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이 흘렀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강행으로 빚어진 강정마을 공동체가 두 동강 난 세월이다. 2007년 4월26일, 소위 ‘박수 총회’로 비유되는 강정마을 임시총회에서 해군기지 유치 결정을 수십명이 박수로 결정한 것부터 잘못 꿰어진 비극이었다. 그동안 마을은 찬반으로 갈라져 깊은 상처만 남았다. 주민 설득 없이 국책사업을 강행한 정부와 국방부, 무책임한 제주도를 향한 주민들의 분노가 여전하다. 조기 대선을 앞두고 강정마을 공동체 복원과 명예 회복이 주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생명평화마을, 강정의 지난 10년’을 총 12차례의 기획으로 짚어봤다. <편집자 주>

▲ 2007년 4월26일 강정마을 임시총회에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날 총회는 절차상 정당성 문제가 심각한 총회로서 강정 해군기지 찬반 갈등 비극의 시작이었다. 당시 마을주민 1900여명 중 단 87명만이 참석해 박수로 만장일치 통과시킨 임시총회 후 참석 주민들이 마을회관을 빠져 나오는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생명평화 강정 10년] ② 2007년 4월26일 마을총회...불과 87명 참여 정당성 논란

2007년 4월26일 강정마을의 10년 비극이 시작됐다. 이날 저녁 불과 87명의 주민이 군사작전하듯 마을 임시총회를 열고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안건을 통과시켰다.

처음엔 누구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안덕면 화순항에 이어 남원읍 위미항이 해군기지로 찬반 갈등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유치 선언은 '성동격서' 격으로 위미항으로 가기 위한 디딤돌로 여겨졌다. 

제주해군기지는 1993년 국방부 합동참모회의에서 결정된 이후 10년간 논의가 없다가 2002년 안덕면 화순항으로 추진됐었다. 하지만 지역주민 반대로 그 해 12월 '화순항 해군기지' 추진은 중단됐다.

해군은 3년이 지난 2005년 3월, 2014년까지 8000억원을 투입해 함정 20여척이 정박하는 해군 기동함대 작전기지로 '화순항 해군기지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김태환 제주지사는 7월 '화순항 해군기지 논의 중단'을 선언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화순항은 물건너 간 것이다.

잠잠해질 줄 알았던 해군기지 논란은 남원읍 위미1리에서 유치 찬성을 하면서 불이 번졌다. 해군은 2005년 10월 위미항 해군기지 타당성 조사 착수를 발표했지만, 국회 예결위에서 예산 5억6000만원이 전액 삭감됐다.

2006년 5월 해군기지 위미추진위가 결성됐고, 그 해 8월30일 해군은 '해군기지 건설을 위한 기초영향평가'에 착수했다. 김태환 지사는 도의회 시정연설에서 "11월 기초조사를 토대로 공론화 후 최종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2006년 12월 국회는 해군기지 예산 120억원을 삭감하고, '도민동의'를 부대조건으로 기초조사 예산 20억원을 책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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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4월27일, 당시 윤태정 강정마을회장(오른쪽)이 제주도를 찾아 김태환 지사에게 해군기지 강정 유치를 건의하고 있다. 
이 때부터 해군기지 찬반 도민대토론회가 개최됐고, 해군은 2007년 2월7일 '위미1리 해군기지 건립 사전타당성 조사'를 위한 기초조사에 착수했다.

해군은 40일만인 3월12일 위미1리 기초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해군기지 조감도까지 제시했다. 잠잠했던 위미1리는 마을총회를 통해 반대 입장을 천명했다. 

위미리 주민들은 4월6일 제주도청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김태환 지사는 4월10일 여론조사로 해군기지를 결정하고, 5월 중 최종 결정하겠다는 '해군기지 로드맵'을 발표했다. 

솔직히 이때까지 해군기지는 안덕 화순항과 남원 위미항이 유력 후보지였다. 해군도 해군기지 최적지는 화순과 남원 위미항이라고 밝혔었다.

하지만 극적인 반전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을회장과 어촌계를 중심으로 한 인사들이 2007년 4월26일 오후 7시30분 강정마을 마을회관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해군기지 유치' 안건을 통과시켰다. 

임시총회는 철저하게 비공개로 진행됐고, 회의 과정과 내용은 물론 결과까지도 비밀에 부쳐졌다. 1시간 10분 동안 논의 끝에 '만장일치 박수'로 유치 의견에 동의한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당시 마을회장이었던 윤태정씨 등은 27일 오전 9시30분 김태환 지사를 예방, 해군기지를 유치하겠다는 건의문을 전달했고, 오전 10시 제주도의회 도민의방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유치한다고 선언했다.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유치를 선언한 지 불과 3일만인 4월30일 국방부는 "강정마을 군항 건설이 가능하다"며 "검토가 끝났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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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4월26일 강정마을 임시총회에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날 총회는 절차상 정당성 문제로 강정 비극이 시작된 날이었다. 이튿날인 27일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을 찾아 해군기지 유치 결정을 발표하는 당시 윤태정 강정마을회장(가운데).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 결정을 내리는 마을 임시총회가 전날 저녁에 열렸고, 이튿날인 4월27일 오전 10시 도민의방에서 '해군기지 유치 결정' 기자회견 현수막까지 준비하는 등 일사천리로 유치 과정이 진행됐다. 
제주도는 5월3일과 4일 제주도 해군기지 여론조사에 남원읍과 안덕면, 강정마을이 속한 행정동인 대천동 3개 지역에 대한 1차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10~12일 2차 여론조사를 거쳐 14일 김태환 지사는 "강정마을을 해군기지 최우선 대상지로 선정했다"고 전격 발표했다.

국가안보를 위한 국책사업으로 100년 대계를 결정할 해군기지 결정은 불과 20일만에 이뤄졌다. 화순에서 위미, 강정까지 5년 동안 끌어왔던 '뜨거운 감자' 해군기지가 20일만에 끝난 것이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결정에는 국방부와 제주도, 그리고 강정마을 임원과 어촌계를 중심으로 한 커넥션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윤태정 당시 마을회장은 해군기지 유치 기자회견에서 "해군기지는 이영두 시장 때 부터 논의해 왔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주도와 국방부는 '제주해군기지 양해각서'를 몰래 작성했다가 들통났다. 당시 유덕상 행정부지사는 "국방부와 해군기지 양해각서를 추진하지 않았다"고 했다가 , 공개되자 "양해각서는 국방부가 작성했다"고 해명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해군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막기 위해 해녀와 어촌계를 대상으로 집중 로비한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어촌계 해녀들에게 1억원씩 보상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제주도의 해군기지 여론조사도 엉터리 투성이었다. 제주도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 감사위에 감사를 의뢰한 결과 '여론조사 계약 미비', '조례 위반', '예산전용'이 사실로 드러나 여론조사에 참여한 공무원 4명에게 징계를 요구했다.

4월26일 강정마을 임시총회 자체도 정당성이 없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유치 반대위원회는 "마을총회 당시 안건은 '해군기지 관계의 건'으로 '유치'란 말을 빼 불분명하게 했고, 강정동 주민 1500명 중 86명만 참석한 가운데 사안을 결정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마을주민 동의없이 일부 주민과 행정, 군당국의 짬짜미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일사천리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한 것은 10년 비극의 시작이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 제주에서 가장 살기좋아 '일강정'으로 불리던 강정마을이 찬반으로 형제자매가 나뉘고, 제사 명절도 따로 지내는 사이가 됐다. 

주민과 평화활동가 수백명이 사법처리됐을 뿐만 아니라 제주사회 역시 강정 갈등으로 상흔의 10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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