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다. 동아시아 해상의 요충지로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다. 이러한 천혜의 입지는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제주를 지켜온 관방시설(방어시설)은 고려시대부터 설치돼온 환해장성(環海長城)과 조선시대의 읍성(邑城)・진성(鎭城)・봉수(烽燧)・연대(煙臺) 등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역사학자인 김일우 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는 이러한 제주의 관방시설에 주목한 논문 《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와 분포양상》을 최근 발표했다. 김 박사는 연대, 봉수 같은 관방시설에는 군사적 가치를 넘어 제주사람의 자생적 의지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제주의소리>가 제주 관방시설에 주목한 김 박사의 글을 매주 2회(화·목), 총 6차례 연재한다. 본문에 '#' 표시된 각주 내용은 원고 하단에 별도의 설명을 달았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머리말
②제주 지역 첫 확인의 관방시설
③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④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이외
⑤제주 관방시설의 분포지형과 그 의미
⑥맺음말 

[조선시대 제주 방어유적의 의미] ③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3. 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초창기부터 중앙집권적 체제정비가 이뤄져 나아갔다. 이와 함께, 방어체제가 강화됐고, 그 일환으로 관방시설도 체계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읍성은 행정적인 기능과 동시에 관방시설의 기능도 띠고 있었다. 이는 세종대(1419~1450)에 이르러 읍성의 축조가 왜구의 피해가 많았던 충남・전라・경상도의 下三道(하삼도)부터 중점적으로 추진됐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_#16 제주 지역의 읍성도 행정적인 기능과 함께, 왜구 침입에 대비하는 등 군사적인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주 지역은 태종 16년(1416) 濟州都按撫使(제주도안무사) 吳湜(오식)과 前判官(전판관) 張合(장합)의 건의에 따라 동쪽의 신촌・함덕・김녕현과 아울러, 서쪽의 귀일・고내・애월・곽지・귀덕・명월현은 大村縣(대촌현)을 본읍으로 삼은 제주목에 속하게 했다. 또한 동쪽은 旌義縣(정의현)을 본읍으로 설정하여 현감을 파견한 다음, 토산・호아・홍로현 지역을 소속시키고, 서쪽의 경우는 大靜縣(대정현)을 본읍으로 삼아 현감을 둔 뒤, 예래・차귀・산방현 지역을 소속시키는 개편이 이뤄졌다. 또한 고려시대 때 설치・운영의 15개 현은 각각 삼읍의 하부단위에 해당하는 直村(직촌)으로 편제됐다. 이로부터 제주 지역은 1목・2현으로의 분할이 이루어져 삼읍의 행정체체가 비롯됐고, 3곳 읍성이 존재하기에 이르렀다._#17

제주목의 경우는 제주성이 읍성이자 읍치였다. 제주성으로 둘러싸여진 곳은 현재 제주시의 일도 ・이도 ・삼도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이곳으로부터 제주목의 관내는 시기에 따라 다소 달라졌지만, 동쪽으로는 80여리 떨어진 현재의 구좌읍 종달리, 서쪽으로는 81여 리 떨어진 한경면 두모리, 남쪽으로는 70여 리 이내의 성산읍 수산2리 일대 이전 지역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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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성 둘레와 범위.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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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성의 잔존 성담.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제주성의 축조는 태조 8년(1418) 이전에 이뤄졌던 것 같다._#18 이후 제주읍성은 성내에 우물이 없음으로 남쪽 ‘가락큿물’에 별도의 重城(중성)을 축조하는 한편, 동쪽으로 성을 확장하여 성안으로 ‘가락천’과 ‘산지천’을 끌어 당겨 물 문제를 해결하는 등 여러 차례 정비가 이루어져 나아갔다._#19 현 보존・정비의 성곽은 오현단 남측 경계석 170m 정도, 외벽 높이 3.6~4.3m, 내벽 높이 5.3~6.9m이라 한다._#20

대정현의 경우는 제주의 서남부 일대를 관내로 거느렸다. 읍치이자, 읍성으로 둘러싸였던 곳은 현재의 서귀포시 대정읍 관내 인성・안성・보성리 일대에 걸친 지역이었다. 읍성, 즉 대정현성의 축조는 대정현이 설치돼 2년이 지난 태종 18년(1418) 대정현감 兪信(유신)의 지휘 하에 이뤄졌다._#21 대정현의 관내는 시기에 따라 다소 달라졌지만, 동쪽으로는 서귀포시 강정동, 서쪽으로는 한경면 고산리, 남쪽으로는 안덕면 창천・서광리 일대 지역까지 미쳤다. 현 성곽의 보존 상태는 대부분 원형이 잔존하고 있다. 장방형으로 둘레 약 1,260m, 북측 성벽은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거니와, 그 규모는 외벽・내벽 높이와 폭이 각각 2.8~3.7m・2.7~3.6m・2.7~3.1m로 조사됐다._#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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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정성지(항공촬영).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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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정성지 동쪽 성담.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정의현은 관내가 제주도 동남부에 걸친 지역이었다. 관내의 지역적 범위는 시기에 따라 다소 달라졌지만, 동쪽으로는 서귀포시 법환동, 서쪽으로는 성산읍 시흥리, 남쪽으로는 현 성산읍 수산리와 남원읍 수망리 및 서귀포시 호근동을 잇는 지역까지 이르렀다._#23 애초 정의현이 설치될 때 그 관아가 들어선 읍치이자 읍성으로 둘러싸여졌던 곳은 현재의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일대였다. 이곳은 정의현의 동쪽에 치우쳤다. 이 때문에 정의현이 설치된 다음해부터, 중앙정부에서는 전라도 도관찰사가 정의현감 李貽(이이)의 보고에 근거해, 읍치가 관할 영역의 각 지역과 너무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문제점을 논의하기 시작했다._#24

즉, 정의현 관내 각 지역의 주민이 행정업무 처리 차 읍치를 오고가는데 거리가 너무나 멀기 때문에 많은 폐단이 야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정의현의 읍치를 옮기기로 결정 내렸다. 혹은 고성리의 읍치가 우도와 가까이 위치해 새벽과 밤에 鼓角(고각) 소리가 들리고, 태풍이 자주 불어 흉년이 들며, 왜적의 침입이 잦은 탓에 옮기기로 했다는 내용도 전해지고 있다._#25 조정에서는 정의현의 읍치를 옮길 후보지로 여러 곳을 논의하다가, 세종 4년(1422) 12월 현장을 돌아본 都按撫使(도안무사) 鄭幹( 정간)의 건의에 따라 정의현의 읍치를 晉舍里(진사리), 즉 지금의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고성리 지역의 읍성, 곧 첫 정의현성은 고려시대 때부터 고성리 지역에 쌓여져 있었던 성, 다시 말하자면, 정의현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고성리 지역에 존재했던 성이 정의현의 읍성으로 활용됐다는 구전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고성리 지역의 정의현성은 축성 형태를 볼 때 고려시대 때 축성됐다고 보는 연구자의 논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고성리 지역의 정의현성은 제주 지역의 삼읍 구획과 함께 축성됐고, 그 지역은 몽골족 牧者(목자)가 濟州萬戶(제주만호)를 살해했던 곳이며, 후에 성읍리 지역에 새로이 들어선 정의현성에서 동쪽으로 27리, 혹은 30리 거리에 해당한다는 등의 사실이 각종 사서에서 확인되고 있다._#26 이로 볼 때 첫 정의현성, 오늘날에 와서는 ‘古旌義縣城(고정의현성)’으로도 일컫는 고성리 지역의 정의현성은 정의현이 생겨난 태종 16년(1416) 이후에 축성됐다고 봄이 타당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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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현성 일대(공중촬영).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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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현성의 남문(보수 정비)쪽과 돌하르방.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하여튼, 읍치 지역은 거개가 읍성을 쌓게 된다. 정의현의 경우도 읍치가 옮아간 진사리 지역에 정의현성, 일명 ‘晉舍城(진사성)’으로도 일컬어졌던 읍성이 세워졌다. 정의현성의 축조는 세종 5년(1423) 1월 9일부터 시작해 1월 13일까지 5일 만에 끝났음과 아울러, 그 공정이 매우 신속했다는 기록도 확인된다._#27 읍성 규모는 동서 160m・남북 140m・둘레 약 1,200m에 달한다. 현재 성곽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성벽 높이는 외벽과 내벽이 각각 3.1~3.6m와 2.5m에 달한다고 한다._#28


▲각주
#16
심정보, 1995, 《한국 읍성의 연구》, 학연문화사, 62쪽. 

#17
김일우, 2007, <고려시대와 조선초기 제주도 지역의 행정단위 변천>, 《한국중세사연구》 23, 308~314쪽.

#18
《태종실록》 권16, 태종 8년 9월 갑오.

#19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제주목, 성곽・산촌.

#20
제주도, 1996, 앞의 책, 29~41쪽.

#21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대정현, 성곽.

#22
제주도, 1996, 앞의 책, 55~64쪽.

#23
김일우, 2007, 앞의 논문, 311~312쪽.

#24
《태종실록》 권33, 태종 17년 5월 갑진. 

#25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정의현 고적 ; 이원진, 《탐라지》(1653년 편찬), 고적 ; 《제주읍지》(1780년대 편찬) 수록 「정의현지」, 고적 ; 《정의읍지》(1899년경 편찬), 고적.

#26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정의현 고적 ; 이원진, 《탐라지》, 고적 ; 《제주읍지》 수록 「정의현지」, 고적 ; 《정의읍지》 고적.

#27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정의현, 성곽.

#28
제주도, 1996, 앞의 책, 4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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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의 대표 논저

2000, 《고려시대 탐라사연구》, 신서원
2002, 〈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중창과 그 위상〉, 《한국사연구》 119 .
2003, 〈고려후기 제주・몽골의 만남과 제주사회의 화〉,《한국사학보》 15.
2007, 〈고려시대와 조선초기 제주도 지역의 행정단위 변천〉, 《한국중세사연구》 23. 
2015, 〈제주 항몽유적의 역사성과 문화콘텐츠화 방안〉, 《몽골학》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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