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교구장 15년 되돌아보는 저서 희망의 길을 걷다 펴내

종교 혹은 종교와 유사한 믿음은 인류 탄생과 함께 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다. 우렁찬 벼락이나 커다란 동물에게 투영됐던 종교의 원형은, 이제 국적과 인종을 초월하는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굳건히 자리 잡았다. 

한국은 종교 열기가 남다른 국가 가운데 하나다. 전국 어느 곳이라도 수려한 풍경이면 불교 사찰이 자리하고, 군사독재와 가파른 산업화를 거치면서 개신교는 유례 없는 거대화·기업화로 교세를 확장했다. 천주교는 특유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조하며 최근 들어 교인이 늘어나는 추세다. 여기에 잠잠하면 등장하는 사이비 종교 사건까지...국교는 없지만 가히 종교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 내 종교의 역할에 대해 ‘기복신앙’으로 설명한다. 외형상 섬기는 대상과 절차만 다를 뿐,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기원하는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종교를 ‘기복’의 영역에 묶어두기 보다는 더 넓은 범위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사회 갈등이 개인 일상에서 국가 단위로 세분화되며 심해지는 분위기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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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일 주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이런 현실에서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는 국내 어느 종교인 보다 주도적으로 사회 갈등에 목소리를 낸다. 제주4.3사건, 서귀포시 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를 비롯해 세월호 침몰사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촛불집회, 밀양 송전탑 갈등, 비정규직, 남북문제, 핵발전 문제 등을 기회가 될 때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덕분에 강 주교는 60만 제주지역 사회에서 여느 종교 성직자 이상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강 주교가 등장하는 언론 기사마다 심심치 않게 달리는 ‘정치 선동 천주교 신부’라는 식의 비난 댓글은 이를 증명한다.

그가 최근 펴낸 저서 《희망의 길을 걷다》(바오로딸)를 보면, 종교와 종교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강 주교는 입장이 첨예하게 다투거나 충돌이 벌어지는 ‘민감한’ 사안을 다룬다. 날선 비판까지 감수하며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아마도 누군가는 자신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달라고 울부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도 바깥의 국민들은 4.3에 대해 백지, 무지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아무런 이해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제주도민들이 4.3의 증인이 돼야 합니다.” - ‘제주4.3의 증인 편’ 중에

“강정 주민과 생명과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싸워온 사람들, 제주가 평화의 섬이 되기를 밤낮으로 기도하는 분들을 외면하고 정부와 군대는 군사기지 건설에만 열을 올렸습니다. 정부는 온갖 탈법과 편법을 동원했고 법을 수호하는 사법부도 그 본연의 역할을 포기하고 힘없는 이들에게만 법의 잣대를 들이대서 많은 이들이 벌금형을 받고 옥에 갇히거나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 ‘평화의 기지’ 편 중에

“하느님이 137억 년이나 되는 세월을 두고 태우고 식히고 빚어내고 살려내신 이 아름다운 별을 우리 인간은 불과 200여 년 사이에 멋대로 수탈하고 폭행하고 짓밟아 왔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오만과 만용, 무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별 구석구석에서 고통의 신음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 ‘생명의 도우미’ 편 중에

4.3, 해군기지, 세월호, 비정규직 등은 한국 사회에서 적지 않은 인원이 큰 피해를 입고 이후에 왜곡된 시선과 비난에 고통 받는 사안이다. 피해자는 명백히 존재하지만 원인이나 가해자는 그렇지 않은 문제적 구조에서, 종교는 과연 어떤 역할이어야 할까. 매주 신도들의 충성심을 높이는데 몰두해야 할까, 아니면 논란을 감수하고 개입해야 할까. 강 주교는 후자를 선택했다.

《희망의 길을 걷다》에서 말하는 화두는 2017년 지금도 유효하다. 진상규명과 배·보상이란 과제를 마주한 4.3, 구상권 청구와 사실상 ‘미군기지’인 제주해군기지, 전 지구적 과제인 핵발전 문제, 그리고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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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주교가 전파하려는 핵심은 ‘평화’다. 비록 스스로를 지킬 무력과 힘은 있어야 하나, 그것에 매몰돼 극단적인 경쟁으로 치닫지 말고, 타협과 협상으로 평화의 씨앗을 틔워내자는 주장이다. ‘이명박근혜’ 9년과 김정은, 트럼프, 아베, 시진핑 정권이 충돌하는 '화약고' 동아시아에서 강 주교의 메시지는 더 이상 공허하지 않다.

“우리가 평화를 원하고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살기를 원한다면 고강도의 무기를 쌓아올릴 일이 아니라, 협상을 하고 대화를 해야합니다.” - ‘평화의 기지’ 편 중에

사회 문제를 꾸준히 다뤄온 만큼, 강 주교의 글은 딱딱하지 않다. 상당수 글이 남녀노소 모두에게 전달하기 위해 쓰인 미사 강론, 기념일 메시지라 쉽게 읽혀진다. 천주교(혹은 기독교)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낯선 내용이 종종 등장하나 크게 불편한 수준까진 아니다. 2002년 제주에 오기 전까지는 4.3의 진상을 몰랐다는 고백은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저자는 일본 동경 상지대 철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황청 우르바노 신학대학에서 수학했다. 1974년 사제품을 받고 서울대교구 교육국장, 난곡동 주임을 맡았다. 1986년 주교로 서품됐고 1995년에 가톨릭대학교 초대 총장, 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를 역임했다. 

주교회의에서는 전례위원회, 성서위원회, 민족화해위원회, 이주사목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2년에 제주교구장으로 임명됐고 주교회의 부의장,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위원장과 주교회의 의장을 맡았다. 현재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에 《강우일 주교와 함께 걷는 세상》, 《기억하라, 연대하라》가 있고, 옮긴 책에 《사람 서리에서》가 있다.

299쪽, 1만2000원, 바오로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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