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군사재판에 구둣발 폭행까지 ‘제주4.3 한맺힌 증언’
유령 군사재판에 구둣발 폭행까지 ‘제주4.3 한맺힌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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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창용 할아버지(가운데)가 28일 오후 2시 제주 하니호텔 별관 2층 회의실에서 열린 ‘4.3역사 증언 및 제주4.3 인천형무소 수형희생자 실태조사 보고회’에서 수감 생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제주4.3 인천형무소 수형인 실태조사보고회...박동수-양근방-양일화-현창용씨 생생한 증언

“영하 8도의 한겨울에 찬물로 세수를 시키는데 얼굴에 물을 묻히지 마자 ‘그만!’ 이라고 외치는 거야. 거기서 움직이면 구둣발로 무차별적으로 두드려 맞았어. 인정사정 없었어”

제주4.3사건으로 끌려간 생존희생자 대부분은 체포후 협박과 폭행, 끔찍한 고문에 시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희생자들의 절대다수는 당시 재판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는 28일 오후 2시 제주 하니호텔 별관 2층 회의실에서 ‘4.3역사 증언 및 제주4.3 인천형무소 수형희생자 실태조사 보고회’를 열었다.

보고회에는 강우일 천주교 제주교구장과 임문철 제주4.3도민연대 상임고문, 이문교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양윤경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 현우범 제주도의회 부의장 등이 참석했다.

이번 조사는 4.3도민연대가 4.3사건 당시 인천형무소 수형인 408명 중 361명의 수형생존자와 유족 등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조사는 응답자와 1대1 개별 면접 방식으로 이뤄졌다.

수형인들은 모두 19세미만의 10대 청년들이었다. 1948년 200명, 1949년 208명의 청년들이 적벌절차를 어긴 군법재판을 받고 줄줄이 머나먼 인천형무소까지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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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수 할아버지가 28일 오후 2시 제주 하니호텔 별관 2층 회의실에서 열린 ‘4.3역사 증언 및 제주4.3 인천형무소 수형희생자 실태조사 보고회’에서 형무소 생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408명 중 59명은 영문도 모른채 20년 이상의 중형에 처해졌다. 이중 15명은 사형, 22명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이들이 체포된 장소를 조사한 결과 35.2%는 집이라고 답했다. 12.0%는 군경의 총포를 피해 산으로 올라갔다 잡혔다. 길을 지나다 끌려간 피해자도 9.2%에 달한다.

체포 이유에 대해 응답자의 65.0%는 누명과 밀고라고 응답했다. 끌려간 곳은 15.2%가 주정공장, 11.4%는 경찰서였다. 경찰서에서 주정공장으로 끌려간 피해자도 6.1%였다.

체포후 14.9%는 협박이나 폭행,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답했다. 응답자가 희생자의 유족이나 지인이어서 나머지 81.6%는 폭행 여부 등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반면 생존자의 대부분은 폭행을 경험했다고 답변했다. 45.5%는 협박과 폭행, 36.4%는 심한 고문까지 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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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미경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산하 4.3진상조사단 조사연구원이 28일 오후 2시 제주 하니호텔 별관 2층 회의실에서 열린 ‘4.3역사 증언 및 제주4.3 인천형무소 수형희생자 실태조사 보고회’에서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증언에 나선 현창용(86)씨는 4.3당시 무차별적인 폭행을 경험했다. 1948년 당시 16살이던 현씨는 제주시 노형동 자택에서 잠을 자다 한밤중에 어머니와 함께 경찰에 끌려갔다.

‘너 폭도냐. 삐라 뿌렸나. 시위에 참가했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우물쭈물하는 현씨를 향해 폭행이 계속됐다. 인천형무소로 끌려간 현씨는 혐의도 모른채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이유도 모르고 끌려가서 맞았어. 분풀이를 하듯이 때리더라고. 밥해주는 아주머니가 '살려면 경찰이 말하는 대로 시인하라'고 귀띔해줘서 그냥 대답하고 살아 남았지”

박동수(85)씨는 고문까지 당했다. 1949년 18살이던 박씨는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에 군인들이 쳐들어오자 살기 위해 집을 나서다 폭도로 내몰렸다.

아버지는 군인들에게 잡혀 밭에서 총살을 당했다. 한순간에 쫓기는 신세가 된 박씨는 군인들에게 잡혀 인천형무소로 끌려간 뒤 유령 군법재판을 통해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

“발로 차고 고문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재판도 없었어. 형무소에서 형무관이 순서대로 앉으라고 호명했어. 잡혀간 이유도 몰랐지. 같이 끌려간 도민들 모두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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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28일 오후 2시 제주 하니호텔 별관 2층 회의실에서 ‘4.3역사 증언 및 제주4.3 인천형무소 수형희생자 실태조사 보고회’를 열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실태조사에서 응답자의 96.9%는 당시 군법재판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 수형사실에 대한 재심절차를 알고 있는 259명 중 85%는 소송에 나설 수 있다고 응답했다.

4.3희생자 결정에 따른 명예회복 질문에는 응답자의 71%가 ‘아직도 명예회복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92%가 ‘법적으로 아무런 조치가 없다’고 말했다.

양근방(85)씨와 양일화(89)씨는 4.3에 이은 6.25 상황에서도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양근방씨는 인민군의 권유를 뿌리치고 제주로 향했고, 양일화씨는 인민군 훈련까지 경험했다.

“형무소에서 인민군이 우릴 풀어줬어. 제주에서 고생을 했으니 같이 북으로 가자고 하더라고. 다른 동기들은 모두 북으로 갔지만, 난 가족들 시신 수습하러 제주로 왔지”(양근방)

“인민군들이 따라오라고 하니까 일단 갔지. 그러다 인민군 훈련도 받았어. 이후 국군을 만났는데 제주 사람이라고 하니 데려가더라고. 그래서 인민군과 다시 싸웠어. 참 나.”(양일화)

현장을 찾은 강우일 주교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할 국가가 잔인하고 무자비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참상을 겪은 어르신들에게 죄송하고 가슴이 저미어온다고 말했다.

강 주교는 “어르신들의 역사적 증언이 대한민국 전체에 새로운 울림이 되길 바란다”며 “이를 통해 과거 국가가 저지른 오류를 바로 잡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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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28일 오후 2시 제주 하니호텔 별관 2층 회의실에서 ‘4.3역사 증언 및 제주4.3 인천형무소 수형희생자 실태조사 보고회’를 열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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