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범 칼럼] 국가적 위기상황에도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는 정치인들의 여전한 구태

185938_213283_1416.jpg
▲ 지난 달 31일 열린 제11차 제주도민 촛불집회. 2016년의 마지막 날 쌀쌀한 날씨에도 1500여명이 모여 박근혜 즉각퇴진을 외쳤다. ⓒ 제주의소리

촛불의 기적

병신년의 한 해가 지나고 정유년의 새 해가 밝았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이지만 지난 일 년만큼은 세월이 덧없이 지나간 것만은 아니다. 작년 10월말 처음 시작된 촛불시위 때만 해도 시위 군중들의 한낱 호기로운 구호로만 보였던 대통령 탄핵은 이제 국회를 통과해 헌법재판소에 상정된 지 이미 한 달이 다 돼간다. 비록 여소야대의 정국이었지만 여당의원들의 머릿수가 탄핵가결을 저지하기에 넉넉한 상황이었으니, 불과 일 년 새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해버린”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결과는 차라리 기적에 가깝다.

절반에 가까운 여당의원들의 탄핵찬성은 정말 의외였다. 그동안 대통령의 폭정과 실정을 무조건 감싸 안으며 영예로운 훈장이라도 되는 양 일사불란하게 대통령의 호위무사를 자처해왔던 그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의 예상 밖의 절대군주와의 ‘맞짱 뜨기’는 권력말기 힘 빠진 대통령에 대한 정치계의 비정함 탓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터. 눈치만 보던 그들도 급기야 수백만 촛불 시민들의 성난 민심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군주민수(君舟民水)’는 이렇게 하여 일 년 전체의 만사를 가장 적절하게 압축하는 올해의 고사성어로 선정됐다.

꼴뚜기의 어물전 망신

군주민수. 권력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공주’ 대통령의 현 처지를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이 있을까. TV 앞에서 “나라를 팔아먹어도 같은 당을 찍겠다”며 ‘묻지 마’ 투표가 애국이라도 되는 양 자랑했던 어느 영남 유권자의 모습은 비단 소수 국민들의 극단적 현상이 아니었다. 어리석은 지도자를 더욱 어리석게 만들고 그녀의 공주병을 치유불능의 만성으로 키운 것은 콘크리트 지지라는 우리 정치판의 전반적인 고질적 선거 추태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혼군(昏君)은 그렇게 한껏 기고만장해진 나머지 도도한 역사의 물길을 거꾸로 돌리려다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이를 이끌어낸 촛불시민들의 민주적 역량을 평가하기 앞서 대한민국은 단 한 명(대통령의 선생님까지 감안하면 두 명이지만)의 어리석은 대통령으로 인해 지금 세계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박대통령의 탄핵은 한 주요 외신에 의해 올해의 세계 3대 뉴스에 꼽힐 정도다. 청와대는 각종 수상한 약물과 약품 구입으로 외신들로부터 마약소굴과 같은 놀림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혼군인가, 폭군인가

여기에다 눈치만 보며 권력비리에 대한 수사에 늑장만 부린 검찰, 민간 사찰과 정치공작의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 그리고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탄압한 문체부, 국민들의 연금을 자신의 호주머니 돈이나 되는 양 삼성일가의 배만 불려주는 데 쏟아 부은 복지부를 더하면 정부의 모든 부서가 일심동체가 되어 하나의 거대한 범죄조직으로 변해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기야 대통령부터가 수학여행을 가던 수백 명의 소중한 어린학생들이 여객선의 침몰사고로 죽어 가는 긴박한 순간에도 한가히 화려하게 머리를 올리고 분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랫사람들에게 달리 무엇을 기대할 수가 있을까. 무능과 무책임을 넘어 파렴치와 잔인함에 있어서 이번 정권에 비견할 역대 정부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박 대통령에게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온 국민이 경악했던 중요 비리가 터질 때마다 내놓았던 세 차례의 대통령 담화는 거짓변명으로 일관해 국민들의 부아만 더 끓어오르게 만들어 왔다. 대통령의 탄핵안은 아직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지만 대통령은 국민들에 의해 이미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 무덤 속에 들어간 그녀는 여전히 부활의 기적을 꿈꾼다.

그래도 믿는 구석

역시 독재자의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 영국 주요 신문 파이낸셜 타임스는 “박 대통령의 권력고수는 한국에 헤아릴 수 없는 해를 끼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독재자의 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헌재의 심리에 조사 불응과 시간끌기로 일관하며 직무정지 상태로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울 태세다. 그녀로 인해 나라 안팎이 그야말로 이보다 더 나쁠 수 없을 상황에서 즉각적인 퇴진만이 필수적인 해법이지만 국가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기꺼이 희생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단어는 그녀의 얄팍한 수첩에는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그녀가 배짱을 부리는 데는 믿는 구석이 있을 터. 충성스런 국무총리가 하늘에서 추락한 대통령을 위한 날개가 돼 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휴대폰으로 날라 온 문자메시지 한 개로 단칼에 잘려나갔던 그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지금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까지 등극하는 기적은 비록 국제사회에서는 ‘웃고픈’ 해외토픽감이 되고 있을지라도 관저에 칩거 중인 박대통령에게는 자신의 앞날에 일말의 희망을 걸게 하는 ‘데자뷰’로 삼고 있을지 모른다.

185938_213289_1421.jpg
▲ 지난 달 31일 열린 제11차 제주도민 촛불집회. 2016년의 마지막 날 쌀쌀한 날씨에도 1500여명이 모여 박근혜 즉각퇴진을 외쳤다. ⓒ 제주의소리

여전히 건재한 부역자들

황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박대통령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얼마 전 비선실세 최순실에 대한 교도소 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조사를 방해하기 위해 고위 교도관들이 보여준 고압적인 자세는 박대통령이 구축한 구악의 뿌리가 여전히 건재함을 여실히 보여줬다. 공정하고 엄중한 국정조사를 통해 국정농단의 진실을 밝히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데 황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맡은 바 책임을 다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훼방만 놓고 있는 것이다. 주요 부역자로서 탄핵중인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 해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욱 막중한 국정을 도맡고 있는 자체가 우리 정치판의 부조리한 현실이 아닐까.

그러나 탄핵안이 인용되면 언제라도 다시 관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강시’ 정부나 다름없는 이 허약한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게도 강력한 무기가 있다. 국민의 기본적 의무인 군대마저 갔다 오지 못한 황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에 올라서자마자 맨 먼저 주요뉴스로 방송에 내놓은 ‘북한의 전쟁 도발 가능성’이 그것이다. 북한 문제의 이슈화는 박대통령도 자신의 실정과 비리를 물타기하고 국민들을 자신의 발 앞에 줄 세우기하는 데 익히 써먹어 왔던 상투적인 수법이다. 하지만 지난 정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평화교류를 도외시하고 국민들의 안보 불안 심리만 부추겨 온 결과는 처참하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고 한반도는 강대국들 간 화약고로 전락할 판이다.

국가의 위기는 나의 기회?

여기에다 개헌은 강시정권에게 절대적인 비장의 무기로 악용될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이 문제의 쌍둥이 재단이 발각되며 절박한 궁지에 몰렸을 때 처음 꺼내든 게 개헌이었다. 개헌은 국민의 지탄을 받는 정권이 촛불 민심을 일거에 빨아들여 여론을 호도시키는 ‘블랙홀’로 악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엄중한 시기에 촛불민심과 거리가 먼 개헌을 여당은 물론 일부 야당들마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어린 학생들이 침몰사고로 죽어 가는데 대통령이 화려한 머리를 올렸던 게 도대체 헌법 때문이고 비선실세가 국정농단을 했던 게 어디 헌법 탓이란 말인가.

개헌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국민들의 중지를 모아 신중하게 이뤄져야 할 국가적 중대사다. 여당과 일부 야당들은 개헌을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수단쯤으로나 여기는 것 같다. 더욱이 그들의 대체적인 주장인 내각제 개헌은 자칫하다간 부패한 기득권을 척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자신들끼리 나눠 갖는 방편으로 비춰진다. 유례없는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는 지금 만사를 제치고 살을 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차가운 거리에서 촛불을 드는 광장의 민심을 읽어야 한다.

184416_211112_2448.jpg
▲ 김헌범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촛불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치인들이여,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당장 광장으로 나와 함께 촛불을 들라. 그러면 그대들도 촛불민심을 알게 되리라. / 김헌범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