. 광장에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고, 그 결과 무당과 기녀 등 제주 여성들이 앞장서 성문을 열고 민란군(民亂軍)을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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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수 민란 때 수많은 사람들이 관덕정 광장에서 참수됐다. 사진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제주성에 입성한 주장(主將) 이재수는 관덕정에 올라서서 숨어있던 천주교인들을 색출해 죽일 것을 지시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에 따르면 물고자(物故者: 사망자)는 교인 308명, 평민 8명 등 모두 316명(남 304명·여 12명)으로 무고한 교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관덕정 광장에 널브러진 시신들 사이로 돌무더기들이 나뒹굴었다. 천주교도들을 향한 민중의 분노였다.  

사건이 확대되자 프랑스 신부의 요청으로 프랑스 군함 2척이 그해 5월 말 제주에 도착했다. 군함에 승선한 정부군 수 백 명도 배에서 내렸다. 제주에 급파된 찰리사(察里使)는 세금과 교회의 폐단에 대해 시정을 명한 고종황제의 방문(榜文)을 붙여 민군을 해산시켰다. 민란의 우두머리인 이재수·강우백·오대현은 자수를 했지만 교수형에 처해졌다. 많은 천주교인들은 관덕정에서 피살된 후 시신은 별도봉 기슭에 버려지듯 묻혔다. 1903년 4월 황사평에 이장했다. 6만㎡ 면적의 황사평 성지는 신축교안 당시 희생자를 매장한 이후 지금은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공동 안장지로 사용되고 있다.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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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덕정에 내걸린 이덕구 시신. 사진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관덕정 광장에 읍민이 운집한 가운데 전시된 그의 주검은 카키색 허름한 일군복 차림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집행인의 실수였는지 장난이었는지 그 시신이 예수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높이 올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그랬던지 구경하는 어른들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심란해 보였다. 두 팔을 벌린 채 옆으로 기울어진 얼굴, 한쪽 입귀에서 흘러내리다 만 핏물 줄기가 엉겨 있었지만 표정은 잠자는 듯 평온했다. 그리고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놓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이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 - 현기영의 장편소설 『지상의 숟가락 하나』에서(68-69쪽). 

이덕구의 시신은 상당히 오랜 기간 관덕정 광장에 '전시'가 됐다. 그때 광장에 내걸린 건 유격대장의 시신뿐만이 아니다. '폭도'이거나 '폭도로 몰린 사람들'까지 관덕정 앞에 끌려나와 효수(梟首)됐다. 공비적멸가가 드높이 울려퍼졌다. 즉석재판이란 것이 열려 남루한 행색의 농촌 청년들이 잇달아 단상에 올라 습격 몇 번, 도로차단 몇 번, 전신주 절단 몇 번, 하는 식으로, 시키는 대로 죄목을 복창하고는 곧장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 광장에 목 잘린 머리통들이 등장했다. 잘린 목 그루터기에 살점이 너덜너덜한 머리통들을 창끝에 호박통 꿰듯 꿰어들고 혹은 머리칼을 움켜서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달고서 토벌대들이 "산폭도의 말로를 보라!" 외치며 보무도 당당하게 읍내 한길을 동서남북으로 행진했다.  

이덕구(李德九)는 남로당 제주도지부 군사부장이며 인민유격대장이다.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 재학 중 관동군에 입대했다. 1945년 귀향한 뒤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을 가르쳤다. 얼굴은 살짝 곰보이며 미남형이다. 제주4 ·3이 발생하자 입산해 인민유격대 3·1지대장으로 제주읍·조천면·구좌면에서 활동했다. 김달삼이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러 간 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과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았다. 이덕구는 토벌대에 의해 1949년 6월 7일 16시 화북지구 제623고지에서 사살됐다. 현지에서 연락병 2명을 생포하고, 2명이 귀순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 당시 어린이들 사이에선 '몸이 날래 지붕을 휙휙 넘어 다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했다. 제주를 떠나버린 김달삼과 대비하며 동정을 받기도 하였다.  관덕정 앞 제주경찰서 정문 입구에 그의 시신을 걸쳐 세워 전시했다. 

“친애하는 장병, 경찰관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펴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이 피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부리를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말라. 귀한 총자 총탄알 허비 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제주도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 쫒겨내기 위해 매국노 이승만 일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부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임민의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라”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의 포고문

김달삼이 월북하자 이덕구가 인민유격대 제2대 사령관직을 맡았다. 그가 사령관이 된 후, 지서 습격과 경찰관을 비롯한 인명 살상이 점점 늘어났다. 그는 1948년 9월 15일을 기점으로 경찰과 국군, 우익인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1948년 10월 11일  경비사령부를 설치, 토벌작전을 단행했다. 그 후  10월 24일, 이덕구는 토벌군과 통치기관들에게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의 선전포고 이후 인민유격대가 국군9연대 6중대를 공격해 국군이 21명이 사망하는 사건 11월 2일에 발생한다. 정부에서는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국군은 강경진압작전을 전개했다. 많은 사람이 계엄고등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언도자는 후에 처형되고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육지의 형무소로 이송돼 복역했다. 토벌군이 무장대 차림으로 마을에 들이닥쳐 좌익들을 죽이는가 하면, 무장대가 토벌 군복을 입고 나타나 토벌군 행세를 하며 우익들을 죽였다. 이덕구가 지휘하는 주력부대는 기습 공격을 가하고, 도청을 방화하고 지서를 습격하면서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으나, 이미 무장대원이 1백여 명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유격대는 '최종항전'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덕구 부대에서는 많은 이탈자가 생겨 조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주읍을 공격하려고 준비를 갖추었지만 치명적인 타격을 받음으로써 재기불능 상태가 되었다. 1949년 3월에 설치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벌였고, 5월 15일에는 사령부를 해체해도 될 만큼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산사람들은 자멸해 갔으며, 특히 이덕구가 이끈 인민유격대가 우연히 진압군과 정면충돌한 사건인 녹하악 전투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녹하악 전투에서 이덕구 부대가 토벌작전 부대에 의해 거의 섬멸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덕구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유격대를 지휘했으나, 토벌대의 진압에 결국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결국 1949년 6월 7일 새벽 3시, 제주도를 탈출해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李鉉相)과 합류할 계획으로 하산하다가 경찰에게 포위됐다. 자수를 권했으나 경찰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고, 이에 경찰도 집중 사격을 해 그의 몸은 벌집같이 돼 있었다. 1949년 6월 8일 관덕정 광장에는 십자형 틀에 묶인 이덕구의 시체가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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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제주의소리

이덕구의 시체는 반란의 두목이 어떻게 최후를 맞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다시 효수돼 전봇대에 걸렸다. 그의 시체 옆에는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를 글귀가 붙어있었다. 역사적으로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의 장두들이 효수돼 내걸리던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전통을 잇게 되었다. 시신은 하루 정도 전시되었다가 인근 남수각이라는 냇가에서 화장됐으나, 다음 날 큰비가 내리는 바람에 유골이 빗물에 떠내려갔다. /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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