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평 돌문화공원 진두지휘한 백운철 원장
"설문대할망의 가르침…故 신철주 군수님 생각이 납니다"

▲ 제주돌문화공원 총괄기획을 맡은 백운철 탐라목석원 원장.
30만평의 넓은 공원에서 그를 찾았을 때 어딘가 먼 발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만 6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혼(魂)'을 불사르며 지켰던 제주돌문화공원 역사(役事)현장. 개장을 하루 앞둔 2일 오후에 그는 여전히 뒷마무리가 한창인 '역사(歷史)의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돌아가신 신 군수님 생각만 납니다". 그가 맨 먼저 말문을 열며 올린 이는 고인이었다.

"전임자를 너무 쉽게 잊는 것 같아 안타까워...칭송 문화 이어져야"

"전임자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런 분을 칭송해야 앞으로도 일을 잘 한 이들에 대한 칭송 문화가 이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생각해보면 바로 엊그제 같다. 북제주군과 탐라목석원 백운철 원장(62)간에 체결한 각종 돌 자원과 민속자료 1만2000점을 무상기증한다는 협약을 체결한 이후 대역사는 시작됐다.

"제주의 정체성, 향토성, 예술성을 3위 일체로 삼아 진행해 왔어요. 이는 진.선.미 처럼 어느 것 하나 빼 놓을 수 없지요. 예술성만 있다고 향토성을 보장하진 못하죠."

그에게 주어진 명함은 '총괄기획'. 한마디로 '모든 것'을 맡았다. 처음 공원 구상에서부터 기본설계까지. 이 역시 스스로 자청해서 받은 직함이다.

그가 직접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공원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정도로 까다롭고 버거운 일이었다. 이순(耳順)을 넘긴 그의 눈빛은 둥그런 안경너머로 반짝거렸다.

▲ 뒤로 백 원장이 직접 쓴 '제주돌문화공원' 붓글씨가 보인다. 이는 공원입구 표석제자로 쓰였다.

그의 방안에 들어서자 자신이 직접 쓴 '제주돌문화공원'이란 큼직한 붓글씨와 함께 '환경, 환경, 환경을 먼저 생각하는 돌문화공원'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역사(役事)기간 내내 그가 무엇보다 신경을 썼던 대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모자를 벗으니 특유의 허연 백발이 휘날렸다. "일단 문을 열게 됐으니, 이제는 집에서 출퇴근할 생각입니다."

"7년의 시간 어떻게 지났는지 몰라...환갑요? 그냥 흘러갔어요'

7년의 시간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른다. 환갑도 이 곳에서 보냈다. 사실 보낸 것도 없었다. 흘러갔을 뿐이다. 여기서 자고 지내며 자나깨나 공원만을 생각했다. 하나에서 열까지 그의 손을 거지치 않은 것이 없었다. 인간사(史)가 그렇듯 현장에서 보지 않으면 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당연한지 모른다. 어쩌면 '작업반장'이 차라리 어울린다.

"공사에 들어가기 3년전 부터 이 곳 현장을 찾으며 소가 다녔던 길을 헤집고 다녔어요. 무엇보다 밑그림이 중요했지요...그 때 기획을 잘 못잡았으면 지금은 혼란이 올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는 지금도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마치 리모컨으로 누군가 자신을 조종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아마 30~40년 동안 혼자 짝사랑해 온 설문대할망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말만 설문대할망일런지 몰라도 누군가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 만큼은 사실입니다."

그는 지난 5월 15일 설문대할망을 모시고 제의를 지냈다. 오백장군이 죽어서 피눈물을 흘렸다는, 붉은 철쭉꽃이 피는 5월을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2004년 도법스님이 평화탁발순례를 떠나 이 곳에 도착한 것도 5월 15일이다. 이번 제례때도 도법스님은 다시 내려왔다.

"5월 15일은 오백장군이 피눈물을 흘린날...'설문대할망 테마축제'를 열자"

"5월 15일을 기점으로 설문대할망을 테마로 한 조각, 연극, 미술 등을 내용으로 한 축제를 열어야 합니다. 신 군수님이 돌아가신 6월 20일까지 고인을 기념해 한달간을 축제기간으로 잡아도 좋을 것 같구요."

도법스님이 15일에 이 곳을 찾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고 그는 말한다. 역학을 보는 이들에게서까지 목석원 동쪽에 큰 공원이 조성될 것이란 말을 98년쯤에 들었던 터였다. 이 곳에 때깔좋은 초지조성과 함께 목장들이 들어선 것도 돌문화 공원을 위해 이미 터전을 닦아 준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고인의 공로도 함께 떠올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그는 "물욕이 있었으면 당초 되지 않았던 일"이라며 '모든게 맞아 떨어졌다'고 강조했다.

▲ 세계 최고의 돌문화공원을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온 길이었다.
"보통 관에서 용역을 주는게 상식입니다. 하지만 자연환경과 기획, 디자인 등은 용역 설계로만 되는게 아닙니다. 철저히 직영사업 체제방식이 뒷받침해 이뤄진 결과죠."

흔히 공원을 조성할 때 기본적으로 평당 100만원이 들어간다. 그 계산대로라면 1단계 12만평에 1200억원이 들어가는 공사. 하지만 쓴 돈은 400억원이다. 1000억원대에 이른 4.3평화공원과 비교할 때 단연 돋보이는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신 군수 못지 않게 문병혁 계장의 참신하고 청렴한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그는 말한다.

한림읍 건설계장에서 차출된 문 계장은 신 군수로 부터 남몰래 세번의 격려금을 받았다. 하지만 그 돈은 바로 일꾼들에게 점심을 사고 일을 추진하는데 들어갔다.

여기엔 30년 동안 모아놓은 자료가 있었고 설치, 디자인까지 직접 백 원장이 챙겼다. 문 계장은 인부를 챙기고 행정적인 뒷받침을 했다. 나무 하나 돌 하나를 버리지 않고 살리면서 건물, 주차장 등을 제외하곤 토목 공사비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지난해 행자부의 감사관이 왔다가 감사는 하지 못하고, '희귀 사례'를 상부에 보고하는 경우를 겪었다. 조사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모범사례 대상이라는 것이다. '민.관이 순수하게 협약대로 이뤄진 최초의 사업'이라는 자부심을 가질만도 하다.

"사실 너무 아름다운 곳이어서 손 대기가 어려울 정도였어요. 자연과 돌, 오름, 수석, 두상(석), 화산탄 등 이처럼 주변 환경이 어우러진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합니다. 이는 전 세계 지질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예요."

수석관으로 이름을 붙이다가 '암석지질관'으로 컨셉을 바꾼 것도 대역사 중에 만난 제주화산연구소가 학술적 연구로 뒷받침하며 도와준 덕이다.

▲ 그는 "신 군수를 비롯한 공무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 덕분"이라고 말했다.

"신철주 군수가 고마운 건...일할 수 있도록 믿어주고 밀어 준 것"

"신 군수에게 진정 감사한 것은 죽이되든 밥이 되든 백 원장이 할 수 있도록 믿어주고 밀어 준 것"이라는 그는 공무원 한사람 한사람이 노력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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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민.관 합작은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관에서는 간섭을 최소화시켰고, 행정.재정적인 것만 맡았지요. 철저히 민은 디자인과 설치만을 담당했어요. 돈 버는 것은 신경쓰지 않았어요.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 만을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 역시 신철주 군수의 '신의성실'이 뒷받침되지 않았으면 되지 않았던 일이었다고 말한다. 돌아가신 이후에도 민.관의 협약사항을 그대로 지켜줬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돌박물관에서 나온 수익은 연구소를 지원하는데 도움을 줘야한다"며 "제대로된 연구없이 성과물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며 지원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군대 공병대 생활 이후 맺은 나무와 돌에 대한 인연... 수집으로 40년 세월 보내"

연극연출을 전공한 그는 군대간 후 설악산에서 공병대로 근무를 했다. 당시 한계령 공사를 했는데 남들과 함께 마시고 먹는 일을 하기엔 너무나 식상했다. 희귀한 설악산 나무를 베고 땔감으로 사용하는 화목병으로 차출되면서 시작한 돌과 나무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눈을 뜨게 만들었다.

다른 가족은 모두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때 어머니만은 "이 것은 무슨 뿌리 같다"며 희귀한 뿌리와 돌, 나무에 대해 맞장구를 쳐줬다. 오늘의 백 원장을 만든 셈이다.

거의 미친 듯 시작한 돌 수집은 그렇게 시작됐다. 40년 가까이 모았다. 심지어 가족 결혼식조차 한번 가보지 못했다. 마땅한 옷과 맬 넥타이가 없다는게 이유였다. 당시 입었던 청바지와 구두가 모두 헤지고 구멍이 뚫렸다. 누가 봐도 누추한 모습으로는 도저히 갈 수 가 없었다.

그는 지난 5월 중순경 '분신'처럼 타고 다녔던 코란도를 버려야 했다.  운전면허를 따고 처음 차를 산 이후 새벽부터 나가 온갖 돌을 실어 날랐던 '자가용'이었다. 말이 좋아 자가용이지 한마디로 짐차였다.

"15년을 탔어요. 계기판을 보니 106만km를 탔더군요. 그 것도 차를 운행하다 몇달전에야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하고 헤어질때도 아프지 않았다는 그는 분신이었던 '애마'를 버려야 할 때가 되자 마음이 아파왔다고 했다.

▲ 지난 5월 중순. 15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코란도 짚차'. 마지막으로 작별할 때 그는 속울음을 삼켰다.

"제주 외에는 떠난 본적이 없어요. 공원안에는 제주 외 것은 없습니다."

"우리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데 남의 것을 돌볼 틈이 어디 있느냐"는 그는 "대부분의 각종 건축물은 물론 심지어 세계적 박물관을 만든다면서도 외국의 건축양식만을 따라한 채 중구난방으로 지어져 있다"고 아쉬워 했다. 불편하지만 전통초가를 재현하고 화장실 조차 초가형식으로 꾸민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 그는 늘 현장에 있었다.

"제주의 자연과 문화가 삼류로 세워지는 것을 볼 때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장 우수하게 뽑아져 있지만 고유 민속 문화와 전통문화 등 생활과 문화에 대한 컨텐츠는 '수준이하'라는데서 오는 부끄러움이지요."

그는 새로운 제주 고유의 정체성을 가진 돌문화를 조성하는게 꿈이었다.

신화와 전설 등 뿌리를 가진 공원을 조성해야 한다는 그의 집념은 설문대와 오백장군이 등장하고 생활속에 있던 돌과 민속품이 함께 자연과 어우러졌다. 제주돌문화공원은 박물관과 공원, 신화가 함께 어우리진 첫 사례로 꼽힌다.

그는 제주도에서 탐라목석원을 정기관광코스로 정해주면서 생긴 수입으로 다시 돈을 주며 민구류를 사고, 자연석을 등짐으로 운반하는 등 끊임없이 민속품류를 수집해 왔다. 한마디로 관광객이 놓고 간 돈을 다시 환원투자한 것이다.

어쩌면 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버려진 돌과 집, 모든 흔적들을 다시 모아 재현해 놓은 셈이다. 당시 돌과 민구류를 쉽게 버리지 않았다면 좀 더 많은 제주의 체취들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그는 안타까워했다.

"돈이 많아서 한 것도 아니다. 시대가 맞아 수집할 수 있는 운명이 주어진 것 같다"는 그는 "돈의 가치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수십 배를 주고도 살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많은 제주 자연석과 민속·민예품을 수집했는지는 가족과 형제는 물론이고 가장 가까운 친구조차 몰랐다. 하지만 이번 돌문화공원에 오면서 파악된 기증품은 1만 4000여점에이른다. 15톤 크레인으로 250여회 이상을 실어 날라야 했다. 물론 목석원내에 있던 자원은 그대로 남겨뒀다.

"내 돈이라고 생각했다면 부동산과 땅을 사는데 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은행에 빚을 내면서까지 할 엄두까지는 나지 않았을 테지요".

"목석원을 찾은 100만명의 관람객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는 그는 "미술관과 박물관은 국가사업이지 개인이 하는게 아니다. 개인이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뼈져린 교훈도 느꼈다고 말했다.

▲ '제주현무암' 골재를 이용해 처음 시도한 '노출콘크리트' 공법. 그는 "미인도 벗을 때 아름답지 않느냐"며 제주현무암이 섞인 제주식 골재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제주의 중산간에 초가마을 20여동 짓는 게 꿈...그 속에서 살고 싶어"

그에게 남아있는 또 다른 꿈이 있다면...

"중산간 마을 하나를 돌담까지 그대로 재현해서 짓는게 꿈입니다. 한 50년 후에는 제주의 옛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통문화가 되어있지 않을까요."

그는 현재 초가 200동에서 나온 고재(古材)를 보유해 놓고 있다. 공원내 전통초가를 짓는데 7개 동의 재료가 들어갔다.

"한 50동의 마을을 그대로 재현해 놓고 그 곳에서 전기와 가스도 없이 농사를 지으며 산다면 멋있는 제주마을이 되지 않겠느냐. 분명히 그런 마음과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주변에 많다"며 자신 역시 그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 것이야 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문화를 살려낸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그는 향토성에 예술성이 가미된다면 훌륭한 문화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건축물만큼 우수하고 훌륭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 현대식 수장고를 둘러보는 백 원장.
'운영난' 겪은 목석원...'세무조사 끝에 결백 인정 받아'

그런 그에게 그 흔한 고충 하나 없었을까.

"돌문화 공원이 백운철의 것이 아니냐는 오해도 많았어요. 30년간 모았던 것을 조건 하나없이 기증했다는 것을 믿지 못했는지. 2005년까지 개인 자비를 쓰면서 까지 일에 매달렸는데...가혹하더군요."

이를 두고 주변에선 목석원과 똑같이 꾸민다는 냉대도 쏟아졌다. 말그대로 명백한 오해였다. 물론 사람들 특유의 시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돌과 민속품을 갖더라도 좋은 박물관이 없다면 보여줄수 없는 것 아니냐"며 "그러한 구상을 신 군수에게 전달되었던게 작은 시작이 됐을 뿐"이라고 말했다.

당시 신 군수는 '독수리가 병아리 채가듯' 이 제안을 받아들이곤 밀어부쳤다. 100만평 정도의 땅에 반드시 곶자왈 지대여야 한다는 제안은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일이 갑작스레 진척되면서  목석원 운영도 어려워졌다.

지난 1988년까지 100만명이 오던 관광객과 손님들은 점점 줄더니 20~30%밖에 오지 않을 정도로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화살은 가혹했다.

심지어 관람료를 속인것이 아니냐는 세무당국의 오해를 살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 2003년 소득금액 관련 세무조사가 실시되어 장부을 모조리 압수당해 세무당국으로 부터 세무조사를 받았으나, 끝내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결백을 인정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세무조사 이후 모든 게 풀렸다. 오히려 그의 결백을 입증해 준 셈이 됐다. 그리고 '시간은 약'이 되었다. 지금도 현장에 있는 공무원은 자신에 대해 너무나 잘 알지만 현장 밖의 공무원은 아직도 오해의 시선이 있다고 말한다.

"제주의 정체성을 살리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저는 막연히 봉사를 하거나 돈을 벌려고 온게 아닙니다. 저에겐 생사를 건 일입니다. 사업적으로 출세를 위해서 생사를 걸 수는 없지 않습니까".

▲ 한 때 들어주는 이가 없어 매우 힘들었다는 백 원장.
"생사를 건 작업, 모두가 도와 준 결과...훗날 내가 왜 여기왔는지 알게 될 것"

답답했던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컨셉과 구상을 아무도 따라오지 못했다. 디자인 하나를 결정하는데도 동의해주는 이들이 없어 너무 답답한 나머지 바로 신 군수에게 직접 의견을 구할 정도였다.

"그 동안 신 군수님에게 수백통의 편지를 썼을 겁니다. 그 동안 걸어왔던 이야기는 언젠가 모아서 백서를 낼 예정입니다. 왜 내가 여기와서 있는지는 그 때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공원근처로 옮겨간 조천목장 사람들이 고맙다"는 그는 "결국 목장 사람들이 20여년간 조성해둔 목장을 기꺼이 양보하고 옮겨가는 등 앞장서 도와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곶자왈 지대인데도 단 한번 시민단체에서 문제를 삼지 않은 것도 백 원장에게는 큰 힘이 됐다.

"사업 초기 의회에서 예산 결정이 나지 않았을 때 이를 도와준 언론도 지금 생각하면 너무 고맙습니다."

"우리의 정신문화는 무엇인가?...누군가는 제주의 민속문화 전면에 내세워야"

인터뷰 동안에도 쉴새없이 핸드폰 전화벨이 울렸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다보면 일이 아무것도 안된다. 한번은 군수 전화도 받지 않았다가 찾는다고 난리가 났던 적도 있다"며 "포크레인 기사와 덤프트럭 기사의 번호밖에는 외우는게 없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제주의 민속문화를 전면에 내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얼마나 어설프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관에서 설계변경은 웬만큼은 하지 않는게 관례다. 하지만 돌문화공원 만큼은 무수히 많은 설계변경이 있었다. 이례적인 작업이었다.

"모든게 주변의 협력을 통해서 이뤄졌다. 모두의 노력이 있었기에 돌문화공원이 탄생한 것이다"라는 그는 그동안 "자신 때문에 고생한 공무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전했다.

"진정 우리의 정신문화가 무엇인가'라는 백 원장은 "시간을 두고 연구하며 장기간에 걸쳐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며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하는게 문화가 아니"라고 말했다.

"전 세계 신화에 있어서도 설문대 할망 축제는 세계 어디에도 볼 수 없는 축제가 될 것입니다. 돌문화공원이야 말로 그 축제를 담아내는 훌륭한 그릇이 될 것이구요. 그릇조차 준비하지 않고 무조건 담을려고 하니 담지를 못했던 것이지요".

▲ 지하 3층 전시관 건물 옥상에 만든 400평 규모의 '하늘연못. 수심이 30cm로 무용 정도의 무대공연은 거뜬하다.

중산간 쓰레기매립장 위에 들어선 '아름다운 박물관이자 생태문화공원'은 그렇게 세워졌다.

직접 구상했다는 '하늘 연못'의 깊이는 30cm. 무용을 비롯해 얼마든지 상황이 적절한 무대공연이 가능하다. 주변의 잔디광장은 물론 풍물놀이의 안성맞춤 공간인 전통초가 등 모든 공간을 무대화 했다. 한마디로 대형 문화공연장이자 자연 박물관인 셈이다.

'쓰레기매립장 위에 들어선 아름다운 박물관과 문화공원'

"제주도가 살길은 첫째 환경을 그대로 물려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환경을 보기 위해 제주를 찾는 이들이 수없이 많아요".  내심 우려도 없지 않다.

"북제주군이 이제 막 기초를 닦아 놓은 셈이지만 앞으로 제주특별자치도가 되면 제주도가 맡게 됩니다. 앞으로 20년 계획에 맞춰 추진한다면 세계적으로 상징적인 공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후손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밖에 더 있느냐. 우리는 어쨌든 떠날 사람이다. 물려줄게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오는 6월부터 2단계 특별전시관(2000평) 공사에 들어가면 국제적인 수준의 복합문화공간 및 갤러리가 탄생한다. 1~5호에 걸친 1000여평의 전시관과 최고 시설의 수장고까지 갖출 예정이다.

그는 "돌박물관과 특별전시관이 완성되면 웬만한 국제행사는 거뜬하게 치를 수 있는 규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연휴양림 조성도 계속해서 끌어가야 할 사업입니다. 원래 약속대로만 진행시켜 준다면 2020년이 되면 세계에서 문화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으로 충분히 만들 수 있어요. 관광객은 다 같은 관광객이 아닙니다. 다른 부류의 관광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문화관광객'이 찾아와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휴양관광이 함께 어우러진다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 백 원장은 "특별전시관 만큼은 반드시 고인이 된 '신철주 전시관'으로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2단계 '특별전시관'...반드시 '신철주 전시관'으로 이름 붙여야" 

제주도가 차후 후속 사업을 꾸준히 밀어준다면 "저를 쫒아내지 않고 다시 일꾼으로 부려먹지 않겠느냐"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이 곳에서 일생을 마치고 싶다"는 그는 "제대로 관리를 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반드시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고인에 대해 기념비석을 세운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는 안됩니다. 2단계에서 지어지는 특별전시관은 '신철주 전시관'이라는 이름이 반드시 붙여져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성과를 낸 이들이 영원히 기억에 남고 또 본받으려 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번에 당선된 새로운 도지사가 이 일을 맡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꿈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나의 꿈이 아니라 제주도의 꿈입니다. 내 꿈이라면 목석원이면 족하지요. 신화는 공동의 자산입니다. 누구나 가질 수 있어요. 목석원에도 설문대가 있을 수 있고 공원에도 설문대가 있을 수 있어요".

그의 제주문화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무한한 사랑은 한동안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우리 것을 지켜 나가지 않으면 누가 지켜나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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