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6) 강철도서관 / 서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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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연미

그가 읽는 책들은 거의 금속성이다
침 바른 기계칼로 책장 넘기다 보면

어쩌다 늙은 당나귀
말라 죽은 파리 한 마리

누군가 물어뜯는 상처도 듬성 있다
강철로 만든 책을 무슨 수로 뜯었는지

칼날이 스칠 때마다
뜨겁게 책이 운다

델 것처럼 서러워 그만 덮고 싶었지만
그래도 읽어야 사는 비정규직 인부 멀리

들깨 밭 까만 깨들이
톡,톡, 튀고 있었다

-서정택 <강철도서관> 전문-

‘금속성’에는 물기가 없다. 날카롭고 뾰족하고 단단하다. 촉촉한 숨결이나 부드러운 살결이 스며들 여지도 없다. 파리조차도 ‘말라 죽’는 곳. 그가 사는 곳이다. 마른 침을 발라가며 겨우 넘기는 책장. 팍팍하고 힘들다. 베이고, 데이고, 찔리는 일은 다반사. ‘칼날이 스칠 때마다 / 뜨겁게’ 눈물이 흐른다. 금속성 책속의 ‘물기 없음’을 채우기 위해 눈물과 피와 땀이 그렇게 흥건한 것인가. 

‘델 것처럼 서러워 그만 덮고 싶었지만/ 그래도 읽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 서러움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금속성 책장을 넘기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식물성 가득한 책장을 넘기더라도 가슴 깊숙이 들어앉은 저 서러움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다는 것. 이 시의 감동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거기다 ‘비정규직’ 아닌가. 덮고 싶을 때 덮지 못하는 것, 서러운 것들이 모두 이 단어에 와서 공감이 증폭 된다. 누군들 약속 받은 미래가 있겠는가마는 희망의 빛 한 줄기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높은 문턱으로 가로놓여 있는 ‘비정규직’이라는 이름. 우리 사회의 명암을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늘 더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은 독자들에게 믿음을 준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대선주자들의 공약이 연일 쏟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 믿음이야말로 백 마디의 말보다 더 소중한 한 표로 귀결이 될 것이다. 쇳소리 가득한 날들로 페이지를 채운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의 서러움을 어루만져주는 것이 한 편의 시가 아니라 사회적 제도와 그 제도에 대한 확실한 이행이기를 기대해 본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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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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