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민의 ‘다시 쓰는 4.3’] (3) 4.3사건 전개과정 요약 1 - 일제강점기의 제주도

1945년 8월 15일 찾아온 해방은 제주도민에게는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단순한 의미 이상이었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해방’이었다. 일제의 항복이 조금만 늦어졌다면, 제주도는 미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오키나와처럼 불바다로 변할 뻔했다.

■ 제주,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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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아시아 정중앙에 위치한 제주도(흰색). 제공=김종민. ⓒ제주의소리

제주도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의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 받아왔다. 13세기에는 몽골족이 세운 원(元)이 제주도를 점령해 100년 가까이 지배하면서 일본과 남송(南宋) 정벌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원은 비록 실패했지만,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제주도를 발판 삼아 일본 침공 시도를 하기도 했다(원의 일본 정벌은 공교롭게도 두 번 모두 태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일본은 이를 신(神)의 위력으로 일어난 바람이라 하여 ‘가미카제(神風)’라 칭송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비행기를 몰고 연합군의 군함에 돌진해 함께 폭사하는 자살 특공대를 ‘가미카제 특공대’라고 명명했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제국주의는 1937년 중·일 전쟁 때 제주도 서남쪽에 위치한 모슬포 지역에 비행장을 만들고 오오무라(大村) 해군항공대를 설치해 중국 대륙을 향한 폭격기지로 삼았다. 지금도 모슬포에는 비행장 터에 격납고가 산재해 있어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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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모슬포 비행장(일명 ‘알뜨르 비행장’) 터에 남아있는 일본군 비행기 격납고.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초 제주도를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대미(對美)결전의 최후 보루로 삼기 위해 섬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 “제주도가 서부 태평양의 ‘지브롤터’화 할 가능성 있다”

해방 직후에도 제주도의 지리적 중요성이 부각된 몇 가지 사례들이 있다. 1946년 10월 21일 AP통신은 제주도에 대해 “일본 사세보(佐世保)까지 150마일, 동경까지 750마일, 대만(台湾)까지는 700마일, 대련(大連)까지 470마일, 상해까지 325마일,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까지 720마일, 마닐라까지 1400마일, 하바로프스크까지 1000마일, 보르네오까지는 2000마일이다.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최초 도양(渡洋)폭격을 한 것도 제주도로부터 결행된 것”이라며 “조선 제주도가 장차 서부 태평양지구에 있어서의 ‘지브롤터’화 할 가능성이 있다”고 타전해 국내 언론으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_#1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 좁은 길목에 위치한 지브롤터(Gibraltar)는 그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오랫동안 유럽 각국의 쟁탈전이 벌어졌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미군의 작전기지가 되어 독일군의 폭격을 받기도 했다. “제주도가 ‘지브롤터’화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은 향후 제주에서 벌어진 참극에 대한 예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편 1948년 3월 28일 이승만(李承晩)은 방한 중인 미 육군성 차관 드래퍼(Draper)와의 회담에서 “미국이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고자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말을 들었다”면서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한국인들은 매우 기꺼이 미국이 제주도에 영구적인 기지를 설치하도록 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_#2

미군정 시기에 아무런 직책도 맡고 있지 않은 이승만의 이 같은 발언은 매우 자의적이고 월권적인 것인데, 이는 미국의 속마음을 간파해 이에 부응하려는 이승만의 무책임한 말이었다.

또한 1949년 5월 제주를 방문한 유엔한국위원단은 보고서를 통해 “대한해협 남쪽 그리고 일본의 남부와 중국의 북부 해안에 위치한 제주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명백하다”_#3고 기술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주도의 지리적 중요성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의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때 제주도는 일본에게는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전쟁 상대인 미국에게는 일본으로 진격하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할 섬’으로 부각되면서 갑자기 전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다.

■ “최후의 1인까지” 옥쇄(玉碎)작전

일본군 사령부가 제주도의 방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44년 10월 필리핀이 미군에 의해 함락되면서부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주도의 방비 책임은 해군이 담당하고 있었고, 병력수도 수 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45년 초부터 전쟁 상황이 일본에게 더욱 불리하게 돌아가자 제주도 방비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일본 방위총사령관은 1945년 2월 9일 미군과의 본토 결전에 대비해 7개 방면의 육‧해군 작전 준비를 명령했다. 예상되는 미군의 공격 방향에 맞춰 대책을 세운 것이다. 작전 암호명은 ‘결호(決號)작전’. ‘결7호 작전’은 제주도 방면의 방비책이었다._#4

1945년 3월 12일 일본 대본영(大本營)은 한반도 방어 책임을 맡고 있던 제17방면군 사령관에게 ‘결7호 작전’ 시행을 명령했다. ‘결7호 작전 준비요강’에는 “적(미군)은 규슈(九州)북부 방면으로 상륙하거나 또는 조선해협 돌파를 위한 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제주도에 대한 공략이 예상된다”면서 “제주도에는 처음부터 유력한 병력을 배치하여 독력(獨力)으로 이 섬을 사수해야 한다”는 방침이 적혀 있다._#5

이에 따라 1945년 4월 제주도의 모든 군을 통솔하는 제58군사령부가 편성되었다._#6 초대 사령관은 나가쓰 사비주(永津佐比重) 중장인데, 종전 당시의 사령관은 도야마 노보루(遠山登) 중장이었다. 그 휘하에 제96사단, 제111사단, 제121사단 등 3개 사단과 1개 여단(독립혼성 제108여단) 및 야포병 연대, 공병 연대, 수송 대대 등이 배속되었다.

제96사단은 1945년 4월 서울에서 제주도 북부지역으로 이동해 왔고, 제111사단은 만주 관동군으로 활동하다 그 해 5월에 제주도 서부해안에 배치되었다. 역시 관동군 예하부대였던 제121사단은 제주도 서부지역을 맡게 되었다. 독립혼성 제108여단은 일본 본토에서 그 해 5월 제주로 와 중부와 동남부 지역의 방어를 담당했다._#7

오키나와 함락(1945년 6월 25일) 후인 7월 13일 일본군 참모총장은 제17방면군 사령관에게 제주도 작전에 관한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것은 ①제주도에서의 작전 목적은 적의 공해(空海)기지 설정의 기도를 파쇄함에 있다. 이를 위해서 작전 초동에서 공세를 취할 것 ②제17방면군 사령관은 1개 사단 병력을 남선(南鮮)에 준비하고, 제주도에 대한 적의 침공 공산이 다대해지면 적시(適時) 이를 제주도에 투입, 제58군의 전력을 증강할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_#8 이 지시에 따라 8월 중순에 제주도에 제120사단을 증파할 계획이었으나, 곧 전쟁이 끝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1945년 8‧15 당시 제주도 58군사령부 휘하의 일본군 병력은 6만여 명_#9에 이르렀다. 해방 직후 남한을 점령한 미군 제24군단의 일일정보 보고서는 ‘38선 이남의 일본군 현황’에서 일본군 총수를 179,72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료에서 제주도의 일본군 병력을 다른 남한지역의 일본군과 별도로 집계하고 있는 게 특이하다. 즉 서울(5만7110명), 광주(3만4710명), 대구(1만3480명), 부산(1만5420명), 여수(680명) 등을 합쳐 ‘남한 총계 12만1400명’으로 해놓고, ‘제주도 5만8320명’은 따로 기술해 놓았다._#10

아무튼 해방 전 인구 20여 만 명의 제주도에 6만여 명의 일본군이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또한 일제가 남한 전체의 일본군의 3분의 1을 제주도에 주둔시킨 것은 미군이 제주도를 통해 일본 본토를 공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일본군의 방침은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했을 때 최후의 일인까지 싸운다는 이른바 ‘옥쇄(玉碎) 작전’을 상정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제주 섬에서 한라산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계획했던 사실은 「조선에서의 전쟁준비」에 기록된 1945년 8월의 ‘제주도 병력 기초배치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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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병력 기초 배치요도’(朝鮮軍殘務整理部, 「朝鮮に於ける戰爭準備」, 1946에 수록) 제공=김종민. ⓒ제주의소리

이 병력 배치도를 보면 일본군의 주력진지가 1차 저지선인 해안선에서 훨씬 후퇴한 중산간 지대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 북부와 서부지역에는 96사단과 111사단을, 동부와 남부지역에는 121사단과 108여단을 배치했다. 특히 동부 고원지대 상당 지역을 유격전 진지로 삼았다._#11

미군의 상륙을 막으려면 병력을 해안에 집중시키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오히려 주력부대를 중산간 지대로 물렸다는 것은 이미 전세가 기울었음을 인지한 가운데 미군의 본토 진격을 지연시키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일본군은 그 해 5월부터 제주도 주민 22만 명 가운데 어린이와 부녀자, 노약자 등 약 5만 명을 조선 본토로 이주하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잦은 미군기의 공습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미군이 섬에 상륙하게 되면 제주도의 청장년들을 한라산으로 끌고 가 군인들과 행동을 같이하며 미군과 싸우도록 할 계획이었던 것이다._#12 그것은 오키나와처럼 20여 만 명의 제주도민들을 최후 결전의 소모품으로 사용하겠다는 뜻이었다.

■ 일본군 방어진지…“움직이지 않는 항공모함”

“과거에 일제시대의 전쟁 최종 말에 있어서 소위 움직이지 않는 항공모함을 건설한다고 그래서 제주도에 막대한 군비를 드려서 건축한 것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미국이 군략상으로 대단히 중요시해 왔고 소련도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는 것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_#13

위 발언은 제주출신 오용국(吳龍國) 의원이 국회에서 한 말이다. ‘움직이지 않는 항공모함’이라는 표현처럼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에 대비해 제주도 전역을 요새화했다. 

이로 인해 제주도 주민들이 당한 고초는 조선 전체에서 가장 심했다. 일본군은 어뢰정 기지를 만들기 위해 해안 절벽에 굴을 파도록 했다. 미군 함정이 다가올 경우 1인용 어뢰정을 타고 미군 함정에 돌진해 배를 폭파시키겠다는 ‘바다의 가미카제’였다(일본 도쿄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내에 설치된 전쟁박물관인 류슈칸(遊就館)에는 이 어뢰정이 전시돼 있다). 성산 일출봉, 대정읍 송악산, 함덕해수욕장 인근의 서우봉 등 아름다운 해안 절벽마다 줄지어 뚫려있는 굴이 바로 이 어뢰정 기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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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뢰정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송악산 해안 절벽에 파놓은 굴.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또한 기존의 모슬포비행장 외에도 제주읍 동쪽의 속칭 ‘진드르’와 서쪽의 ‘정뜨르’에서 각각 비행장 건설작업이 진행됐다. 제주도민들은 그 넓은 비행장에 잔디를 입히는 공사에 동원돼 큰 곤욕을 치렀다.

제주도 중산간지대도 일본군의 요새로 변해 갔다. 어승생악‧관음사‧녹산장 부근 등지에 거대한 기지가 구축되었다. 일본군의 복곽(複郭)진지로 최후 저항의 본부로 삼았던 어승생악(御乘生岳‧해발 1169m)을 비롯해 많은 오름에 미로와 같은 수많은 인공 굴이 만들어졌다. 

이런 엄청난 작업들은 제주도민들의 몫이었다. 전쟁 말기 젊은 사람들은 이미 강제징용이나 징병을 당하여 사할린이나 홋카이도 탄광, 남양군도로 보내졌다. 따라서 청년 일꾼이 절대 부족했다. 일제가 일반적으로 ‘국민직업능력 신고령’에 의해 강제동원한 노무자의 나이는 만 16~50세 사이였지만, 제주에서는 이런 기준이 소용없었다. 일손을 구하기가 어려우면 예순 살, 심지어 일흔 살의 노인까지 동원되는 경우가 있었다._#14

일본군의 어승생악 진지 공사장에 강제 동원됐던 한 노인은 그때의 수난상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어승생악 아래 부분에서 정상까지 모두 연결되게 굴을 팠는데, 실상은 그게 굴을 판 것이 아니고 만든 겁니다. 나사형으로 오름을 돌아가면서 표면의 땅을 파낸 뒤 그 위에 다시 흙과 잔디를 입히는 형식의 공사였지요. 시멘트와 자갈, 물 등을 전부 등에 지고 나르는데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지요. 도망갈 생각이 굴뚝같아도 오름 아래에 일본 군인이 새까맣게 깔려 있어서 그러지도 못했지요. 오죽 힘들었으면 동료 중의 한 사람은 곡괭이로 자기 발을 고의로 찍어 후송 기회를 얻고자 했습니다.”_#15

■ 미군 공습으로 여객선 침몰해 큰 인명 희생

한편 제주 섬이 일본군의 요새로 변해갈 무렵 미군 공군기와 잠수함의 공격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5월 7일에는 전쟁을 피해 육지로 가는 소개민(疏開民)을 싣고 제주항을 출항한 목포행 여객선 고와마루(晃和丸)가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침몰해 민간인 수백 명이 수장 당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_#16

또한 7월에 한림항의 일본군 군기고에 대한 미군기의 공습으로 그 속에 쌓여있던 폭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인근의 민간인들이 큰 희생을 치렀다. 이 공습으로 “민가 파손 400호, 사망자 30여 명, 부상자 200여 명을 냈다”는 기록도 있다._#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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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작성된 미군 비밀 작전지도. 위도와 경도가 아닌 좌표가 그어져 있다. 전체 지도의 좌측 상단에는 “미군만이 사용할 수 있으며 판매나 배포가 금지된 지도”(For use by War and Navy Department Agencies only. Not for sale or distribution)라고 표기돼 있다. (재미학자 고(故) 이도영 박사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찾아내 필자에게 제공한 것임) 제공=김종민.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45년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에 미군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소련은 그로부터 이틀 뒤인 8월 8일 이 전쟁 막바지에 참전했다. 다시 며칠 뒤인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종지부를 찍었다. 예상보다 앞당겨진 종전이었다.

일본군 측의 자료들을 보면 일본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시점을 10월 말에서 11월 초로 예상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쓴 《한국전 비사》에는 “오키나와의 미 제6군은 11월 1일로 예정되었던 남부 규슈에 대한 상륙작전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_#18

이 작전 일정대로 전쟁이 계속되었다면 제주도에 대한 미군의 공습은 1945년 9~10월경 집중되었을 것이다. 일본군 측에서 예상했던 미군의 상륙 예상병력은 2~5개 사단이었다. 그것은 제주도가 ‘제2의 오키나와 섬’으로 변할 수 있는 기로에 섰음을 의미한다. 오키나와에서는 미‧일 격전 속에서 민간인을 포함한 20만 명이 죽어 갔다.

■ 평화의 섬인가, 동북아 화약고인가

제주도는 지리적 특성상 태생적으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 말기에 군사기지화 되어 큰 위기를 맞았고, 4·3사건의 참혹한 피해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 같은 운명은 과거의 역사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나라들 사이에 낀 채 동북아시아의 화약고가 될 수도 있고, 강대국들 간의 완충지대로서 균형을 잡아주는 평화의 섬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것이 되든 제주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온 국민과 정치인들이 지혜를 모아야 한다. / 김종민


▲각주

#1
《漢城日報》, 1946년 10월 22일; Hq. USAFIK, G-2 Weekly Summary, No. 59, October 31, 1946.

#2
“Conference between Under Secretary Draper and Mr. Syngman Rhee, March 28  1948,” Memorandum for Record, Department of the Army.

#3
“Report on Trips to the Provinces Affected by Recent Disturbances,” Enclosure to Despatch No. 358, dated June 17, 1949, from American Embassy, Seoul, Korea.

#4
나머지 6개의 작전은 모두 미군의 일본 본토 공격을 상정한 것으로, 그 내용을 보면 결1호 작전: 홋카이도(北海道)방면, 결2호 작전: 토호쿠(東北)방면, 결3호 작전: 간토(關東)방면, 결4호 작전: 토카이(東海)방면, 결5호 작전: 츄부(中部)방면, 결6호 작전: 규슈(九州)방면, 결7호 작전: 제주도 방면이다.

#5
朝鮮軍殘務整理部, 「朝鮮に於ける戰爭準備」, 1946 (《朝鮮軍槪要史》, 東京, 不二出版, 1989, 164~165쪽에 수록).

#6
Hq. USAFIK(주한미군사령부), G-2 Weekly Summary(주간정보요약), No. 3, October 2, 1945.

#7
林鍾國, 《日本軍의 朝鮮侵略史 Ⅱ》, 일월서각, 1989, 121~122쪽.

#8
朝鮮軍殘務整理部, 앞의 글 (《朝鮮軍槪要史》, 240~241쪽에 수록).

#9
朝鮮軍殘務整理部에서 1946년 2월 작성한 「濟州島部隊一覽表」에는 총계 7만4781명(《朝鮮軍槪要史》, 198쪽)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부대별 병력 수를 합산해보면 6만1090명으로 혼선을 빚고 있다. 留守業務部의 「朝鮮部隊槪況表」(《朝鮮終戰の記錄-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24쪽)와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에서 발행한 《韓國戰爭史 第1卷》(437쪽)에는 6만668명으로, 미군 정보기록에는 조선인 출신 병사와 노무자를 합쳐 6만6780명(Hq. USAFIK, G-2 Periodic Report(일일정보보고), No. 26, October 5, 1945.)으로 정리되어 있다.

#10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4, September 13, 1945.

#11
朝鮮軍殘務整理部, 「朝鮮に於ける戰爭準備」(《朝鮮軍槪要史》, 247쪽에 수록).

#12
林鍾國, 앞의 책, 140쪽.

#13
《국회속기록》, 제1회 제87호, 1948년 10월 13일

#14
제주4‧3연구소, 《이제사 말햄수다》Ⅱ, 한울, 1989, 169쪽. 

#15
임공진(林孔眞·1994년 70세, 가파도 출신)의 증언

#16
희생자 숫자에 대해 일본 측 자료인 朝鮮軍殘務整理部의 「朝鮮に於ける戰爭準備」(《朝鮮軍槪要史》, 189쪽)에는 500명으로, 金奉鉉의 《濟州島 血の歷史》(國書刊行會, 1977, 21쪽)에는 280명으로, 夫萬根의 《光復 濟州30年》(文潮社, 1975, 19쪽)에는 257명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17
濟州道, 《濟州道誌》(上), 1982, 432쪽.

#18
佐佐木春隆, 《韓國戰 秘史: 建國과 試鍊》, 姜昶求 譯, 병학사, 1977, 17쪽.

 ◆ 김종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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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민(57)은 4.3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일간지 기자 13년, 국무총리 소속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 13년, 도합 26년을 비롯해 지금까지 4.3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매달렸다. 제민일보 ‘4.3은 말한다’ 취재보도,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희생자·유족 인정, 일부 희생자를 제외시키라는 극우보수단체와의 숱한 송사를 맡아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은 낮엔 농사를 짓고 밤엔 글을 쓰고 있다. 기자시절 무려 7000여명의 4.3유족들로부터 증언을 채록한 역사학도(고려대 사학과 졸업)로서의 집요함을 보였다. 이 방대한 증언은 4.3의 진실을 밝히는데 단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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