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40) 해가 저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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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무는 해. ⓒ 김연미

해가 저문다. 동그랗게 제 실루엣을 드러낸 태양이 나와 눈높이를 마주하고 있다. 순하디 순한 얼굴로 이제까지의 제 노고를 알아달라는 듯 서녘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은 그 힘이 쇠약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눈을 들어 올려다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한낮의 절대 권력은 어디에도 없다. 느슨해진 태양의 손아귀에서 눈치껏 빠져나온 만물의 색깔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나무와 바다와 하늘의 색깔이 애초 검은 색에서 나왔듯 태양의 손아귀를 벗어난 색깔들이 도로 검은 색이다. 나무도 바다도 하늘도 모두. 해가 저문다는 것은 태초 하늘과 땅조차 구분되지 않았던 혼돈의 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가. 사위는 서서히 어둠에 잠기고 하루가 힘겨웠는지 유난히 서녘하늘이 붉은 몸살을 앓고 있다.  

노동의 긴장에서 벗어난 뼈마디들이 오도록오도록 힘을 놓는다. 뼈와 뼈 사이가 최대한 느슨해지면서 몸은 가장 낮은 자세가 된다. 의자에 앉으면 의자모양이 되고, 바닥에 누우면 몸의 형체가 다 풀어지면서 그대로 바닥이 되어 버릴 것 같다. 육체는 그렇게 객관적 물체가 되어 내 의지에서 점점 멀어지지만,   정신은 온전히 내 영혼의 중심을 이루면서 더욱 또렷해진다. 육체와 정신의 상반된 상태가 극점에 도달했다. 자칫 서로 분리될 것 같은 지점에서 느끼는 이 기분 좋은 피곤함. 오늘도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다.

해가 저문다. 그렇게 저문 하루하루가 벌써 365일이다. 그 사이 새순이 나고, 꽃이 피고, 꽃이 떨어진 자리에 열매를 맺었다. 그 열매 어느덧 익어 수확의 시기다. 한 해가 가진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보여주며 한 바퀴 돌고 나면 다시 제자리. 그 출발 지점에서 다시 새순이 돋고, 꽃이 피고, 지난 해 했던 일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할 것이다. 닫혀 있다고 생각했던 그 반복의 고리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길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표정을 바꾸어가는 시간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진화된 새로운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고, 우린 지금 그 길의 연결고리 하나를 매듭지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흐른다. 고여 썩어 가는 모든 정체를 뚫어내며 사람들이 흐른다. 가장 절망적일 때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적기임을 믿으며, 2016년 마지막 날까지 촛불을 켠 사람들. 확인되지 않았을 때 가질 수 있었던 최소한의 기대조차 다 사라져버린 절망과 상실의 시대. 상식적이지 못한 시간이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이 암울한 상황에서도 해는 저물어 다시 원점에서부터의 출발을 준비하고, 그렇게 출발한 새로운 시작은 분명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2016년과 2017년 사이에 문지방이 없듯, 절망과 희망사이에 경계는 없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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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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