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다. 동아시아 해상의 요충지로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다. 이러한 천혜의 입지는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제주를 지켜온 관방시설(방어시설)은 고려시대부터 설치돼온 환해장성(環海長城)과 조선시대의 읍성(邑城)・진성(鎭城)・봉수(烽燧)・연대(煙臺) 등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역사학자인 김일우 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는 이러한 제주의 관방시설에 주목한 논문 《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와 분포양상》을 최근 발표했다. 김 박사는 연대, 봉수 같은 관방시설에는 군사적 가치를 넘어 제주사람의 자생적 의지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제주의소리>가 제주 관방시설에 주목한 김 박사의 글을 매주 2회(화·목), 총 6차례 연재한다. 본문에 '#' 표시된 각주 내용은 원고 하단에 별도의 설명을 달았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머리말
②제주 지역 첫 확인의 관방시설
③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④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이외
⑤제주 관방시설의 분포지형과 그 의미
⑥맺음말 

[조선시대 제주 방어유적의 의미] ④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이외
/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4. 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이외

다음에는 읍성 이외 관방시설의 설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제주 지역도 고려말부터 왜구의 침탈이 잦았고, 그 규모도 점차 커져 나아갔던 만큼, 조선초기에 와서는 관방시설이 체계적으로 정비·축조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 제주 관방시설에 대해서는 세종 21년(1439) 제주도안무사 韓承舜(한승순)이 올린 다음의 장계에 잘 드러나고 있다._#28

제주 도안무사 한승순이 아뢰기를, "의정부가 내린 명령에, ‘본주(제주)가 평화를 누린 지 오래 돼 수비·방어의 계책에 혹 소루함이 있을까 해 신에게 봉화와 척후하고 망보는 것을 삼가게 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방수하라’했으며, 또 ‘왜선의 정박할 요해처와 수비·방어하는 조건을 옛 늙은이에게 물어서 조처하고 아뢰라’ 했기에, 삼가 수비·방어의 조건을 알리고자 합니다.

- 도내에 군인이 주둔한 곳은 본주 동쪽은 김녕·조천관, 서쪽은 도근천·애월·명월, 대정현 서쪽은 遮歸(차귀), 동쪽은 東海(동해), 정의현 서쪽은 서귀, 동쪽은 수산이옵니다. 모두 왜구가 배를 댈 수 있는 요해처인리자, 이전에는 다 방호소를 뒀습니다.(중략) 이들 방호소 외에 왜선이 정박할만해 염려되는 곳이 김녕으로부터 조천관에 이르기까지 18여 리 내에는 3곳이 있고, 조천관으로부터 읍성 제주성에 이르기까지 30여 리 내에는 7곳이 있으며, 동해로부터 서귀까지 20여 리 내에는 3곳이고, 서귀에서 정의에 이르기까지의 60여 리 내에는 3곳이며, 수산에서 김녕까지 40여 리 내에는 5곳이옵니다. 公私(공사)의 노예와 각 소속의 正軍(정군)・奉足(봉족) 등 雜色軍人(잡색군인)을 그 다소에 따라 매 1처마다 혹 5~60명 혹은 1백여 명을 나눠 정해 번을 갈라서 수비·방어케 함이 편하겠습니다.

- 봉화와 척후하고 망보는 것은 제주목의 동쪽 김녕에서 서쪽 板浦(판포)까지 10곳, 대정현 서쪽 차귀에서 동쪽 居玉(거옥)까지 5처, 정의현 서쪽에서 북쪽 只末山(지말산)까지 7처이옵니다. 봉화가 있는 곳마다 5인씩 나누어 정했고, 또한 煙臺(연대)를 쌓았는데 높이와 나비가 각각 10척입니다.(하략)

-옛 늙은이에게 물어 보오니, 다 말하기를, ‘정의현 동쪽 牛峯(우봉)과 대정현 서쪽 竹島(죽도)는 옛적부터 왜선이 숨어 정박할 정도로 가장 요해의 땅이 되어왔었는데, 牛島(우도)의 인근에 있는 水山(수산)과 죽도의 인근에 있는 西歸防護所(서귀방호소)_#29에는 모두 성곽이 없사옵니다. 만일 왜적이 밤을 타 돌입해오면 군사가 의지할 곳이 없사와 적에 대응할 형편이 어려우니, 형편을 요량해 성을 쌓게 하시고 적의 변고에 대응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하략)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한승순의 장계에 의하면, 세종 21년(1439) 이전부터 제주목은 김녕·조천관·도근천·애월·명월 5곳, 대정현의 경우는 차귀와 동해 2곳, 정의현도 서귀와 수산 2곳에 이미 방호소가 설치돼 왜구 침입에 대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봉수가 제주목 10곳, 대정현 5곳, 정의현 7곳으로 도합 22곳이며, 각 봉수마다 봉화군이 5명씩 배치됐던 한편, 높이와 넓이가 각각 10척의 연대도 설치돼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들 가운데 봉수는 횃불(烽)과 연기(燧)로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였다. 즉, 봉수는 높은 산이나 해안구릉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군사적 위협 등의 사실을 신호했던 시설인 것이다. 이들 봉수가 제주 지역에서는 대체적으로 오름, 곧 기생화산의 정상부에 설치됐다. 이들의 설치지역을 보자면, 현재 확인되는 25곳 봉수 가운데 22곳이 해발 200m 이하의 해안지대, 3곳 봉수, 곧 만조·호산·자배봉수가 200m 이상의 중산간지대에 해당한다._#31

제주 연대의 경우도 봉수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군사통신시설이기는 하나, 그 소재지가 봉수와는 달리, 해안가이고, 그것도 대부분 구릉지대이다. 현재 확인되는 36곳 연대와 해안과의 거리는 200m 미만이 72%이고, 가장 먼 것이 550m 정도의 말등포연대이다._#32 이들은 적국의 배가 어떤 곳에 와서 정박하는가와 이후 동향 등을 자세히 관찰함과 아울러, 그 동정을 다른 지역에도 알리는 군사통신시설이었다. 이를 위해 내부에는 통신을 위해 불을 지필 수 있는 시설물도 갖추고 있었다. 곧, 제주의 연대는 소재지가 봉수와 다를 뿐이고, 해안 변경인 최전방에 위치해 연변봉수의 기능을 수행한 관방시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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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소포연대.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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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도연대.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특히, 한승순의 장계에는 방호소 가운데 가장 요해처가 됐던 수산방호소와 차귀방호소에 대한 축성 건의가 이뤄졌거니와, 그 허락이 내려졌음도 확인된다.

조선시대 진성은 鎭(진) 단위로 설치됐다. 이들 진은 군사적 기능 등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설치·운영된 성곽도시, 또는 행정구역의 성격을 지녔었다. 애초, 진은 신라말기 상업상 필요에 설치됐는데, 고려시대 들어와 무장 성곽도시, 또는 지방행정구역으로 존재했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순수한 군사적 거점의 성격으로 축소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_#33 조선시대의 진과 같은 경우, 제주 지역에서는 방호소와 서로 혼용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읍지류와 제주 지방 관련 문서에는 진으로 표기돼 있으나, 중앙정부 포상과 징계 등을 알리는 문서에는 반드시 방호소로 나온다고 이해하기도 한다._#34 그럼에도, 《濟州啓錄(제주계록)》에는 혼용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는 만큼, 제주에서 진과 방호소라는 용어가 각각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더욱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여튼, 제주 지역의 방호소가 진을 뜻했듯이, 제주의 경우도 세종 21년(1439) 무렵에 이미 鎭城(진성)이 축성됐거니와, 그것이 수산진성과 차귀진성이란 사실을 한승순의 장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수산진성은 설치 지역의 여건과 관련해 계속적으로 논란이 일었던 곳이기도 하다.

한승순의 장계에 의하면, 수산진성은 수산 지역이 우도 인근으로 왜선이 몰래 정박할 수 있는 요해처이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방호소가 설치됐으나, 성곽이 없어 방어하기 곤란한 까닭에 축성이 이뤄졌다고 한다. 

애초 수산진성은 고려 충렬왕 때 몽골이 제주에 ‘다루가치’(達魯花赤)’로 보낸 ‘타라치’(塔刺赤)가 말 등을 싣고 와 방목했던 수산평 지역에 자리잡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주목사 李慶祿(이경록)이 城山(성산)을 천연의 요새로 여기고, 선조 30년(1597)에 방호소를 성산 일출봉 밑으로 옮김에 따라 수산진은 폐해졌다._#35 이때 성산진성의 규모는 둘레가 2000자, 높이가 9자이고, 성내에 우물이 없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제주목사 成允文(성윤문)이 성산의 진을 폐한 뒤 다시 수산 지역에 진을 두었고, 숙종 31년(1705)에는 鎭將(진장)이 萬戶(만호)로 승격됐으나, 곧 다음해에 다시 助防將(조방장)으로 환원되고 말았다._#36 한편 제주목사 이경록이 행했던 성산진성으로의 이전은 훗날에 와 최하의 계략으로 평가받기도 한다._#37

숙종 4년(1678)에는 御史(어사) 李度遠(이도원)이 “수산은 바닷가로부터 10리나 떨어져 있어서 방어하기가 곤란하니 성산·吾照(오조)·固城(고성)으로 옮길 것을 청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한다._#38 이뿐만 아니고, 수산진성의 위치가 적당치 않다는 점은 자주 논의됐다. 정조 5년(1781) 濟州巡撫御史(제주순무어사)로 왔었던 朴天衡(박천형)의 書啓(서계)에서도, “수산방호소는 정의현의 동쪽 20리에 있는데, 동쪽으로 바다와 떨어진 것이 10리이고, 산으로 막혀 바다를 볼 수 없는 곳이다. 들 가운데 있어 원래 요충지가 아니다. 포구가 좁고, 더욱이 배를 댈 곳이 없다. 성을 쌓고 진을 설치하는데 단지 민폐를 끼치고 의의가 없다. 또한 차귀진과 더불어 통상 종전에 왔었던 어사도 혁파의 논의가 많았으나, 아직도 결정짓지 못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_#39

수산 지역은 다른 진성이 설치된 지역과 비교해 볼 때,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성으로 보기에는 너무 내륙으로 치우쳐 있고, 군사적 요충지로도 볼 수 없다는 점이 자주 지적됐음에도, 수산진성은 계속 유지됐다. 또한 수산진성의 축조방식과 평면형태 등이 대정성·정의성과 같은 읍성과 유사하다고 한다._#40 이로 볼 때, 수산진성은 군사적 기능 이외에 읍성의 기능, 곧 읍치의 행정적 관할을 보좌하는 역할도 행할 것을 기대해 축성됐고, 그 때문에 계속 유지된 점도 있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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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산봉수터 정상부.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세종 25년(1443)에 이르러서는 제주 안무사가 수산·차귀방호소에 이어, 김녕·명월·서귀방호소에도 축성할 것을 조정에 건의했다._#41 그러나 정부에서는 논의를 거친 뒤, 성곽의 축조를 후일로 미뤘다._#42

이후에도 제주 관방시설의 증축과 축성의 문제가 계속 제기됐다.

중종 5년(1510)에는 도내에 왜구 침입이 예상되는 60포구 가운데 9개소 방호소는 부족함으로, 김녕포 등의 7개 포구에 權管(권관, 진의 종9품 무관)을 둬 조방장으로 하자는 건의가 이뤄졌다._#43 진성 축조의 경우에는 수산·차귀방호소가 세종 21년(1439) 한승순의 건의가 계기가 돼 축성이 생긴 뒤, 중종 5년에 수축됐고, 나머지 7개 방호소의 축성도 진행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_#44 그러나 정부에서는 한꺼번에 7개 방호소 축성에 나섬은 무리이니, 순차적으로 축성토록 했다._#45 그리고 제주 해안에는 연대가 증설됨에 따라 군사의 수가 부족하게 됐다._#46 이로부터 여성도 성곽에 나아가 보초를 서게 되지 않았을까 한다._#47 곧, 제주어로 '예청'이라 일컫는 女丁(여정)의 존재가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하겠다. 

한편, 중종 25년(1530) 이전 시기부터는 제주목 관내의 김녕방호소가 別防防護所(별방방호소)로 이전됐고, 정의현 관내의 吾召浦(오소포), 대정현 관내의 塞浦(색포)·毛瑟浦(모슬포)·犯叱浦(범질포)에 방호소가 증설됨으로서 도내의 방호소는 13곳으로 늘어났다. 水戰所(수전소)는 제주목 7곳, 정의현 2곳, 대정현 4곳으로 모두 13개소에 이르렀다. 또한 봉수는 제주목 8곳, 정의현 10곳, 대정현 5곳으로서 모두 23곳이 정비됐다. 

이와 함께, 차귀·수산방호소 외에 명월·별방·서귀·동해방호소에도 성곽이 축조됐다._#48 이들 가운데 명월진성은 18세기 후반에 와, 獨浦(독포)가 명월진 3리 앞 포구로서 어선이나 상선이 와서 정박하는 경우가 꽤 빈번해졌고, 토지도 비옥하며, 해산물도 풍부해 제주의 진 가운데 으뜸이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성지가 광활하고 백성들이 부유하며 샘물과 창고도 있어서 충분히 자급할 수 있는 곳이라고도 했다._#49 곧, 명월진성은 18세기 후반 이전부터 도심지적 기능을 충분히 기대·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시기적 추세로 봐, 제주 관방시설은 중종대(1506~1539)에 와 크게 확충됐던 것이다. 이로부터 제주 지역은 왜구 침입에 대한 방비시설을 대체적으로 갖췄다고 하겠다. 이후에도 제주의 관방시설은 임진왜란를 겪고 난 후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왜구 침입에 대비해 지속적으로 정비・증설됐다. 특히 숙종 3년(1677)에 동해진성이 철폐돼 모슬진성으로 이전됐고, 다음해에는 禾北鎭城(화북진성)도 축조됐다.

화북진성 자리는 조선초기부터 화북수전소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화북수전소가 명종 10년(1556) 왜구 침입으로 무너진 뒤, 제주성의 방어능력을 높이고자, 화북진이 설치됐다. 진성은 여러 차례 논의된 끝에 숙종 4년(1678) 제주목사 崔寬(최관), 혹은 尹昌亨(윤창형)에 의해 축조되기에 이르렀다._#50 제주의 9진성 가운데 가장 나중에 축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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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북진지 성담.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특히, 화북진성의 경우는 치성이나 옹성 같은 돌출부가 없이 축성된 것으로 본다. 또한 위치가 여느 제주 진성에 비해 제주읍성과 매우 가까운 한편, 조선시대 때 제주 주민의 한반도 육지부 나들이에 이용이 가능한 2곳의 공식적 관문 가운데 하나, 곧 화북포구를 관리할 수 있도록 포구와 바짝 붙어 축조됐다. 이들 형상은 화북진성이 전투용의 성이라기보다는 방어와 행정을 펴는데 편의를 꾀하고자 축조된 성이라고 판단케 한다고 본다._#51

조선시대 제주의 관방시설은 18세기 후반기에 와 체계적으로 정비돼 완성단계를 맞이했다. 이는 1780년대 편찬 추정의 《제주읍지》에서 확인된다. 이를 통해 보자면, 제주 지역의 관방시설은 3개 읍성과 9개 진성, 25개소 봉수와 38개소 연대가 설치됐음이 드러난다. 이들의 분포도를 1872년 제작 <濟州三邑全圖(제주삼읍전도)>라 일컫는 제주의 옛 지도에 수록하면 다음의 <그림 1>과 같다. 또한 제주의 관방시설 가운데 3개 읍성·9개 진성·25곳 봉수·38곳 연대에 대한 일람을 각각 정리해 보면 다음의 <표 2·3·4·5-1·5-2>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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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삼읍전도> 표기의 관방시설분포도. 제공=제주문화유산연구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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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28
제주도, 1996, 앞의 책, 42~54쪽.

#29
《世宗實錄》 권84, 세종 21년 閏2월 임오.

#30
죽도는 현 차귀도를 말하거니와, 조선시대 때 여기에는 遮歸防護所(차귀방호소)가 설치됐다. 이에 '西歸'의 '西' 자는 ‘遮’ 자의 오기일 것이다(김명철, 2000, 앞의 논문, 9쪽). 그래서 이후부터는 차귀방호소라 한다. 

#31
김명철, 2000, 앞의 논문, 79~80쪽.

#32
김명철, 2000, 앞의 논문, 80쪽.

#33
김남규, 1991, '鎭(진)' 항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95쪽.

#34
김상옥, 1997, 「조선후기 제주지방의 군사제도」, 《19세기 제주사회 연구》, 일지사, 67쪽.

#35
金尙憲(김상헌), 《南槎錄(남사록)》, 10월 13일 정축.

#36
《耽羅志草本(탐라지초본)》 권4, 旌義縣(정의현), 鎭堡(진보).

#37
김상헌, 《남사록》, 10월 13일 정축.

#38
《탐라지초본》 권4, 정의현 진보. 

#39
 「제주순무어사서계」〔《書啓輯錄(서계집록)》 권4, 규장각 소장, 奎(규) 15083〕. 「제주순무어사서계」 원문의 전문이 《제주도사연구》 8(고창석, 1999, 「<자료소개> 제주순무어사서계 박천형의 서계」, 88~210쪽)에 실려 있다. 본고의 「제주순무어사서계」에 대한 내용 검토도 《제주도사연구》 8에 실린 자료에 근거했다.

#40
제주도, 1996, 앞의 책, 122쪽.

#41
《세종실록》 권99, 세종 25년 정월 병인. 

#42
《세종실록》 권100, 세종 25년 5월 임오.

#43
《중종실록》 권11, 중종 5년 7월 갑자.

#44
《중종실록》 권12, 중종 5년 9월 기사.

#45
《중종실록》 권12, 중종 5년 9월 임신・계유.

#46
《중종실록》 권12, 중종 5년 9월 기사.

#47
김일우, 2008, 앞의 논문, 162~164쪽.

#48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제주목・정의현・대정현, 관방.

#49
「제주순무어사서계」(《서계집록》 권4, 규장각 소장, 규 15083) 

#50
현재 화북진성의 문화재 안내판에는 수축자가 최관으로 기록돼 있으나, 근래 들어와 화북진성의 수축자는 최관 직전 제주목사로 재직했던 윤창형으로 봐야 한다는 논의가 이뤄졌다(제주시・제주문화예술재단, 2011, 「도지정기념물 화북진성 복원계획 및 주변 문화유산 활용계획 수립 보고서」, 55~56쪽). 그럼에도, 화북진성의 수축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졌다고는 볼 수 없는 편이다.

#51
제주시・제주문화예술재단, 2011, 앞의 보고서,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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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의 대표 논저

2000, 《고려시대 탐라사연구》, 신서원
2002, 〈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중창과 그 위상〉, 《한국사연구》 119 .
2003, 〈고려후기 제주・몽골의 만남과 제주사회의 화〉,《한국사학보》 15.
2007, 〈고려시대와 조선초기 제주도 지역의 행정단위 변천〉, 《한국중세사연구》 23. 
2015, 〈제주 항몽유적의 역사성과 문화콘텐츠화 방안〉, 《몽골학》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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