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25) 팀 잭슨 『성장 없는 번영』 /서영표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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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 잭슨 『성장 없는 번영』전광철 옮김. 착한책가게, 2015년.

‘바닥을 쳤다’는 표현이 있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으니 이제 나아질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한국사회가 ‘바닥을 쳤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다는 진단과 함께, 이제는 뭔가 변해야 한다는 희망이 섞인 생각이다. 하지만 주식시장이나 외환시장, 또는 프로 스포츠 팀의 성적과는 달리 한 사회의 상태가 한계를 지나 바닥에 부딪힌다고 해서 더 나은 상태로 나갈 것이라는 보장 따위는 없다. ‘위기’는 개선의 기회일 수도 있지만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연재의 지면을 통해 이미 살펴보았듯이 한국은 ‘성장 중독증’ 증세가 너무 심해 뼈 속 깊이까지 암세포가 퍼져 죽어가고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 그럴 듯 해 보이는 지표상의 성장과 ‘소비주의’라는 강력한 진통제 처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들과 경제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지표의 허구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다. 경제학자인 마크 블라이스(Mark Blyth)가 비유하듯이 사람들로 가득한 술집에 빌 게이츠가 들어가 앉으면 그곳의 손님들 모두가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 숫자의 환상이다. 경제학은 오직 평균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유동성의 증가하는 것은 언젠가는 터져버릴 풍선일 뿐이다. 

2008-9년 전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를 생각해 보자. 금융기관들은 주택담보대출을 해주고 그 기반으로 주택저당증권(Mortgage Backed Securities, MBS)을 판매했다. 그리고 불량한 주택담보를 숨기기 위해 우량과 불량을 섞은 부채담보부증권(Collateral Debt Obligations, CDO)이라는 희한한 금융상품을 발명해 판매했다. 은행들은 자신들이 발행하는 증권을 우량으로 보이기 위해 위험한 파생상품을 취급하는 특수목적회사를 만들어 회계장부에서 부채를 지워버리기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보험회사들은 부채를 담보로 하는 증권이 안고 있는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는 보험상품을 발명했다. 소위 신용부도스와프(Credit Default Swap, CDS)라고 불리는 금융파생상품이다. 숫자로 드러난 겉모습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금융시장의 팽창은 사람들의 실제 삶과는 동떨어져 있었고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이었다. 

시장의 행위자들이 모두 이렇게 위험천만한 도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학자들의 확률적 모델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부도의 위기는 확률적으로 정규분포 곡선의 매우 얇은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발생할 확률이 매우 낮았다. 신용평가회사들도 앞장서 파생상품들을 우량으로 평가해 주었다. 그러나 현실은 확률적인 가정과는 매우 다르다. 확률적으로 벼락을 맞을 가능성은 매우 맞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낮은 확률의 재난을 당한다. 벼락은 한 사람의 재난으로 끝나지만 얽히고설킨 시장의 행위자들에게는 체계자체의 위기일 수밖에 없다. 

더 우스운 것은 이런 금융적 재난을 부도덕한 개인의 탓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은행가 몇 명, 투자전문가 몇 명의 도덕적 해이를 비난 할 수 있는 문제일까? 그리고는 슬쩍 문제의 초점을 바꾸어 버린다. 마치 경제위기가 국가의 방만한 재정 운용 때문에 생겼다는 식으로 말이다. 금융위기 이후 유럽과 전 세계를 덮친 ‘이데올로기’는 긴축(austerity)이었던 것이다. 증권시장과 부동산시장에서 자산을 축적한 상위 1%, 아무리 넓게 보아도 10%가 모든 나라의 부를 독식하고 있다. 그러한 부의 불평등한 배분은 매우 불확실한 도박을 체계적으로 보장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위험스러운 금융팽창을 성장이라고 불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위험이 현실화되었을 때 책임은 국가가 져야 하는 것이 된다. 국가의 책임은 곧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국민이 책임진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파산한 은행을 구제하는 구제금융이 국민의 세금인 것이다. 은행을 구하기 위해 천문학적 액수의 지출을 한 정부의 재정적자는 곧 복지의 축소를 의미하는 긴축으로 되돌아온다. 

한국의 경우는 이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한국 사람들은 유럽인들이 누렸던 ‘복지’를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복지병’에 걸렸다고 비난받는다. 전 세계적으로 이미 잘못된 처방이라는 것이 증명된 작은 국가를 교리처럼 믿고 민영화를 반병통치약으로 생각한다. 기업, 특히 대기업의 힘은 무소불위이며 노동자와 시민의 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오죽하면 옥시와 폭스바겐이 다른 나라에서는 하지 못할,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사기행각을 벌이겠는가. 한국의 기업들이 모두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국가 관료들이 거기에 동조하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재벌총수들과 고위공직자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부정과 부패가 처벌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가는 날것 그대로의 우리 사회를 돌아보라.

이쯤 되면 되돌아올 질문이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냐? 대안이 있나?’ 깁슨과 그레엄이라면 ‘우리는 이미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답할 것이다. (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16 -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 이미 실천하고 있다!) 자본의 논리, 이윤의 논리, 상품의 논리가 아닌 상호부조와 협동의 원리에 토대를 둔 사회적 실천 말이다. 하지만 깁슨과 그레엄이 주목한 자본주의의 틈새들로부터의 국지적인 저항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보다 크고 긴 미래 비전이 필요한 것이다. 

영국의 생태경제학자인 팀 잭슨(Tim Jackson)은 이런 비전을 제시한다. 우리가 꿈꾸는 행복과 번영이 반드시 성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맥마이클이 개발과 성장의 허구를 드러냈다면(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11 - ‘개발’ 지상주의, 그리고 제주를 반성하다) 잭슨은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경제체제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잭슨과 맥마이클의 주장 중 겹쳐지는 부분은 많다. 잭슨도 성장의 딜레마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맥마이클이 국가 간 체계와 국가 내 부의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잭슨은 사람들의 행복과 만족에 관심을 두면서 성장의 약속이 지켜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잭슨의 주장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완벽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상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경제학의 논리와 기술을 맹신하는 과학적 태도와 맞지 않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고 실현가능하지 않다는 교육을 너무 오랫동안 받은 탓에 낯설게 느껴질 뿐이다. 우리의 삶, 즉 생산, 유통, 소비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수치로만 표현되는, 그래서 실제 삶과는 상관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경제모델을 고치자는 것이 그렇게 비현실적인가? 서로가 서로를 경쟁의 상대로 생각하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사회논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그렇게까지 이상적인가?

잭슨은 한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자원사용과 배출에 한도를 설정하고, 지속가능성을 위한 재정개혁을 추진해야 하며, 개발도상국이 생태적 이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생태적인 거시 경제학 모델을 개발하고 현재의 긴축과 민영화 흐름을 거슬러 생태적 건물 짓기와 보수, 재생가능 에너지, 송전망 등의 공공시설망 재설계, 대중교통 기반시설 등에 투자하는 방향으로 경제패러다임을 전환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금융과 재정건전성을 높이고 양적인 성장이 아닌 국민 삶의 질을 고려하도록 국민개정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삶이 넘어 설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고 경제모델을 고치는 것은 사회논리를 변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고 쥐어짜는 노동패턴을 바꾸고 노동시간을 축소해야 한다. 경쟁력 제고라는 미명아래 약육강식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사회구성원 다수를 패배자로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능력 때문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생겨난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공동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사회적 기여를 평가할 수 있는 다양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성공의 기준이 권력과 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어야 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거기에 따르는 명예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논리의 변화는 사회적 자본을 강화할 것이며 우리가 빠져 잇는 소비주의문화를 해체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잭슨의 제안은 거창하지 않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과 풍요를 성취하기 위해 해야 하는 최소한의 조치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식적인 세상은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라는 말을 듣는다. 시장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시장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 허구임을 은폐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제도들, 규칙들, 이데올로기들은 상식의 세계가 아닌 경제학 교과서에나 존재하는 수학적 공식을 실재라고 믿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의 추구라는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 순간 거대한 권력 앞에 고립된 원자로 소환되어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이라는 낙인을 받게 된다.  그리고 지배이데올로기는 낙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내면화되어 은밀하게 작동하게 된다. 신자유주의라고 불린 시장만능주의가 실천적으로는 파탄 났지만(미국과 영국 정부가 파산한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국유화시킨 그 순간) 두려움으로 내면화된 그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원자가 아니다. 사회적 유대와 연대망 속에 있을 때에만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우리를 경쟁하는 기계, 투자하는 기계, 소비하는 기계로 전락시키는 자본과 시장의 이데올로기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우리 삶의 체험 사이의 엇나감은 필연적이다. 그런 엇나감에서 생겨나는 작은 떨림은 혼자가 아님을 자각하게 한다.

잭슨이 책의 말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런 생각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주장이다. 그냥 인간답고 싶을 뿐이다. 행복 하고 싶을 뿐이다. 성장과 소비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의 엘리트들은 지금의 체계가 행복과 인간다움을 보장해 준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지만 우리들의 실존적 체험은 그것과 어긋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바닥을 친’ 것이다. 이제 반등해야 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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