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수 칼럼] 수눌음의 공동체를 생각한다 / 천주교제주교구 복음화실장  고병수 신부

추석 명절이다. 찜통더위가 물러나고 조석(朝夕)으로 제법 선선한 날씨 속에 추수의 계절이 성큼 다가오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를 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이때가 되면 전(全)백성의 2/3정도가 고향을 찾는 민족대이동의 장대한 광경이 펼쳐진다. 집집마다 부모형제들이 함께 모여 한해의 풍성한 결실에 감사드리고, 선조의 삶을 현재화(化)하며 공동체적 잔치가 열린다. 지역별로 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놀이들도 다채롭다. 제주도에도 특이한 놀이가 있었으니, 동국여지승람과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에 나오는 ‘조리희’(照里戱)’이다. 남녀가 줄다리기로 함께 어우러지며 ‘마을을 환하게 해주는’공동체놀이란다. 온갖 난제들로 각박해져 가는 요즘, 공동체의 소중함을 느끼며 참된 제주공동체의 길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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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눌어 검질 매기(「도승격 50주년 기념 사진집 제주100년」중).

예나지금이나 제주도의 가장 소중한 정신적 가치는 공동체의 화합(和合)과 상생(相生)이다. 이는 소소한 일상을 넘어 광범위하게 일거수일투족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웃의 잔칫날에 누구나 1인분씩 접시에 음식을 담아주는 ‘반’(飯)문화를 보자. 남녀노소, 빈부격차를 가리지 않고 동등하게 서로 나누고 배려하는 정신을 담고 있다. 간혹 올레길을 걷다 숱하게 보는 돌담을 보자. 이리저리 아무렇게 대충대충 쌓아올린 듯 보이나, 거센 바람에도 끄떡치 않을 만큼 단단하다. 힘센 이는 큰 돌을, 연약한 이는 작은 돌을 처지에 맞게 쌓아올리며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낸 상부상조(相扶相助)의 표지다. 해녀는 어떤가. 가난에서 벗어나 가족을 살리기 위해 차디찬 바다에 뛰어든 위대한 어머니이자, 늙고 약한 동료를 배려하여 함께 자치적으로 작업하고 수익을 나누는 수눌음(품앗이)으로 지금의 제주공동체를 있게 한 든든한 버팀목인 것이다.
   
이 자랑스러운 공동체의 정신은 장구한 역사의 그루터기마다 제주공동체를 제주답게 굳건히 곧추세운 웅비(雄飛)의 가치이고 겨레의 자랑이다. 조선시대의 인조7년(1629년)부터 순조25년(1825년)까지 제주도는 출륙금지령이 내려져 육지와 내방할 수 없는 절해고도(絶海孤島)이자, 유배의 섬이 된다. 여기다 극심한 흉년마저 들어 기근(飢饉)에 허덕이다 속절없이 죽는 이가 속출한다. 이 와중에 제주여인 김만덕(金萬德)이 나서 굶주리고 헐벗은 도민들을 위해 전 재산을 팔아 쌀을 사서 구제(救濟)하고, 도민들도 서로서로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아끼고 존중하며 고향산천을 지켜낸다. 일제강점기엔 혹독한 민족의 고난과 시련 속에 온갖 고초와 투옥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제주인의 절개(節槪)와 기상(氣像)으로 독립만세운동을 거세게 펼치며 조국의 독립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니 이 얼마나 위대한 탐라의 후예들인가. 

해방직후 지나 제주 현대사(史)에 가장 비극적인 4.3사건이 발생한다. 좌우이념의 다툼 속에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내 부모형제들이 무수히 죽임을 당한 반인륜적 범죄인 제노사이드(Genocide)다. 마을과 집집마다 희생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파괴된 것이다. 그 후, 수십 년에 걸쳐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고 숨죽여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가혹한 질곡(桎梏)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4.3특별법의 공포와 진상보고서마저 채택되어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 뒤따른다. 드디어 2003년 10월31일에 대통령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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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병수 신부 ⓒ제주의소리
제주도민을 향해 공식사과하기에 이른다. 아프고 슬픈 진실을 가슴에 품고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며 인동초(忍冬草)처럼 다시 일어선 것이다. 아무리 불순한 이념적 덧칠로 갈등과 분열을 야기해도 4.3의 진실은 가리지 못한다. 도리어 선명히 드러나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후손대대로 기억될 것이다. 4.3의 완전한 해결은 제주 현안의 실타래이자 참된 제주공동체의 회복과 미래발전의 시금석임을 염두에 두자.

이제 뜻 깊은 추석 한가위를 맞아 우리 선조들의 나눔과 배려, 자비와 애향정신 등의 공동체 정신을 본받아 난마(亂麻)처럼 얽히고설킨 현안들을 지혜롭게 풀어내어 이 고장 제주를 더욱 제주답게 옹골차게 일구어나가는 데 서로 마음과 뜻을 모으도록 하자. / 천주교제주교구 복음화실장 고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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