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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함께했던 동료 ‘천영초’ 통해 지난 시간 돌아보는 회고록 《영초언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서명숙(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이란 인물은 제주올레를 만든 당차고 자유로운 여장부다. 앞서 <시사저널>, <오마이뉴스>에 몸담은 언론인이었다는 과거는 비교적 조금 알려졌고, 1970년대 대학생 시절, 삼엄했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 언제나 알록달록한 두건을 머리에 질끈 묶고 다니는 서명숙만 알고 있는 이들에게 반갑고 의미 있는 책이 등장했다. 쉽게 꺼내보지 못했던 과거를, 인생에 있어 중요한 인물 ‘천영초’를 통해 돌아본 《영초언니》(문학동네)다.

이 책은 서 이사장이 그동안 펴낸 《제주올레여행》(2008),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2010),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2015) 같은 저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1976년 고려대 교육학과에 입학한 41년 전 여대생 서명숙으로 돌아가 그때를 기억하는 일종의 회고록이다. 무엇보다 같은 학교 4년 선배였던 실존인물 천영초(신문방송학과 1972년 입학)를 중심에 두고 써 내려갔다.

서 이사장은 천영초라는 선배에 대해 “담배를 처음 소개해준 나쁜(?) 언니였고, 이 사회의 모순에 눈뜨게 해준 사회적 스승이었고, 행동하는 양심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준 지식인의 모델”이라고 설명한다. 고은 시인이 1997년 펴낸 <만인보 14>에도 천영초를 소개할 만큼 민주화 인사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만인보 14

천영초

70년대는 ‘위대한 성장’으로 치달았다
70년대 후기는
소위 유신 제2기로 치달았다
그런 시대
공장에 들어간 여학생
먹물이라 했지
학필이라 했지
그런 대학생들이 하나둘
숨 콱 막히는 공장으로 들어갔다
차라리 감옥보다 더 열악한 공장으로

경제학도 김근태가 들어갔고
미국에서 예일대 졸업생 김난원이
동일방직에 들어갔고
김영준도 울산 공장에 갔는데

여학생 천영초
그도 공장으로 들어가
공순이가 되었다

의식화라니
들어간 그들이 도리어
공장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

프레이리의 말
지식인은 현실을 배우고
민중은 이론을 배우는 교육의 현장이었다

하는 일마다 잘난체 없이 든든했다
마음놓았다
뒷날 정문화의 아내가 되었던가

서 이사장은 박정희 유신 선포, 긴급조치 발동, 동일방직 노조 똥물 사건, 박정희 암살,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에서 선배와 함께 했던 지난 과거를 풀어낸다. 

그동안 서 이사장이 보여준 아름다운 산티아고, 제주올레, 제주해녀 이야기와 달리 《영초언니》에서는 당시 경찰들이 가한 협박과 고문, 성동구치소에서의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담겨있다. 

그들은 입만 열면 천영초가 얼마나 나쁜 년이고 악질인지, 순진한 시골뜨기인 나를 얼마나 나쁜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는지를 열거하기에 바빴다. 내가 듣기 싫어서 도리질 치면 그들은 ‘네가 이러는 거야말로 천영초에게 세뇌됐기 때문’이라면서 내 순진함을 비웃고 조롱했다. ('5장 지옥에서 보낸 한철' 중에서)

삼엄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피어난 사랑 이야기, 학교 내 남성중심적인 문화에 맞선 동아리 활동 등 서명숙 개인에 대해 하나둘 알아가는 재미도 선사한다.

책 말미에는 불꽃같던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달라진 현실에 느끼는 좌절이 녹아있다. 민주투사에서 다단계 사원으로 변하고 끝내 세 살 아이 지능으로 돌아간 천영초, 동지적 관계였던 천영초·정문화 부부의 파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보며 느끼는 실망감 등이 그것이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는 노래 가사처럼, 이름 없는 투사들은 세월의 힘에 밀려나고 있지만 몸과 마음을 내던진 그들의 노력은 계속 기억되고 있다. 서명숙의 《영초언니》는 유래 없는 시민혁명인 촛불집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정권교체를 이룬 오늘날, 시민들이 거리로 나설 수 있게 만든 수많은 이들의 피눈물 섞인 노력을 기억해달라는 간곡한 외침이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386’으로 대표되는 지난 민주화 세대와 촛불로 대표되는 시민 세대가 느끼는 정서적 간격은 분명 존재한다. 중년 나이를 지나는 독자에게 《영초언니》는 쓰린 기억을 되살리는 일기장, ‘2040’ 청년 독자에겐 부조리했던 한국 현대사를 생동감 있게 들려주는 교과서가 될 것이다. 

오래 전부터 마음 먹어온 집필 작업이었고 악몽 때문에 원고 쓰기를 몇 차례 중단할 만큼 공들여 탄생한 결과물이기에, 저자·독자 모두에게 의미 있는 책이 되리라 본다.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는 “변방 중의 변방인 제주도의 말 ‘올레’를 표준어로 만든 사람. 그가 서명숙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안다. 그러나 서명숙이 군사독재에 맞서 줄곧 매운 글을 썼던 참언론인이었던 것은 많이 잊혀졌다. 그리고 그가 저 무시무시한 유신독재에 맞선 투사로 감옥살이까지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며 “우리가 더 온전한 ‘민주세상’을 갈망한다면 필히 이 《영초언니》를 읽어야 한다. 영초언니의 희생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역사에 대해 책임지는 마음으로”라고 책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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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명숙 이사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고려대 교육학과 재학 시절,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연행돼 236일간 구금생활과 감옥살이를 했다. 수감 이력으로 인해 한동안 정규직으로 고용되지 못하고 프리랜서 기고가로 일하다가 1983년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시사저널>과 <오마이뉴스> 편집장 등을 역임하며 23년간 언론계에 있다가, 2007년 제주로 돌아와 올레길을 만들었다. 현재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제주올레의 성공신화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한국 최초로 사회적 기업가의 최고 영예인 아쇼카 펠로에 선정됐다.

문학동네, 288쪽, 1만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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