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노인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아프리카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입니다. 노인은 단순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현명한 사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004년 지진에 이은 쓰나미로 수많은 목숨을 잃은 인도네시아의 작은 섬들 중에 단 한 사람의 피해자도 없었던 섬마을이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전해 내려온 ‘땅이 흔들리면 바닷가에 있지 말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는 이야기를 기억한 섬마을 노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어르신들 삶에는 각각 자신만의 철학과 지혜뿐만 아니라 시대의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제주인의 자서전’은 제주도 곳곳에서 살아오신 어르신의 삶을 약전(略傳: 간략한 자서전)으로 기록하는 프로젝트로 바람작은도서관이 기획하고 만들었습니다. 바람작은도서관은 2007년 4월 13일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에서 문화소외지역 도서문화보급을 목표로 문을 연후 2014년 조천읍 선흘리로 이전해 세계자연유산 관련 체험 프로그램, 함께 책 읽기 모임, 지역 어르신 자서전 만들기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바람작은도서관은 2015년 제주시의 지원으로 지역 어르신 세 분의 자서전을 만든 경험이 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2016년 제주문화예술재단 우수기획프로그램 공모사업에 선정돼 6개월여 동안 도내 열다섯 분 어르신의 약전을 만들면서 그 과정을 영상에 담았습니다.

12월 23일부터 25일까지 한라도서관에서 열다섯 권의 ‘제주인의 자서전’과 ‘영상기록’ 등을 소개하는 작은 전시를 개최합니다. 어르신들의 짧은 자서전에는 그 분들의 삶뿐만 아니라 제주도 곳곳의 역사와 문화가 숨 쉬고 있습니다. <제주의소리>가 2016년 송년기획으로 ‘제주인의 자서전’에 소개된 열다섯 분의 ‘작은 역사’를 매주 토요일에 차례로 소개합니다. *표시된 각주 내용은 기사 마지막 부분에 별도의 설명을 달았습니다. [편집자]

[송년특집 - 제주인의 자서전, 글 싣는 순서]

▶(1) 제주도와 한라산을 사랑한 소산(素山) 안흥찬 님

(2) 정성으로 복을 나누는 심방, 고복자 님

(3) 제주어로 동심을 노래하는 시인, 황금녀 님

(4) 초등학교 교장 퇴임 후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신 김진선 님

(5) 외항선을 타고 세계를 누빈 뱃사람, 김진홍 님

(6) 해녀와 더불어 살아온 남원리 어촌계장, 오관표 님

(7) 대평리에서 농사를 지어오신 노인회장, 김재철 님

(8) 용강마을 43의 아픔을 간직하신, 부민자 님

(9) 그림 그리는 해녀, 현춘능 님

(10) 하례리의 멋쟁이 노인회장, 김태수 님

(11) 동홍동을 위해 평생을 애써오신, 김응진 님

(12) 우도에서 태어나 고성에서 살아오신, 고경애 님

(13) 세화리에서 평생 살아오신, 고경자 님

(14) 선흘리 이야기를 간직하신, 이문자 님

(15) 제주에 내려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신, 채은경 님


한평생 제주도와 한라산을 사랑한 소산(素山) 안흥찬 

어린 시절,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

나는 1930년 제주도 제주시 서문로터리 부근에서 태어났다. 우리 아버지의 고향은 화북이었다. 아버지는 공부에 재능이 많으셨던 분이었다. 4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셨던 아버지는 3년제 학교였던 제주농업학교, 광주사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 교사생활을 하셨다. 당시에는 제주가 행정상 전라도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여수, 순천, 나주 등 여러 지역의 학교를 돌며 근무하셨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고향에서의 추억이 많질 않다. 하지만 그 대신에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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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산 안흥찬 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아버지가 제주 신창국민학교에 부임하셨던 당시 내 나이는 7살이었다. 제주 바깥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제주 사람임에도 제주사투리를 못 알아들을 때였다. 나는 초등학교(초등학교) 입학시험을 당당히 합격해서 8살의 나이에 신창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엔 국민학교에 10살, 11살을 넘어 입학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제 나이인 8살에 입학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었다. 그 시절엔 아이들을 호적에 늦게 올리는 경우가 많았고, 집안 형편들도 다들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아버지가 한림국민학교, 조천국민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되어 나도 따라서 전학을 갔다. 조천국민학교가 내 전학의 종착지였다. 나는 1943년에 조천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공립 제주농업학교로 입학했다. 전교생이 250명이었고, 1개 학년이 농과 25명, 축산과 25명을 합쳐 50명이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일제강점기 말미였다. 학생들은 한라산 관음사 주변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에게 숯을 구워 가져다주는 일에 동원되었다. 신발도 없어서 새끼로 헝겊을 묶어 만든 신발을 만들어 신고 다녔던 것을 기억한다. 한라산을 오르내릴때면 눈이 신발에 다 들어갔다. 얼마나 추웠던지…. 하지만 처음 보는 한라산의 장엄한 모습에 발 시림도 잊었었던 것 같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비행장 짓는 일에 동원되었다. 매일 한 명씩 태역* 20장을 맡아서 비행장 활주로에 깔아야 했다. 당연히 공부는 할 수 없었다. 나는 공부를 좋아했지만 시국에 따라 내 뜻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나의 부모님 

우리 아버지에 대해 덧붙이자면, 아버지 성함은 안병호이시고 순흥 안 씨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본래 성품이 순하시고 훌륭한 인격을 가진 분이셨다. 글 솜씨도 뛰어나 마을 사람들이 종종 배움을 요청하러 왔다. 우리 형제들에게는 항상 됨됨이를 바르게 하라 일러주셨다. 

그런 아버지 곁에 계셨던 어머니도 존경받는 분이었다. 어머니 성함은 김영희. 교육과 배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이셨다. 그 시절 여자로서는 흔치 않게 북국민학교를 졸업하셨다. 얼마 되지 않는 아버지 월급(그때 돈으로 20원)으로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키우셨는데, 그 중에서도 첫째 형님은 사상가만 다닌다는 전라도 고창고등보통학교를, 둘째 형님은 장면* 씨가 교장이었던 동성상업학교를 보냈다. 학교 보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그 시절에 육지*로 고등학교를 보냈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이렇게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 일이라면 두 손, 두 발 다 걷고 도우셨다. 그런 아낌없는 지원 속에서 우리 형제들은 남에게 베푸는 성심을 가진 사람으로 잘 자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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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흥찬 님이 국민학생 시절 가족 사진. 사진 왼쪽 가운데줄 까까머리가 안흥찬 님 / 사진=안흥찬 님 사진첩에서 ⓒ제주의소리

한라산을 사랑하다 

어린 시절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농업중학교를 다니던 일제강점기 말미에 한라산을 처음 등반했다. 일본 군부대에 숯을 보급하는 일을 하며 겨울 한라산을 종종 올랐는데 그때 보았던 한라산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 이후로는 한동안 한라산에 오르지 못했다. 해방 직후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금족령*이 내려졌고 또 얼마 안 되어 한국전쟁이 발발해 입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언제나 한라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4년 4개월간의 군 생활 후에야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한라산에 올랐다. 군 제대 후 나는 산악인 김종철씨와 함께 매일같이 한라산을 오르내렸다. 등산장비라고 해봐야 군에서 가져온 군화와 반합*, 판초우의*가 전부였다.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등반로도 없는 산기슭을 기어 올라간 적도 많았다. 겨울에는 특히 더 짐이 많았다. 호박, 고구마, 쌀 등 무거운 식량을 넣다보니 배낭 무게가 40kg 가까이 됐다. 그럼에도 나에게 한라산은 ‘행복’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산은 가혹한 곳이었다. 1961년, 산을 오르던 서울대생 이경재 씨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수색대가 며칠 동안 찾아다녔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최초로 민간산악구조대가 창립했다. 당시 대한적십자사 제주지사 김현우 청소년과장의 후원 아래 김종철, 나, 고영일, 김현우, 현임종, 김규영, 강태석, 김형희 등이 구조대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구조신고가 들어오면 곧바로 나갈 수 있게 머리맡에 배낭을 두고 잤다. 한순간이라도 빨리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라산을 뛰어다녔다. 정비되지 않은 등산로 곳곳에 조난사고 방지를 위한 표시기를 달았고 위험한 곳에는 계단과 안전 줄을 설치했다. 나무와 돌에 빨간 십자를 그려 표시하기도 했다. 고향 사람들이 ‘산에 미친놈들’이라며 많이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생명을 구하는 데 그러한 비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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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흥찬 씨(사진 맨왼쪽)와 제주산악회 창설 멤버들 / 사진=안흥찬 님 사진첩에서 ⓒ제주의소리

1964년에는 제주산악회 초대 회장을 맡았고 67년에는 활짝 핀 한라산 철쭉을 소재로 한 ‘철쭉제’와 눈 내린 한라산의 무운을 비는 ‘만설제’를 기획해 한라산의 가치를 전국에 알렸다. 그 다음해에는 마라도에서 백두산까지 국토삼천리 종주행사에 주축이 돼 참가하기도 했다.

철쭉제 때 일화를 하나 얘기하자면, 철쭉제 시작을 알리는 제를 지내는데 갑자기 광풍이 불어 긴급 대피한 일이 있었다. 임원들 7~8명만 남아 산신령께 빌었다. “신이시여, 사전에 말씀도 올리지 못하고 건방지게 내 마음대로 사람들을 모아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허락받고 하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러자 감쪽같이 날씨가 개다. 그래서 항상 산신령께 비는 마음으로 한라산 축제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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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철쭉제 여왕과 함께 / 사진=안흥찬 님 사진첩에서 ⓒ제주의소리

한라산은 나를 계속 부른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갔지만 언제 어디서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림도 내가 그리고 싶어 그린 것이 아니라 산이 그리라 해서 그렸다. 미술이라고는 어깨너머 구경도 못 해봤던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 그림들은 산이 나의 손을 잡고 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산을 오르내리며 틈틈이 산의 모습을 스케치한 뒤 집에 돌아와 캔버스에 옮겼다. 그렇게 한 점 두 점 그리다보니 작품들이 꽤 쌓였다.

한번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서화작가협회 주최로 전시회를 열었다. 3000개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은 잘 모르지만 내 눈에는 모두 멋진 작품이었다. 그중에는 내가 출품한 백록담 그림도 있었다. 내가 그림을 구경하고 있던 차에 운영위원장이 내 그림을 보며 저 작품이 소산* 선생의 작품이냐고 물었다. 소산(素山)은 나의 호다. 내 그림이 형편없어서 저렇게 묻나 싶었다. 그런데 그 속사정은 이러했다. 심사위원들이 내 그림 같은 화풍을 처음 봐서 입선을 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수상이 보류되긴 했지만 다음에 꼭 다시 출품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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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찬 님이 그린 한라산 수묵화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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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찬 님이 그린 한라산 수묵화 ⓒ제주의소리

나중에 나는 한국서화작가협회전 한국화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로도 한불 수교 100주년기념 서울미술대전에서 입선하는 등 한라산 덕분에 크고 작은 수상경력도 쌓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도산’이다. 당시는 젊었지만 나이가 들어 산에 오를 수 없을 때 보기 위해 신문지를 빚어 만든 인공산이다. 산과의 인연을 잊지 않기 위한 내 노력의 결과였다.

아내에게 미안했던 결혼생활

우리 아내가 나로 인해 고생이 참 많았다. 여기에 적힌 내용은 일부에 불과하다. 나는 결혼 3일 만에 산에 가야 한다고 집을 나섰다.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와 결혼을 한 것이오?” 나는 대답했다. “나는 당신과 결혼했지만 산은 반드시 가야한다.” 그러고는 산으로 휭하니 떠나버렸다.

정말로 나는 한라산과 관련된 일이 아니고서는 신경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아내 말처럼 누구와 결혼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내는 정신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집안일도,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도 모두 아내의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43년 동안, 정년퇴직할 때까지 학교일을 다녔다. 내 수입만 가지고는 살림을 꾸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돈 관리도 당연히 아내 몫이었다. 나에게 있어 은행가서 돈을 찾는다는 건 신비체험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미국공보원에 있을 때는 차비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나오는 주급을 2~3달에 한 번씩 가서 받아왔다. 나는 그 월급에서 술 한 잔 사먹고 나머지는 아내에게 맡겼다. 그나마 내가 한전 다닐 때 받았던 월급은 받지도 않고 객지 살림에 보태라며 오히려 아내가 매달 20만원을 보내줬다. 한전에서 직원들 대신 사표를 냈을 때에는 아내가 그만두지 말라며 사정을 했었다. 그때는 우리 집을 짓고 있어서 돈 한 푼이라도 아쉬운 때였다. 어린아이 달래듯 아내는 나에게 좀만 참아 달라 부탁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한전을 나왔고 대신에 퇴직할 때 받은 퇴직금 800만 원 중 500만원은 집 짓는데 보태라고 주었다.

아내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반찬을 싸들고 사무실로 왔다. 원래 사무실 안까지는 들어오지 않던 사람이지만 한번은 호기심에 들어왔었던 거 같다. 거기서 사무실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한라산 그림을 보고 느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자연에서 살아야 하는구나. 내가 더는 왈가왈부할 수 없겠다.’ 아내는 내가 산행을 갈 때마다 뒤에서 말없이 도와주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 사람은 내가 말려서 될 사람이 아니구나’ 생각해서 포기하고 돕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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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첫째 아들 정규 / 사진=안흥찬 님 사진첩에서 ⓒ제주의소리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가족들과 오순도순 여행 한 번 가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한라산이 무사해야 했다. 모든 이의 공감을 얻진 못하겠지만 내 마음은 그러했다. 아내에게는 항상 미안하다. 아이 넷, 나까지 다섯을 뒷바라지 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산신령이 보살펴 주셔서 내 아내가 떠나지 않고 내 곁에 있어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종교가 따로 있지만 나에게는 산신령의 존재가 더 큰 것 같다. 감사할 따름이다.

▶ 각 주 

*태역: 흙이 붙어 있는 상태로 뿌리째 떠낸 잔디의 조각. 뗏장의 제주어. 

*장면: 초대 주미대사를 거쳐,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고 이후 자유당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로 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 4·19 이후 의원내각제인 2공화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육지: 섬에 상대하여,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 땅을 이르는 말. 예부터 제주 사람들은 제주가 아닌 다른 지역을 육지로 불러왔다.

*제주 4·3사건: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금족령: 외출을 금하는 명령.

*반합: 밥을 지어 먹는 데 쓰는 알루미늄제 군용 밥그릇.

*판초우의: 국군 장병들이 훈련 시 우의(雨衣)로써 사용하며 재질은 나일론과 우레탄의 합성 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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