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칼럼] ‘양이(洋夷)와의 화친(和親)은 매국이다’ 

미국 대통령이 입장을 취해야 한다

제주4․3은 언제 일어났는가? 4․3은 미군정 시대에 일어났다. 4․3 당시 군사, 경찰을 장악한 당사자는 누구인가? 미군정은 당시 통치주체이자 권력담당자였고, 또 민간인 대량학살을 가져온 강경진압과 초토화 작전을 입안하였으며, 작전권을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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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스 커밍스.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4․3진압에 대해 미국책임론을 주장하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는 1998년 3월 14일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1945년부터 1949년 6월까지 미군이 한국의 군대와 경찰을 지휘 통제했기 때문에 제주섬에서 발생한 모든 학살극과 잔혹행의에 대해 미국은 윤리적 책임 뿐 아니라 실체적이고도 법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해방된 후 한반도는 심한 혼란을 겪는다.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상황과, 외세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다. 이 혼란을 틈타 신탁통치안이 논의되었다. 한반도는 분단의 위기와 제주도에서도 일제 강점기부터 온 적대감정과 미군에 대한 적대감정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감정들이 4.3의 원인이 되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4․3이 발발한 뒤 제주도는 미국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됐다. 이 끔찍한 사건을 진압하는데 로스웰 브라운(Rothwell H. Brown) 등 일부 미국 관리들이 직접 관련되어 원조·지시·감독했다. 미군 정찰기가 떠다니고 통신부대가 카메라로 폭동진압 현장을 공동 촬영하는 등 미국 개입 흔적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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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암 촘스키.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미국의 진보주의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노무현 대통령의 4․3에 대한 사과와 관련한 의의를 2003년 11월 26일 제주4.3연구소의 요청으로 보내왔다. 4․3사건과 관련 “끔찍한 비극에 대해 미국이 많은 책임이 있으며, 미국 대통령이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메시지 내용이 공개됐다. 

“나는 적어도 미국 대통령이 제주도에 가기를 희망합니다. 미국이 이 끔찍한 비극에 대해 많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부시의 측근 가운데 누가 이 문제를 대해 알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매우 쉽게 잊습니다. 그렇지만 본인의 견해로 사과는 다른 범죄행위에서처럼 단지 첫 조처일 뿐입니다. 한국에서 향후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할지는 본인이 말할 일이 아닙니다. 향후 조처들은 미국에서 취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문제는 너무 이론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조처가 양식을 가진 미국인들에게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도전적이기 때문입니다.” 

‘양이(洋夷)와의 화친(和親)은 매국이다’ 
 
미국은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의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개항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871년, 미국은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조선 원정을 결정하였다. 주청미국공사 로우(Low. F. F.)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J)에게 해군함대를 동원,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비롯하여 군함 5척에, 해병 1230명, 대포 85문을 적재하고,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함대를 집결, 조선 원정길에 올랐다. 이어 인천 앞바다에 내침하고,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조선 대표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로저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朝美) 사이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부른다.  

미국은 조선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강화해협은 국방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 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 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조·미 사이에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상륙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 등이 동원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 

결국 미군은 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거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성보(廣城堡)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수륙 양면포격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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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양요 당시 미군을 무찔렀던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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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양요 당시 포로가 된 조선 병사들.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미군의 강화도 내침은 분명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 미국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함대를 철수하였다.  조선은 조·미전쟁에서 완전 패전하였지만, 미군 함대의 철수를 곧 패퇴로 간주하였다. 미국이 남북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해군병력을 동원, 조선 원정을 단행한 지상목표는 조선 개항이었다. 그러나 조·미전쟁 결과 조선 개항은 무위로 끝났다. 

일본은 이미 1641년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상관[和蘭商館]을 설치, 유럽 열강과 교역하면서, 유럽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본은 1854년 페리(Perry, M. C.)의 미군 함대가 내침하였을 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평화리에 미일(美日)조약을 체결하였다. 

청나라는 조선이 계속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조·청(朝淸) 사이에 전통적인 조공(租貢)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하였다. 결국 위정척사 사상에 젖어 있는 흥선대원군은 조·미전쟁 직후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양이와의 화친은 매국이요 망국행위라고 경계하였다. 

‘전쟁의 축복’을 받은 나라 

“그러나 양국 간에 우호동맹 또는 통상관계가 있다는 것과. 그 선출기관의 권력남용 불법행위를 규명해야 한다는 것과는 스스로 별개의 문제에 속한다. 즉, 아무리 우방간이라 할지라도 일방의 선출기관이 타방국민의 권리를 침해한 때에는 최소한, 그에 대한 손해배상 기타의 피해보전책과 앞으로의 사고예방에 대한 적절한 보장을 요구하는 것은 국제법상의 떳떳한 행위요, 또 그와 같이 따질 것은 따지고 주고받는 것은 주고받는 것이 도리어 국제간의 우의를 오래 계속하는 소이연이 될 것이다.” - 동아일보 1957.10.7. 사설 중에서.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란, 미합중국은 북미전역을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지배하고 개발할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독립전쟁 전후의 청교도들이 광막한 토지에다 하와이까지 점령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행진해야 한다. 그것이 백인의 운명이다”라는 데서 ‘명백한 운명’은 형성되었다. 

미국은 군산(軍産)복합체의 나라이다. 멕시코 침공은 미국 석유회사의 이익, 아이티와 쿠바 침공은 내셔널 시티은행의 이익, 니카라과 침공은 국제금융회사인 브라운 브라더스의 이익, 도미니카 침공은 미국 설탕회사의 이익, 온두라스 침공은 미국 과일회사의 이익이었다.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한국에서는 기독교 신앙과 찰떡궁합으로 ‘명백한 운명’의 번식력이 왕성해진다.  미국은 스스로를 '구세주의 나라(Redeemer Nation), 세계의 십자군'으로 표현한다. 미국이 지금까지 수행한 전쟁은 300여 차례에 이른다. 1년에 평균 한 차례 이상의 전쟁을 치루고 있는 미국 전쟁의 역사는, 1만년 역사를 가진 중국의 전쟁 횟수에 비견될 정도다. 

미국 인디아나 주 상원의원(공화당) 앨버트 비버리지(Albert Jeremiah Beveridge, 1862–1927)가 1900년 미국 상원에서 미 제국을 지지하며(In Support of an American Empire)”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MR. PRESIDENT, the times call for candor. The Philippines are ours forever..."라고 시작되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필리핀은 영원히 우리 것이다...게다가 필리핀 건너편에는 중국이라는 무한한 시장이 있다...태평양은 이제 우리의 바다다.”

“태평양을 제압하는 자가 세계를 제압할 것이다...그 자리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미국이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지배할 인종이다...우리는 세계의 문명화를 담당하라는 사명을 신으로부터 위탁받은 특별한 인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역할을 방기하지 않을 것이다...신은 우리를 선택하셨다...야만스럽고 망령든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신은 우리를 통치의 달인으로 만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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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들의 모습 뒤로 역사 상 사라져 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모습이 대조되어 인상적이다. 출처=오마이뉴스.
비버리지가 자신의 조국 미국을 제국으로 선언하고, 제국의 영위를 위해 제안한 몇 가지 사안(필리핀 식민지 문제, 중국 시장 개척, 태평양 블록화)은 당시 미국 대통령 맥킨리(William McKinley, 1843-1901)의 주요 정책이었을 뿐이다. 건국 초기부터 시작된 백인·기독교 선민주의라는 미신도 이 연설문에 포함되어 있다. 

미국은 ‘전쟁의 역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나라다. 미국은 독립전쟁(1776~1783), 미국-멕시코 전쟁(1844~1846), 남북전쟁(1861~1865) 등을 통해 미국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미국-스페인 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등을 통해선 ‘글로벌 제국’으로 성장했다. 

물론 미국도 수많은 전쟁을 치르느라 헤아릴 수 없는 인명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제외하고 모든 대부분의 주요 전쟁이 미국의 땅 밖에서 벌어져 자국 땅에서 전쟁을 겪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희생이 적었다. 실제로 미국은 몇몇 전쟁은 미국의 ‘명백한 운명’과 ‘영웅적 비전’을 위해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던 ‘필연적인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심판하는 것이지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적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아마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후회의 표시로 보이는 경우에만, 그러니까 그들이 적으로 남아있기를 포기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반대의 경우, 여전히 적으로 남아 있고, 남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고집스러운 의지를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용서해서는 안 되었다.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만(나누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그를 심판하는 것이지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나치의 박해로 간신히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탈리아계 유대인 문호 프리모 레비(Primo Michele Levi)의 자서전 《주기율표》에 나오는 말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쓴《이것이 인간인가》가 대표작이다.  

프리모 레비는 1943년 12월 13일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되어, 1944년 2월 21일 다른 수용자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총 650명의 수용자가 12칸의 화물차로 이송되었으며, 그가 탄 화물칸에서는 45명 중 4명이 살아남았다.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되기 전까지 11개월을 수용소에서 보냈다. 수감자의 평균 생존 기간은 3개월. 

4.3과 너무나 빼달았다. 가해자들은 물고문․ 전기고문․ 구타․ 비행기고문 등 온갖 고문을 자행하였으며, 그리고 집단학살까지 자행하였다. 임신 6개월의 몸이었는데 고문과 구타로 8개월 만에 뱃속 아이는 사산되고, 유치장에 갇혀 52일 동안 심문하는 과정에서 심한 고문으로 난치병인 폐결핵이 발생하고, 서북청년회에 연행되어 심한 구타를 당하고 다리에 총상을 입고, 집에서 끌려가 학살당하고, 집단학살 당하고, 아아...2만 5000명에서 3만명이란다.

1987년 프리모 레비가 자신의 아파트 계단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가 자살했는지의 여부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탈리아 빨치산 조직에 합류하여 무솔리니 괴뢰 정권에 맞서 싸웠으며, 결국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으며, 연합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켰을 때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단 20명의 이탈리아계 유대인 중 한 사람이다. 

‘아우슈비츠’ 하면 뭐가 생각나는가? 4.3 당시 연행자의 취조과정에서 심한고문에 이은 집단학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우슈비츠하면 시한 없는 나치, 히틀러, 유대인, 죄수복, 강제노역, 가스실 같은 것들이 무작위로 떠오른다. ‘제주4.3’하면 계엄령, 체포, 구금, 취조, 집단학살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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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아우슈비츠 모습. 출처=오마이뉴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나와 30~40년을 더 살았고 많은 책을 썼고, 사랑하며 아이들을 낳았다. 그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수용소의 삶은 비참하게, 바닥에 짓눌린 상태였지만, 그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았다. 그런데 이러한 특수한 인간 상황에 대한 기억들을 과연 간직할 필요가 있는지, 이렇게 하는 게 잘하는 일인지 스스로 질문한다. 

그래서 4․3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의 역할을 기억해야 한다. 단 몇 개의 학대, 무시의 사례가 있다면 그것에 저항해야 하고 담론화해야 하고, 투쟁해야한다. 프리모 레비는 1987년 자살했다. 수용소에서는 '자살'에 대한 의지조차 느끼지 못했으면서, 그렇게 잘 살아오다, 말년에 자살을 한다. 왜?

'이젠 그렇지 않잖아'라는 말로 지나간 역사를 잊거나, 고통 받았던 사람들을 놓아주어선 안 된다. 4.3으로 단 한명의 고통 받는 이들이라도 있다면, 또 그 고통의 역사가 사실이었다면, 우리는 미국에 대하여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어떻게 용서하고, 화해할까?

4․3 전개과정에서 국가폭력과 과거청산, 피해자들을 기념하는 일은 우리 모두 인권을 지키는 문제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미국과 이승만 일당의 국가폭력은 제주도민을 겨냥하여 집단학살·살인·실종·고문 등을 자행하였다. 그렇다면 국가가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들을 가해자였던 국가가 주체가 되어 기념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국가폭력을 저지른 국가와, 그것을 반성해서 4․3을 추모 혹은 기념하는 국가는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만 하면 그만일까?  

화해(和解)와 통합(統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실(眞實)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즈먼드 투투(Desmond Mpilo Tutu) 대주교는 “진정한 화해는 용서에 기반을 두는데, 진실을 알지 않고서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4․3의 진정한 진실을 알지 못한다. 가해자 미국이 과연 어떤 집단이고, 이승만이 왜 도민을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라고 명령했는지 모른다. 미국이 참회와 반성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용서니 화해니 하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난센스지만, 이에 앞서 더욱 중요한 것은 진실이 무엇이냐가 아닐까.  

화해는 정의(正義)와 함께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해가 지속하지 못한다. 용서와 화해는 오직 피해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4.3피해자들에게 그 누구도 미국을, 친일군인들을 그만 용서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용서와 화해를 하고 안하고는 오직 4.3피해자의 몫이다. 그들의 침해할 수 없는 권리다.   

4.3피해자가 용서를 하고 안하고는 오직 그들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이지만, 그 용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미국과 친일군인 집단이 먼저 진실을 밝히고, 진심으로 그 잘못에 대해 참회하는 것이다. 말로만이 아니라 참회의 증거를 명확히 보여줘야 한다. 오직 그 때에만 용서의 가능성이 열린다. 

4.3진실규명과 참회가 없는 용서는 앞뒤가 뒤바뀐 것이다. 어떤 의혹도 남겨서는 안 된다. 그렇게 ‘진실’이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다음에야, 그때 비로소 도민들은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생각할 것이다. 정치인들이나 언론이 나서서 '국민통합' 운운하며 섣부른 용서와 화해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제주인과 4.3유족들은 좌절하지 않고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중앙정부와 정치권에 줄기차게 요구하여 왔다. 그 노력의 결과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 2008년 제주4.3평화기념관 개관 및 제주4.3평화재단 설립 등으로 차곡차곡 진상규명을 추진해왔다. 

특히 2013년 8월 2일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재향경우회가 모든 과거의 반목을 딛고 화해와 상생을 위한 갈등치유 노력에 적극 동참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것을 진정한 화해와 상생으로 믿지도 않고, 크게 평가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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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그렇지만 용서해야 할 주인공인 4․3유족들은 누구를 용서하고, 어떻게 용서하고, 누구와 화해해야 할지, 그 누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지 모른다. 그동안 국가는 국가로서의 양심을 버리고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일삼았다. 분명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라는 강력한 이름을 내세워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수많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심지어 생명까지도 박탈했다. 특히 제주4․3 현장에서 말이다. /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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