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36) 혜강 최한기 『기학(氣學)』 / 김준기 제주도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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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강 최한기 『기학(氣學)』손병욱 역주. 통나무.

우주가 문제다. 요즘들어 우주가 비합리적인 기복과 주술의 표상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말 때문이다. 이 문장에는 우주를 기복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주술적 심리가 담겨있다. 개탄스럽다. 우주란 그런 게 아니다. 인간 개인의 욕망이나 염원과 우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우주는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나서는 인격신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宇宙)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로서, 주술적 관점에서 기복신앙의 대상으로 삼을만한 존재가 아니다. 우주는 그 자체로 자연이며,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문제이자, 인간 삶의 총체인 사회를 포괄한다. 우주란 물리적인 차원 너머의 가치에 다가서기 위한 물음의 단초이다. 

화엄경 법성게에 나오는 '먼지 하나에도 우주가 담겨있다(一微塵中含十方, 일미진중함시방)'는 말도 개별과 총체, 특수와 보편을 아우르는 우주 개념을 담고 있다. 우주는 개별적인 존재 하나하나를 모두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의 총체를 성찰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우주 개념을 저자거리의 우스개로 만들어버린 이 시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주의 기운이라는 말이 이렇듯 오염된 단어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바, 이제는 종교적 관점이 과학적 관점에서 우주의 본질을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란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을 포함한 것이다. 

필자는 과학예술융합비엔날레 <프로젝트대전 2012>(대전시립미술관)를 기획하며 '에네르기(Ener氣)'를 주제어로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동양의 기운(氣運)과 서양의 에너지(enery) 의제를 합친 말이다. 로마자 표기 'energy' 가운데 마지막 음절인 '-gy'를 한자어 '氣'로 표기함으로써 동서양의 에너지개념을 함께 성찰해보자는 뜻을 담았다. 한중일에서 각각 '기[gi], 치[qi], 키[ki]'로 읽히는 이 단어는 로마자와 합쳐서 '에네르기(Ener氣)[energy]'라는 합성어를 이룬다. 로마자와 한자를 섞어 본 것은 동양과 서양 모두 기운/에너지 개념을 인간과 사회와 인간, 즉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로 삼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기운/에너지는 우주만물과 같은 자연과학적 실체와 더불어 인간과 사회와 같은 인간과학 또는 사회과학적 실체 모두를 두루 관통하며 움직임과 변화를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힘이다. 동아시아에서 수천 년부터 기(氣)라는 개념어를 사용하면서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인간 이해의 기본 원리로 삼았다. 서구에서는 근대과학의 시대에 들어서 에너지라는 주제를 과학적 의제로 채택했다. 기운/에너지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전 영역을 관통하면서 인류 문명사 전반에 걸쳐있는 의제이자, 자연재해를 유발하는 원천이며, 인류가 유발한 파국의 원인이기도 하다. 

기운/에너지는 과학과 기술 분야만이 아니라 예술에 있어서도 이 시대 최전선의 화두이다. 물리학과 화학, 천문학, 나아가 생명과학의 에너지 문제는 자연 이해의 지름길이다. 그것은 우주를 낳은 빅뱅에서부터 생명현상의 출발인 미토콘드리아의 탄생, 나아가 우주와 생명의 상호작용에 이르기까지 보편과 특수, 전체와 개별을 관통하는 우주적 원리를 담고 있는 점에서 에너지 의제는 매력적이다. 인간 개체와 군집을 넘나드는 사회과학의 에너지 문제는 인간과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의 지평을 넓힌다. 특히 한국처럼 급변하는 사회는 20세기 내내 들끓는 사회적 에너지가 있었기에 많은 예술가들이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그것을 예술적 실천과 연계한 선례가 있기도 하다. 기술과 연관한 에너지 의제는 하이브리드 기술이나 대안에너지 등의 문제를 떠올린다. 

특히 후쿠시마 해일과 원자력 발전소는 자연과 문명이 만들어낸 거대한 에너지에서 비롯했다. 후쿠시마의 대재앙 이후 자연의 재난 못지않게 인공적인 재난으로 떠오른 핵에너지의 문제는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와 인류 전체의 공동의 미래에 관해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문명사회의 기본조건으로 자리잡은 자원으로서의 에너지 문제는 국가와 계급 사이의 갈등으로 번져 전쟁과 투쟁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요컨대 에너지 문제는 자연과 사회와 인간의 문제를 관통하는 세계관의 문제이며, 원자에서 세포로, 세포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천문으로 확장하는 우주적 의제이다. 

기운/에너지는 우주의 움직임과 변화를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힘이다. 그것은 만물에 존재하는 자연과학적 실체와 더불어 인간과 사회와 같은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실체 모두를 두루 관통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수천 년부터 기(氣)라는 개념어를 사용하면서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인간 이해의 기본 원리로 삼았다. 서구에서는 근대과학의 시대에 들어서 에너지라는 주제를 과학적 의제로 채택했다. 아인슈타인의 수학적 명제 ‘E=mc2’은 에너지를 설명하는 서구 근대과학의 핵심이다. 

여기 ‘우주의 기운’을 과학적 관점에서 재정립한 선구자가 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동양과 서양의 학문체계를 집대성하고자 했던 조선시대 실학자 최한기다. 그의 ‘기학(氣學)’은 동서양의 기운/에너지 의제가 세계 이해의 문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최한기는 그의 저서 『기학(氣學)』에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경계를 넘어서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창했다. 그것은 이치(理致)와 기운(氣運)이 하나의 것인지, 아니면 본질과 현상의 관계로 나뉘는 것인지를 놓고 대립한 두 논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는 우주의 원리를 활동운화(活動運化)로 보고 운동하는 에너지의 실체로서의 기를 강조했다. 우주는 스스로 생성하고 소멸하는 운동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운화지기는 우주의 운동에너지를 이르는 것이며, 형질지기는 존재의 형체와 질료를 이루는 기를 말한다. 그는 운화하는 기를 나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운화지리 또는 유행지라라고 했다. 특히 사람의 유행지리를 추측지리라고 했다. 최한기 기학의 기본은 운화지기와 형질지기, 유행지리와 추측지리가 짝을 이루는 데 있다.

최한기의 기학은 무형이 아닌 유형의 것을 대상으로 하며, 기의 운화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증험이 가능한 학문이며, 기일원론과 경험과학을 토대로 한 학문이다. 최한기의 기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관통하며 궁극적으로 인간이해의 길, 즉 인간과학으로 통한다. 본질과 현상, 이론과 실천 등으로 이항대립적인 관계를 보이는 이와 기의 문제를 넘어서 기일원론을 주장한 최한기의 철학은 오늘날 자연과 사회, 인간을 이해하려는 통합과학적 사유의 지평을 연 선구적인 사상이다. 탈근대적 융복합의 시대정신을 갈구하는 현대사회에 있어 조선 철학자의 울림이 큰 이유이다. /김준기 제주도립미술관장,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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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관장

현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미술평론가

홍익대학교 예술학 석사, 미술학 박사과정 수료.

전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 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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