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나무를 품어 나무는 한 쪽이 환해졌다 / 나무는 그늘을 품어 그늘 한 쪽이 서늘해졌다 / 그늘은 나를 품어 나의 몸엔 그들의 문신이 새겨졌다 / 나는 의자에 나를 새겨 의자가 내 모습으로 얼룩졌다 / 제 몸을 다 내주며 기울어져가다 / 이윽고 자신을 다 지우고 하나가 되며 / 낮은 곳을 흥건히 적셔가는 부드러운 동질감 / 사랑한다는 것은 /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너의 모든 것을 품어가는 일 / 하나가 하나에 기대어 천천히 물들어가는 오후 / 오후는 아침을 아침은 어제 저녁을 / 말없이 고요히 다 받아들이고 / 하루가 되는 것이다
                                                           - 김영미 시 ‘물들다’ - 
 
스미거나 옮아서 묻는다. 그리고 차차 닮아간다. 물듦이다. 내가 너에게로 간 것인지, 네가 내게로 온 것인지 구분과 경계는 이미 없다. 내가 너에게 젖어든 것이고, 네가 내게 물든 것이다. 이유 있는 ‘한통속’, 바로 ‘사랑’이다.

김영미(54, 제주작가회의 부회장)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물들다>를 출간했다. 시집 <달과 별이 섞어 놓은 시간>을 내놓은 지 6년 만의 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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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작품 67편을 5부로 나누어 수록한 이 시집은 시인의 ‘간절한 치유와 구원의 기도가 지상의 비루한 세계와 맞섰던 뭇 존재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한 것이며, 우리시대의 타락하고 부정한 것들에 대한 단죄와 심판을 위한 것이며, 수억만 년 우주의 시간을 농락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준열한 꾸짖음과 그에 대한 반성’으로 가득하다. 

김영미는 ‘시인의 말’에서 “죽을 것 같은 날들이 있었음에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리워해야 할 대상이 없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내 생애 가장 큰 죄였음을 이제와 알게 됐다, 다시 옷깃을 여미는 시간”이라는 말로 시와 치열하게 마주한 자신을 표현했다. 

고명철 문학평론가(광운대 교수)도 “김영미 시의 아름다움의 감동은 서로 다른 존재의 어떤 어우러짐 과정의 순간에서 밀려든다”고 평했다. 

그는 ‘물들다’를 통독한 해설 글에서 ‘자연스러움을 넘는 자연스런 삶의 비의’라고 김영미의 시 세계를 단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새삼 시를 에워싼 근원적 물음들과 마주하고, 자기의 민낯을 대해야 할뿐만 아니라 알몸을 응시해야 하는 저 뻔뻔함과 두려움,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새 탐닉하게 되는 나르시시즘 속에서 시는 특유의 존재 가치를 얻는다”고 적었다. 

김영미는 남의 시를 필사하다가 문득 시를 쓴다. ‘경고’다. 철저히 자신을 향한.  

김규동 선생의 ‘경고’라는 시를 필사하다가 / 나도 경고를 받는다 / 펜을 잡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 글씨는 삐뚤빼뚤 / 펜 끝이 파르르 성을 낸다 / 비우지 못한 마음속에 / 깊이 잠겨있던 이기심이 / 나를 밟고 일어선다 / 불가뭄이 들어 메마른 가슴 / 생각할 줄 모르는 영혼 / 하나를 향한 거침없는 집착 / 버려야 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와 / 깊은 수렁이 되어 발목을 잡는다 / 펜을 놓고 / 멍하니 필사하던 종이를 바라본다 / 늦은 하루가 송곳이 되어 / 가슴을 겨눈다  
                                                           - 김영미 시 ‘경고’ - 

김수열 시인도 “김영미 시인은 상처를 쓴다. 상처는 그 본성이 훈장보다는 치부에 가까운 편이라 드러내기를 꺼리는 경우가 허다한데 시인은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며 “문제는 상처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분칠을 하여 꾸미거나 레이스가 달린 화려한 치장으로 가리는 일은 정중히 사절하고 꿰맨 자리의 실밥까지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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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미 시인. 제주작가회의 부회장
하여 목에 가시 걸리듯 단숨에 읽어 내려가기가 껄끄러운 것들도 간혹 눈에 띄지만 삶이 상처인 사람에게는 그 너비와 깊이만큼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아프지만 참 좋다”고 평했다.   

김영미 시인은 제주 출생. 문장21 시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에세이스트 수필 부문 신인상도 수상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물들다>(168쪽, 9000원)는 리토피아에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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