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다. 동아시아 해상의 요충지로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다. 이러한 천혜의 입지는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제주를 지켜온 관방시설(방어시설)은 고려시대부터 설치돼온 환해장성(環海長城)과 조선시대의 읍성(邑城)・진성(鎭城)・봉수(烽燧)・연대(煙臺) 등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역사학자인 김일우 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는 이러한 제주의 관방시설에 주목한 논문 《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와 분포양상》을 최근 발표했다. 김 박사는 연대, 봉수 같은 관방시설에는 군사적 가치를 넘어 제주사람의 자생적 의지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제주의소리>가 제주 관방시설에 주목한 김 박사의 글을 매주 2회(화·목), 총 6차례 연재한다. 본문에 '#' 표시된 각주 내용은 원고 하단에 별도의 설명을 달았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머리말
②제주 지역 첫 확인의 관방시설
③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④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이외
⑤제주 관방시설의 분포지형과 그 의미
⑥맺음말 

[조선시대 제주 방어유적의 의미] ①머리말 /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1. 머리말

관방(關防)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방어시설을 만들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함을 말한다. 곧, 관방시설은 외적의 침입을 대비코자 설치하는 방어시설물을 일컫는 것이다. 이들 시설물은 성곽과 봉수 및 연대 등의 지상 시설물과 구지(溝池)와 참호 등의 지하 시설물로 대별해 볼 수 있다._#1 이들의 축조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지속적으로 이뤄져 왔었다. 이렇게 된 데는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충지라 잦은 외침을 받았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조선초기만 보더라도, 북방 야인과 남방 왜구가 항상 변경을 넘보며 침탈하곤 했기에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관방시설이 점차적으로 구축・정비돼 나아갔다.

제주와 같은 경우도 섬 지역임과 아울러, 한반도와 중국 대륙 및 일본 지역 등을 잇는 중간적 지점이고, 멀리 동남아 지역으로도 열려 있는 해상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자면, 제주 지역은 한반도의 서남단, 동중국해상에 위치해 전남 목포시와는 직선거리로 약 142㎞, 부산광역시와는 약 286㎞, 일본의 쓰시마(對馬島)와는 약 255㎞, 큐슈(九州) 와는 약 265㎞, 중국의 상하이(上海)와는 약 528㎞ 정도 떨어져 있다._#2 이를 제주 지역 중심으로 보자면, 동쪽으로는 일본의 큐슈 지방, 서쪽으로는 중국 대륙, 남쪽으로는 일본의 류큐 제도(琉球 諸島)와 타이완(臺灣) 및 필리핀 제도, 북쪽으로는 한반도와 마주하는 형국이다. 이로써 제주는 동아시아권을 잇는 바닷길의 요충지로서 주목돼 왔었다. 곧, 제주는 외부세력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한편, 외침에 노출되는 경우도 잦을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제주가 지닌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서는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주목됐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정부는 제주가 송(宋) 나라 상인들과 왜인(倭人)이 수시로 왕래하는 해외의 거진(巨鎭)이라는 점을 주목하고, 제주부사(濟州副使)가 방호사(防護使)도 겸하게 했던 것이다._#3 몽골제국이 원종 14년(1273)에 제주를 직할령으로 삼은 것도 이곳이 남송(南宋)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의 요충지라 주목한데서 비롯했다._#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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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와 그 주변 지역 분포도.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조선시대 때 왜구가 전라도-제주도-북구주를 잇는 해상권 장악을 위해 제주에 근거지를 마련코자 명종 10년(1555)에 을묘왜변을 일으켰다고 한다._#5 이 경우도 제주가 지닌 지정학적 위치와 관련해 일어난 일이었다.

현대사의 경우는 일본이 1935년 경 중・일전쟁기에 중국 본토를 공습하기 위해 제주의 남서쪽에 ‘알뜨르’ 비행장과 군사시설을 설치했던 일이 있었다. 이어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4년 이후에 와서는 미군의 본토 공격에 대비해 제주를 본토사수의 최후보루로 삼으려는, 곧 ‘결7호작전’에 따라 당시 제주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6만여 명의 일본군을 주둔시켰다. 또한 한라산 중허리를 돌아가는 군사도로, 이른바 ‘하치마키(鉢卷) 도로’의 개설과 군사용 땅굴 및 어뢰정 진지동굴 등과 같은 상당수의 군사시설도 구축했다. 미국도 1944년 필리핀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이후, 제주 지역을 폭격하기도 했듯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 차원에서 제주를 점령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_#6 이때의 일들도 전부 제주의 지정학적 위치를 주목한데서 비롯했다.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제주 해군기지 설치가 제주사회의 가장 큰 현안이 돼 왔었다. 해군기지 설립의 찬・반론자를 불문하고, 이들 양자는 모두가 제주의 지정학적 위치를 들고 자신의 논지를 펼치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우리나라의 영역 가운데 제주 서남부권의 해로가 남쪽 바다, 혹은 중국 대륙으로 나가는데 가장 기동성이 뛰어나다는 점이 작용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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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뜨르 비행장 전경.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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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2월 26일 열린 제주해군기지 준공식 현장 모습. 제주사회 대표적 갈등사례가 된 제주해군기지가 위치한 강정항은 제주 서남부권에 위치해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역사는 제주가 지닌 지정학적 위치와 결부해 격변을 겪었거나, 혹은 군사적 시설물도 들어섰던 점이 여느 지역과 크게 차이가 나는 사실일 듯싶다. 이들 예로는 제주 지역이 조선시대 들어와 상당수의 관방시설을 갖춰 나아갔던 사실도 들 수 있다.

제주의 관방시설은 고려시대부터 설치됐음이 확인되나, 그것의 본격화는 조선시대 이후에 들어와 시작됐다. 조선시대 이후 제주의 관방시설은 다양・다기하거니와, 그 분포상이 제주도내 전 지역에 걸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이들에 대해서는 유형과 설치과정 및 그 변화상과 함께, 소재지와 그 지형적 특성 및 유적 관련 고고학적 접근의 연구가 이뤄진 적은 있었다._#7 그럼에도, 이들 연구는 조선시대 제주의 관방시설을 군사적 방어시설로 보는 데만 초점을 맞춰 논의가 행해진 것 같다.

이에 본고는 고려시대 관방시설의 설치와 아울러, 조선시대 관방시설이 제주 지역에 설치되는 경위와 그 유형 및 분포양상을 살펴보고, 이어 이들 관방시설이 지닌 의미를 종합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곧, 조선시대 제주의 관방시설은 군사적 방어시설의 의미뿐만 아니고, 국가의 제주 관할 및 제주의 지리적 정체성과 그에 따른 제주 주민의 삶과도 밀접하게 결부된 존재였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각주
#1
차용걸, 1980, 〈조선전기 관방시설의 정비과정〉, 《한국사론》 7, 국사편찬위원회, 88쪽

#2
정광중, 2004, 〈제주지방-과거와 현재〉, 《한국지리지-전라・제주편》, 국토지리정보원, 525쪽.

#3
《고려사》 권 25, 세가, 원종 원년 2월 경자.

#4
김일우, 2000, 《고려시대 탐라사 연구》, 신서원, 259~385쪽 ; 2008, 〈고려・조선시대 외부세력의 제주진입과 제주여성〉, 《한국사학보》 32, 153~159쪽. 

#5
김동전, 2006, 〈왜구의 침입과 방어시설〉, 《제주도지》 2, 제주특별자치도, 387쪽.

#6
제민일보 4・3취재반, 1994, 《4・3은 말한다》 1, 전예원, 25~42쪽.

#7
제주도, 1996, 《제주의 방어유적》, 제주도 ; 김명철, 2000, 〈조선시대 제주도 관방시설의 연구-읍성・진성과 봉수・연대를 중심으로-〉,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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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의 대표 논저

2000, 《고려시대 탐라사연구》, 신서원
2002, 〈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중창과 그 위상〉, 《한국사연구》 119 .
2003, 〈고려후기 제주・몽골의 만남과 제주사회의 화〉,《한국사학보》 15.
2007, 〈고려시대와 조선초기 제주도 지역의 행정단위 변천〉, 《한국중세사연구》 23. 
2015, 〈제주 항몽유적의 역사성과 문화콘텐츠화 방안〉, 《몽골학》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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