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이 흘렀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강행으로 빚어진 강정마을 공동체가 두 동강 난 세월이다. 2007년 4월26일, 소위 ‘박수 총회’로 비유되는 강정마을 임시총회에서 해군기지 유치 결정을 수십명이 박수로 결정한 것부터 잘못 꿰어진 비극이었다. 그동안 마을은 찬반으로 갈라져 깊은 상처만 남았다. 주민 설득 없이 국책사업을 강행한 정부와 국방부, 무책임한 제주도를 향한 주민들의 분노가 여전하다. 조기 대선을 앞두고 강정마을 공동체 복원과 명예 회복이 주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생명평화마을, 강정의 지난 10년’을 총 12차례의 기획으로 짚어봤다. <편집자 주>

[생명평화 강정 10년] ⑨ 본격공사 신호탄 ‘구럼비 발파’...마을은 ‘공포 분위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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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3월 7일 강정마을 구럼비로 향하는 길을 뚫기 위해 1000명이 넘는 경찰력이 동원됐다. 경찰은 주민과 평화활동가, 성직자, 정치인 등 가리지 않고 길 위에 있던 이들을 연행했다. 사진은 경찰에 끌려가는 송영섭 목사. ⓒ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12년 3월 7일 아침, 조용했던 제주 서귀포의 한적한 농촌마을 강정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구럼비만은 안된다”며 자리를 지키던 주민들과 평화활동가는 물론 전직 국회의원과 현직 도의원, 성직자들까지 경찰에 연행됐다. 곳곳에서 비명과 함께 울음소리가 쏟아졌다. 압도적인 경찰병력에 손을 맞잡고 버티던 이들도 끝내 끌려갔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자 주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구럼비 발파’. 이는 이후 4년 넘게 강정이 겪어야 할 끔찍한 시간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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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3월 7일 강정마을 구럼비로 향하는 길을 뚫기 위해 1000명이 넘는 경찰력이 동원됐고 주민과 평화활동가, 도의원 등이 마구 잡혀갔다. 마을은 순식간에 공포 분위기로 변했다. ⓒ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간곡한 호소에도 눈 깜빡도 않은 정부

서귀포 강정 앞 바다는 수려한 경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중심엔 ‘구럼비’가 있었다.

1.2㎞에 달하는 한덩어리 용암단괴인 구럼비 바위는 멸종위기종인 붉은발말똥게의 대규모 서식지였다. 구럼비라는 이름은 해안가에 구럼비나무가 많다는 데서 유래했다. 구럼비는 ‘까마귀쪽나무’의 제주어다.

구럼비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용천수는 과거 강정 주민들의 식수원이었고, 이 중 ‘할망물’은 제사를 지낼 때 정화수로 사용될 정도로 성스럽게 여겨졌다. 강정 주민들에게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으로 여겨질 만큼 상징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2009년 당시 여당(한나라당) 제주도의회 의원들의 ‘날치기’ 통과로 절대보전지역에서 해제되는 등 국책사업 앞에서 구럼비를 지킬 제도적 방어막은 하나 둘 씩 제거됐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과정을 되돌아 볼 때 2012년 3월 7일 구럼비 발파는 공사가 본격화된 기점으로 꼽힌다.

높아지던 반발 여론과 긴장감에도, 지역사회에서 ‘공사를 미뤄달라’는 총의가 모아졌음에도, 정부가 굳이 공사를 강행한 것은 당시 이명박 정부가 사업 추진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풀이된다.

구럼비 발파를 10여일 앞둔 2012년 2월 21일. 김황식 국무총리가 페이스북에 “이제 그만 논란을 끝내자”고 밝힌 데 이어, 23일에는 우근민 지사를 총리실로 불렀다. 당시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비밀에 부쳐졌다.

제주를 넘어 전국 정당, 종교계, 문화예술계, 학계에서 대대적으로 “구럼비 폭파는 안된다”고 외쳤지만 해군은 절차를 이어나갔다. 이전에도 산발적으로 구럼비 파괴는 진행되고 있었으나, 화약을 사용해 구럼비를 대대적으로 폭파한다는 것은 마을주민들로서는 사실상 선전포고와 같았다.

3월 5일 뒤늦게 우 지사가 공사를 잠시 멈춰달라는 요구를 했으나 국방부와 총리실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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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3월 7일 강정마을 구럼비로 향하는 길을 뚫기 위해 1000명이 넘는 경찰력이 동원됐다. 당시 김영심 통합진보당 도의원(가운데 목도리)도 경찰에 연행됐다. ⓒ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극렬한 저항...무더기 연행...강정은 전쟁터

2012년 3월 6일. 구럼비 발파를 하루 앞두고 강정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마을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 야당 도의원들, 지역구 현역 국회의원, 당시 총선을 한 달 앞둔 예비 주자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주민과 평화활동가들은 폭파용 차량의 진입을 막기 위해 쇠사슬로 몸을 묶고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별 다른 수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자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의 한 화약공장에서 폭약을 실은 트럭과 이를 호위하기 위한 호송 경찰버스가 강정을 향하기 시작했다. 진입로를 확보하기 위해 경찰은 행동에 들어갔다. 투입된 공권력은 일사천리로 사람들 틈을 파고 들었다.

곳곳에서 울부짖음과 탄식이 쏟아졌다. 육지부 응원경찰까지 동원해 1000명이 넘는 공권력은 순식간에 주민과 평화활동가들을 제압했다. 강정을 지키기 위해 몰려든 100명이 넘는 이들은 하나 둘 씩 경찰에 연행됐다. 현애자 전 국회의원과 김영심 당시 도의원도 끌려갔다.

이날 정동영 통합민주당 전 최고위원과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제주지역 국회의원 3인, 야당 도의원들은 “강정 참사를 막아야 한다”며 폭파를 강행한 해군을 맹비난했지만 이날 오후, 구럼비에서는 연달아 폭발음이 들렸다.

주민들은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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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파되기 전 강정 구럼비의 모습. 시민사회부터 정치계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이 무리한 공사 추진을 멈추라고 요구했지만, 정부는 밀어붙이기로 일관했다. 현재 사진과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구럼비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구럼비 폭파 후 3일 동안 연행된 주민과 평화활동가, 정당인 등은 55명에 이른다.

구럼비 발파 이후로 강정마을에서는 주민·평화활동가와 해군·시공업체 간 충돌이 일상화됐다. 공사를 막던 마을 주민들이 끌려간다가나 경찰들이 상시로 마을에 배치돼 공포 분위기가 극대화된 것도 이 이후다.

강정주민들은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지만, 국책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밀어붙이기가 계속됐다. 숱한 갈등을 뒤로하고 2016년 2월 제주해군기지는 완공됐다.

마을 주민들에게는 각별한 존재였던 구럼비는 이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고, 남은 건 파괴된 마을 공동체와 3억원이 넘는 벌금, 정신적 외상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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