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33) 헤르만 크노플라허 『자동차 바이러스』 그 해악과 파괴의 역사
 
▲ 헤르만 크노플라허 『자동차 바이러스』 그 해악과 파괴의 역사, 박미화 옮김. 지식의날개.
뜬금없는 생각하나가 머리를 스친다. 골목에 대한 기억.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서울 외곽의 동네는 전국의 모든 도시의 변두리처럼 골목들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좁다랗고 구불구불한 골목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엄마들의 친목모임 장소였고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그렇게 좁은 공간이 야구장이 되기도 했고 축구장이 되기도 했으며 돌멩이를 세워놓고 쓰러뜨리는 ‘원시적인’ 놀이의 장소이기도 했다. 골목 근처 맨땅 위에 돌조각이나 나뭇가지로 선을 그으면 금세 경기 종목이 바뀌곤 했다. 그래서 골목은 공간과 공간을 연결해주고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통로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골목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람들의 자리를 자동차가 차지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공터는 주차장이라는 이름으로 자동차에게 ‘양보’되기 시작했다. 골목을 쌩쌩 달리는 자동차가 위험으로 인식되기 시작된 후 언제부터인가 그런 위험은 아이들을 골목과 공터에서 ‘쫓아내는’ 구실이 되었다. 놀이는 아이들의 특권이다. 아이들의 놀이는 ‘모험’으로 가득하고 몸과 몸이 부딪히면서 아픔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을 배워가는 사회화의 계기이다. 놀이 속에서 모든 감정은 친구들과 공유되어야 하기에 아이들은 타자와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운다. 골목과 빈터가 자동차에게 점령당하면서 아이들은 ‘놀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고 사회적 존재로서 공감하고 소통하는 시민의 덕성을 배울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골목은 아예 사라진다. 직선으로 구획된 아파트와 빌라 단지들이 들어서게 되면서 골목은 사라지고 도로가 만들어진다. 골목이 연결과 공존의 공간이었다면 도로는 절단과 고립을 초래한다. 이제 누군가에게는 도로를 건넌다는 것은 목숨을 내건 일이 되어 버린다. 자연적으로, 문화적으로 하나였던 공간이 자동차만을 위해 만들어진 도로에 의해 잘려져 그 원형을 상실하게 된다.

위험해진 도시 공간, 사람보다는 자동차를 우선하는 도시계획은 사람들에게 자동차에 의존하게 한다. 당장의 편리함과 경제적 계산에 의존하는 자본주의적 인간들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합리적인’ 개인들의 ‘합리적인’ 선택이 사회전체에게 합리적이라는 법은 없다. 저마다 편리함을 이유로 자기의 차를 소유하게 되면 이용객이 줄어든 대중교통에 대한 투자가 줄고 낙후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자가용에 대한 수요는 더욱 늘게 된다. 악순환의 고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차가 많아지면 주차 공간 확보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교통체증이라는 골칫거리가 생겨난다. 자동차를 위해 주차공간이 넓어지고 도로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사람들의 공간, 특히 아이들의 놀이공간이 잠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로의 확장은 생태적 공간을 절단하고 동물들은 왜곡된 서식지에 놀라게 된다. 로드킬은 자동차가 그들의 생태계를 절단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동차가 지배하는 문명을 견뎌내기 어렵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동차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 배기가스에 포함된 유해물질과 미세먼지, 자동차 타이어가 노면과 마찰하면서 만들어내는 유해물질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호흡기 계통의 질병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지만 대기오염만큼 심각한 것이 소음 공해다. 『자동차 바이러스』의 저자 크노플라허가 지적하듯이 새벽에 술에 취해 시끄럽게 하는 사람은 경찰에 신고하지만 지속적으로 수면을 방해하고 호르몬체계를 무너뜨리는 자동차 소음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진화의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에서 인간이 유인원과 분리되는 가장 중요한 계기는 직립보행이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인간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라고 부른다고 말이다. 이 말은 단순히 똑바로 서서 걷는다는 것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동물’로서의 사람이 서서 걷고 운동하기 때문이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직립보행하면서 얻은 고통은 허리의 통증처럼 네발로 걷는 동물들이 격지 않는 질병이다. 그런데 이제 인간은 걷기조차 포기함으로써 새로운 질병을 앓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걷기를 포기함으로써 ‘인간’이기를 멈추거나 혹은 새로운 인간형으로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육체적 노동은 기계화되고 이동은 자동차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길어진 수명만큼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것이다. 

요즘의 ‘상식’에 기대어 생각하면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많이 사면 살수록 철강, 자동차, 정유회사가 번창한다. 자동차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편리한 생활이 만들어낸 현대의 질병들은 의료산업에게 큰 이윤을 가져다준다. 보험회사들도 호황을 누리기는 마찬가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서로가 서로를 도와 공생하는 경제 공동체가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가 빠져 있다. 바로 사람의 가치다. 길게 고통스럽게 살며, 항상적인 위험에 노출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행복’따위는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 누군가 그랬다고 하지 않는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분명 경제는 사람들의 살림살이, 먹고 사는 문제여야 하지만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세상에서는 그것과는 무관한 숫자놀음이다. 사람들은 갈수록 더 불행해지지만 경제는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자동차 문명이 이렇게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성장의 한 가운데 있다. 

크노플라허가 자동차를 ‘바이러스’에 비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고 놀라울 정도로 전파속도가 빠르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는 ‘치명적’이지는 않다. 감염의 직접적인 결과로 죽음에 이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어쩌면 바이러스 ‘전염’보다는 ‘중독’이 더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중독은 몸과 마음을 파괴한다. 하지만 중독된 사람들은 파괴적인 효과를 잘 감지하지 못한다. 더 결정적인 것은 파괴적인 효과를 인지하게 되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중독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연간 5000명 이상의 사람이 자동차 사고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사망한다. 사고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는 사람은 이보다 더 많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기오염과 소음공해로 생긴 질병은 더 많다. 걷지 않아서 생기는 비만과 질병은 또 어떤가? 걷기 위해 체육관을 찾는다. 어떻게? 자동차를 타고 가서 주차전쟁을 벌이면서. 걷기 위해 올레길을 찾는다. 어떻게? 자동차를 타고 가서 자연경관을 온통 육중한 금속 덩어리들로 가득 채우면서. 

한 가지 더. 사람들은 자동차를 본인이 조작하고 통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동차의 속도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보행자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운전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인간 몸의 템포와 리듬감과 자동차의 속도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격차는 사고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운전석에 앉으면 거대한 철갑으로 보호받으면서 이 육중한 문명의 이기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우월감에 빠지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속도와 방향을 조작할 수 있을 뿐이다. 몸은 좁다란 운전석에 묶여 있고 마음은 순식간에 난폭해져 차 밖의 모든 사람과 사물, 심지어는 옆을 달리는 자동차조차도 진행의 방해물정도로 생각하게 된다. 크노플라허의 말처럼 운전자는 정말 ‘새로운 인간종’인 것은 아닐까? 이 새로운 인간종은 요즘 유행하는 영화주제인 ‘좀비’나 ‘흡혈귀’보다 더 무섭다. 좀비와 흡혈귀는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상상의 산물이지만 ‘운전자’는 ‘내 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친근함의 이면에 존재하는 그들(우리들)의 난폭함, 그들(우리들)의 무감각이 공포스럽지 않은가. 아! 우리는 그 공포마저도 느낄 수 없게 중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서영표 제주대 교수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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