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54) 윌리엄 셰익스피어 『코리올라누스』  /이유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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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 『코리올라누스』, 신정옥 역, 전예원, 2002

1. 대선 토론의 품격

지난 몇 주간 미세먼지, 사드, 박근혜, 경제난 등등의 문제로 거의 녹초가 되다시피한 몸과 마음에 그나마 기운을 불어 넣어 주었던 것은 코미디 프로그램보다 우습고 재미있다는 대선 토론이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토론을 마치 오락 프로그램을 보듯이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오랜 동안의 촛불 시위가 드디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일종의 안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능한 대통령은 탄핵되었고, 주변에서 불법과 부정을 저지르던 무리들은 감옥에 갔으며, 우리는 이제 민주적인 제도와 절차에 따라서 평화롭게 다음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짧은 민주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성과를 이루어냈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앞으로의 과제는 두 번 다시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제도와 법을 정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국민들은 그런 개혁을 수행할 후보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그간의 고단한 실천을 일단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이제 곧 새로 선출될 대통령에 대한 환호와 기대로 인해 잊히기 전에 재미는 있었으나 씁쓸한 뒷맛을 남긴 대선 토론의 장면들과 관련하여 떠오른 엉뚱한 생각을 언급하고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대선 토론은 필자의 눈에는 매우 낯설고, 우습고, 모순적인 해프닝이었다. 후보자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가장 적임자이며 다른 후보자들은 모두 부적격자라는 것을 강변했다. 이것은 아마도 토론의 가장 근본적인 규칙이었을 것이다. 이 규칙을 충실히 지켰다는 점에서 모든 후보자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규칙을 지키지 않는 후보가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지지자들로부터 심한 질책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자신을 높이고 상대방을 깎아 내리는 것이 근본적인 규칙으로 작동하는 토론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그 규칙에 충실한 토론자들은 급기야 노골적인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저급한 언행에 익숙하지 않은 어떤 후보자들은 아마도 심한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것이 민주주의 제도가 만든 공정한 절차요 과정이라면 뭔가 모순적이다. 민주주의란 모든 사람의 개성을 존중하고, 평등한 인격권을 보장하기 위한 체제가 아닌가? 그런 체제를 이루기 위해 정치가들이 자신을 높이고 상대를 깎아내리도록 강제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그런데 자신을 높이고 상대를 폄하하는 일은 대선 토론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늘 강요되고 있는 저열한 경쟁의 규칙이다. 요즘 취업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은 소위 ‘자소설’이라고 말하는 자기 소개서를 쓰는 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신이 얼마나 능력 있고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인지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낯 간지러운 일인가, 그리고 그것은 벼는 익을수록 스스로 고개를 숙인다는 가르침과 맞지도 않는다. 학생들은 취업을 하기도 전에 자신들이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이 사실은 거짓이며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자소설을 쓰면서 체득하게 되는 셈이다.
 
스스로의 능력과 덕을 감춤으로써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을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죄악시하기까지 하는 사회는 모든 사람의 개성과 자율성을 존중해야할 민주주의에 도달하지 못한 덜 성숙한 사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트럼프, 두테르테, 아베 같은 지도자가 민주적인 제도에 의해 선출되는 것을 보면 오늘날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삶의 규칙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2. 품위를 지켜주는 사회

셰익스피어의 고전 『코리올라누스』의 주인공 코리올라누스는 너무나도 탁월한 덕성을 소유한 인물이라서 스스로를 높이는 저급한 행동을 거부한 결과 파멸에 이르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용맹스런 장군으로서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로마를 늘 승리로 이끌었다. 원로원은 그를 집정관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는데 집정관이 되고자 하는 자는 시민들의 대표인 호민관들의 승인을 얻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시민들에게 자신의 업적을 선전하고 인정받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코리올라누스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업적을 설명하고, 자신의 손으로 전쟁에서 입은 상처를 들추어 보이는 등의 행동을 하느니 차라리 집정관이 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모든 시민이 이미 알고 있는 자신의 영웅담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일은 고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늘 그렇듯이 셰익스피어는 이 인물을 여러 방면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창조했다. 코리올라누스는 타고난 전사로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용맹함을 지닌 인물이다. 전쟁에서 그를 이길 자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탁월한 장군이라는 점을 알지만 그것이 일반 시민들에게 자랑할 만한 거리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로원과 호민관들은 그에게 시민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인정을 받을 것을 요구하지만 그는 자신의 탁월함이 시민들의 인정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전공에 의해서 입증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코리올라누스의 이러한 태도는 귀족 출신인 그가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거부하고 그들을 무시하는 오만함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작품 속에서 그는 시민들에게 자신의 전과를 알리고 상처를 내보이는 등의 시도를 하지만 곧 그것이 자신과 같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겨, 자신에게 그런 일을 요청하는 시민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코리올라누스는 겸양의 덕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할 수도 있다. 원로원과 호민관은 그에게 겸손을 요구했지만 강요된 겸손은 겸손이 아니다. 그는 애초에 자신을 누구와 비교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코리올라누스는 니체의 초인을 닮고 있다. 초인은 너무나도 강하고 고결해서 다른 사람과 스스로를 비교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겸손을 가장하면서 스스로가 남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말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그가 가진 모든 고결함을 부정하라는 요구와 같다. 

정치인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그가 가진 고상한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내던지고 밑바닥을 드러내도록 강요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민주주의란 자신을 화려한 상품으로 포장해서 잘 팔리도록 전시할 줄 아는 사람이 칭송받고, 자신이 가진 탁월함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비난을 받는 사회를 일컫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은 모두 스스로를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내다 팔 것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천박한 규범에 불과하다. 민주주의가 더 진전을 이루어, 효용성과 경쟁 등과 같은 가치 대신 존엄성과 협력 등과 같은 가치가 지배적이 된다면 품위 있는 사람들의 품격 있는 토론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소한 생각을 해 본다. / 이유선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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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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