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있는 나의 그림책'으로 그림책의 재발견에 나섰던 오승주 작가가 다시 고전을 꺼내들었습니다.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논어 읽기 시즌2에 맞춰 <제주의소리>에 인문학 함께 읽기 칼럼을 펼쳐놓습니다. 좋은 생각에 힘입어 우리의 행복이 오래 가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논어와 동서양 고전의 향연] (7) ‘불편한 의견’을 가르친 안자에게 배운 것

안자춘추 |  임동석 (옮긴이) | 동문선 | 1998-01-10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하다

“선생께서는 밤낮으로 과인을 책하여 주셨습니다. 한 치의 빠뜨림도 없었지요. 그런데 과인은 오히려 음일하여 이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해, 백성에게 많은 원망의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늘이 우리 제나라에 화를 내리셨군요. 그런데 과인에게 내리지 아니하고 선생께 내렸으니, 이 제나라의 사직이 위태롭게 되고 말았습니다. 백성은 장차 이를 누구에게 하소연한단 말입니까?” - 제경공이 안자에게

안영(晏嬰, BC.578년~BC.500년, 안자(晏子)는 안영의 존칭)은 죽을 힘을 다해서 경공을 말렸습니다. 경공은 겨우 이성을 되찾아 제나라 백성들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습니다. 

심지어 제나라의 주인이 강씨(姜氏)에서 전씨(田氏)로 바뀔 거라고 경고했지만 경공은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제나라는 기원전 386년 안영의 말대로 전씨가 왕위를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안영이 온몸으로 제나라의 균열을 막아낸 덕분에 파국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었습니다.

안자는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 세 임금을 섬겼지만 그들은 불행히도 혼군(昏君)에 가까웠습니다. 특히 장공은 부하의 아내를 탐하다 시해당하고 말았죠. 한 번은 장공이 거(莒)나라를 점령하려고 문을 걸어 잠그자 백성들이 난이 일어난 것으로 착각하고 모두 긴 창을 쥔 채 광장에 모였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무기를 들고 모였으니 무슨 일이 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신하의 제안을 받은 왕은 “누가 나라에 난이 생겼다고 하는가? 안자가 아직 건재하다.”라고 영을 내렸습니다. 백성들은 이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안자의 덕망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만약 안자가 모셨던 임금들이 조금만 더 지혜롭고 덕망과 절제가 있었더라면 제나라의 운명은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안자가 죽자 경공은 자신과 나라의 운명도 이제 끝나간다는 사실을 직감합니다. 역사가 사마천이 말몰이꾼이라도 하며 시중들고 싶다고 평가한 안자와 같은 불세출의 영웅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안자를 통해서 현실정치의 핵심을 배울 수는 있습니다. 견제와 의견입니다.

앞에 쓴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리더의 선견지명이 아니라 피치자의 ‘올바른 의견((doxa alethes)’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팔로어(follower)라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약한 동양 정치가 빛날 때는 이상적인 참모들의 팔로워십(followership)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천 사기와 안자춘추 등을 읽어보면 똑똑히 볼 수 있죠.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생각했지만, 중산층과 올바른 의견을 가진 피치자들이 건강하다면 민주주의도 해볼만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몰고 간 것도 무분별한 대중이었으니까요.

한국 정치는 얼마 전만 하더라도 전제정(專制政)처럼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요즘은 직접 민주주의가 만개한 것처럼 보입니다. 조울증에 빠진 정치 같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의견들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대중들의 기호에 부합하는 의견만 즐비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지식인들은 권력자의 눈치를 보다가 이제는 대중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1960년과 2017년의 데자뷔

1960년과 2017년은 국민의 힘으로 대통령을 몰아낸 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만 닮은 게 아닙니다. 사후의 혼란도, 지식인들이 중심을 잡지 못하는 모습까지도 빼닮았습니다. 알다시피 1960년 이후 또 다른 독재자가 나타나 정치를 군홧발로 밟아버렸죠. 이것만큼은 닮지 않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이성을 가졌던 김수영 시인은 1960년 당시의 한심한 모습을 산문에 썼습니다. 얼핏 보면 2017년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지성인은 그래도 조리 있는 설득과 아름다운 이성으로 줄기차게 자기들의 맡은 각자의 천직을 고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무슨 데모 사건 같은 것에 있어서도 정력이나 인내 이상의 그 몇 배의 진실성이 없이는 되는 것이 아니다. 될 수만 있으면 조용히 아름답게 그러나 강하게 싸우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싸우는 법을 일반 민중에게 깨우쳐주는 것이 지성인의 책무가 아니겠는가. - 김수영, <김수영 산문전집, 1960.5. >,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

지성인들은 책무를 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경공이 옳다고 하면 앵무새처럼 옳다고 하고, 틀리다고 하면 역시 틀리다고 했던 제나라의 양구거(梁丘據)처럼 무능력하고 부화뇌동하는 정치인들과 닮아도 너무 닮았습니다. 안자가 죽은 지 17년이 되는 어느 날 여러 대부들과 활쏘기를 하다가 경공은 갑자기 기분이 침울해지면서 안자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현장! 내 안자를 잃은 지 이미 17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동안 나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 지금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히었더니,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소리가 마치 한 사람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 <안자춘추>

얼마 전 한 도서관에서 강의를 하다가 부끄러운 말을 들었습니다. 70대 중반의 수강생이 “나는 촛불과 태극기 집회가 다 싫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미 어느 한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다는 걸 들키고 말았습니다. 어느새 촛불과 태극기가 닮아가고 있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세월호가 인양되는 순간 광화문에서 어김없이 촛불집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이 모습에 피로감을 느낍니다. 지쳤기 때문이 아니라 단조롭기 때문입니다.

좋은 수업을 세 시간 연속으로 듣는 어린이가 된 기분입니다. 제 마음은 투쟁으로 여전히 뜨겁습니다. 인간의 투쟁은 끝없이 전개되나, 그 방법은 달라져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아직까지 광장에 모여서 촛불집회를 하는 것은 ‘단조로운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투쟁이 단조로워질 때 동력은 약해집니다. 연료를 바꾸고 다음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야지 ‘박근혜 퇴진’에서 ‘박근혜 구속’으로 피켓 카피를 바꾸는 정도로 될 일은 아니지 않나요.

지식인들은 유력 대선주자의 캠프로 철새처럼 날아가고, 칼럼을 써도 대중들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아부하고, 욕먹을 각오를 하고 자기 소신을 밝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요즘이야말로 포퓰리즘(populism)의 암흑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다가도 갑자기 눈이 뜨입니다.

증자는 군자의 책임 말하며 “안심하고 어린 군주를 맡길 수 있고, 일국의 정치를 맡겨 든든하고, 중대한 갈림길에 섰을 때도 평소의 신념을 바꾸지 않”(태백 편)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1960년처럼 다시 군사쿠데타가 발발하지는 않겠지만,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대한민국의 정치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확률이 더 클 것입니다.

공자와 안자 한목소리로 “화이부동(和而不同)”

“군자는 다름, 고유함을 존중하며 다양하게 어울리고, 소인은 천편일률을 강요한다.” - <논어>, 「자로」편

안자와 공자는 동시대 이웃나라의 정치인이며 라이벌이기도 했습니다. 공자는 안자가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싫어했고, 안자는 공자가 어렵고 허례허식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공자를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안자춘추>, <묵자>, <장자> 등을 읽으며 공자에 대한 비판론에 귀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안자는 공자를 정치적으로 여러 번 좌절시키기도 했습니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중용되자 제나라에 재상자리를 마련해 놓고 공자를 회유한 다음 공자가 노나라에서 실각하자 슬쩍 재상자리를 취소하는 식이죠. 제나라에서도 뜻을 잃지 못하고 떠난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신변의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제경공이 공자에게 봉지를 나눠주려는 계획을 무산시킨 것도 안자였습니다. 순임금과 공자를 비교한 대목이 안자의 공자관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공자는 미미한 백성들 틈에 있어도 지식을 지나치게 과장하지만 순임금은 그들과 보조를 맞출 뿐이죠. 그래서 시장에 가면 공자는 금방 알아볼 수 있지만 순임금은 얼른 보고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안자는 공자처럼 인(仁)과 예(禮)가 정치의 핵심이 되어야 하며, 화이부동(和而不同)해야 한다는 점만은 생각을 같이 합니다. <논어>뿐 아니라 <안자춘추>에도 화이부동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동양의 오래된 정치철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자의 동료 정치인 중에서 아첨의 대명사인 양구거가 경공이 사냥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오자 경공은 흡족해하며 “오직 양구거와 나는 서로가 화(和)한 관계로군!”이라고 말했습니다. 안자는 “양구거 역시 동(同)일 뿐, 어찌 화(和)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로 현대사회는 화(和)에서 동(同)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기계의 삶입니다. 산업혁명의 흐름이 지금의 대한민국에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얼굴도 정치도 교육도 문화도 천편일률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강요하는 동인(動因)은 분명히 있습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소인(小人)의 나라가 되면 극소수의 사람들이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두정체(寡頭政體)를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대중이 각성하고 삶의 수준이 중산층 수준으로 보편화되면 권력을 잃어버리고 손해를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공자와 안자는 동이불화(同而不和)하지 말고 화이부동(和而不同)하라고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칼 폴라니(Karl Paul Polanyi, 1886~1964),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 등이 화이부동의 길을 걸었죠. 같음을 강요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에서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펴고 자신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게 안자와 공자, 폴라니와 오언의 합의된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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