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밥상 이야기> (39) 돔베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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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돔베고기. ⓒ 김정숙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흐른다. 비 그친 사이 내리쬐는 볕살은 따끔따끔하고 구름에 싸인 해는 뭉근뭉근 찐다. 비가 내려도, 내리지 않아도 습한 기운은 온 정신과 몸을 짓누른다.

요즘같이 다양한 농작물로 농업경영을 하는 농업의 시대는 장마철도 바쁜 농가가 있다. 하지만 식량작물 중심의 농사 시절에 장마철은 한가했다. 남자들만 한가했다는 게 정확할지 모르겠다. 우후죽순이 따로 없었다. 때와 장소, 날씨를 불분하고 자라는 잡초들과의 전쟁은 여자들 몫이었으니. 삼삼오오 수눌어 가며 그 더운 밭고랑을 호미자루 하나로 일궈낸 어머니들이 있었기에 나는 오늘 밥을 먹는다.

일이 밀리고 무섭게 자라는 잡초가 콩, 고구마를 삼켜도 비오는 날은 어쩔 수 없었다. 강제 휴가다. 비가 싱숭생숭 하는 날은 돼지추렴을 하기에 딱 좋았다. 수확이며 파종이며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몸이 먼저 고기 고프다는 신호를 보내오는 것이다. 장기, 바둑을 두거나 막걸리를 걸치던 자리에서 의기투합하기도 하고 기일제사 준비 차 고기가 필요한 사람이 주동을 하기도 했다.

돼지는 잔치를 준비하여 키우는 집은 놔두고, 혹시 동네 큰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좀 큰 것도 한두 집 놔두고, 소비에 무리가 없는 적당한 크기를 흥정하여 한 마리 잡는다. 경비도 모으고 돈도 모으는 남자들의 문화다.

족발도, 돼지머리도 아담했다. 필요한 부위나 고기를 우선 나누어 팔고 남은 부위 중에서 조금 떼어내 삶는다. 삶은 고깃덩이를 도마 위에 올리고 자르면서 한두 점씩 집어 먹기도 하고 아이들도 집어주고, 안주삼아 잔술도 기울인다. 이게 돔베 추렴의 백미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돔베고기인 듯하다. 칼로 자르면서 그릇에 옮기지 않고 도마 위에서 먹는 고기. 돔베는 도마를 이르는 제주어다.

돼지고기는 삶아서 따뜻할 때, 더운물이 마르지 않을 때가 촉촉하고 맛있다. 양껏 먹지도 못하고 어쩌다 맛보는 고기 맛이야 두말해 무엇 할까. 제주산 돼지고기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굳이 양념이니 숙성이니 하는 고급진 과정을 거치지 않은 날거 그대로 삶거나 굽거나 익히기만 하면 그만이다. 배부른 자만 빼고.

하지만 인류가 생존하는 한 혀끝의 진화는 막을 수 없다. 맛은 배부른 자들에 의해 진화한다. 돔베 추렴에서는 똑 같던 고기값이 부위별로 가격이 달라진 건 이미 오래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돼지고기는 우리 곁에서 만만하면서 맛있게 군림한다.

돔베고기가 그토록 맛있었던 건 젓가락을 놓지 못하던 아쉬움 때문이었으리라. 넘치지 않는 까닭이리라. / 김정숙(시인)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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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 시인은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출신이다.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서 당선됐다. 시집으로 <나도바람꽃>을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년 동안 제주도농업기술원에서 일하다 2016년 2월 명퇴를 하고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 ‘제주 밥상 이야기’를 통해 제주의 식문화를 감칠맛 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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