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제주형 도시재생, 길을 묻다] (4) 오사카 슬럼가에 '예술'로 변화 일게 한 NPO 코코룸

예술과 원도심의 접점을 찾다

도시재생, 마을만들기, 커뮤니티 비즈니스. 최근 화두인 새로운 지역 활성화 방식은 하드웨어 중심 개발에 대한 염증에서 비롯됐다. 단순히 예산을 쏟아붓고 각종 시설을 짓는 것만으로는 어떤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없다는 것을 행정당국도 깨닫게 된 것이다. 일본은 1990년대 장기불황 이후 수많은 지역들이 위기에 몰리면서 이런 새로운 지역 활성화 모델이 자리를 잡았다. <제주의소리>가 최근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살펴본 그들의 삶의 모습은 제주가 추진 중인 도시재생과 마을만들기 사업 등에 주는 시사점이 분명했다. 장기 연속기획으로 국내외의 다양한 도시재생 성패 사례들을 현장 취재해 소개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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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린지구 한복판에 위치한 아이린노동공공직업안정소. 매일 새벽 이 곳엔 하루짜리 일을 찾기 위해 300~400명이 몰린다. 무더운 여름 한낮에도 이 앞에서 누워있는 노숙자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제주의소리

오사카 중심부의 남쪽, 전철을 타고 신이마미야 역에 내리자 '고도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과는 왠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뭔가 쾌쾌하지 않나요?”라는 일행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오사카 아이린 지구다. 이곳은 초행자는 피해야 하는 ‘무서운 지역’으로 꼽힌다. 

지난 1960년대부터 오사카 아이린 지구는 일용직 노동자들과 노숙자들이 몰려 살았던 곳이다. 자연스럽게 폭력조직인 야쿠자들이 건설현장을 관리했고, 용역업체까지 운영했다. 야쿠자들로부터 일당을 제때 받지 못하거나 폭행을 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때문에 20여 차례의 폭동과 경찰과의 대치 등도 잦아 일본에서 아이린 지구는 '무서운 동네'로 통한다. 흔히 말하는 우범가다.

일본 경제의 장기불황으로 건설경기도 가라앉으면서 이 곳으로 모여들었던 일용직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됐다. 60년대 30~40대였던 이들은 지금은 70~80대의 고령의 노숙자 또는 생활보호대상자로 전락했다. 일본은 비교적 저소득층을 위한 정부지원금이 한국보다 훨씬 많은데, 이들은 그마저도 술과 도박으로 탕진할 뿐이었다. 그러다 가족도 없이 쓸쓸히 혼자서 죽어갔다.

오사카 시 입장에서도 아이린 지구의 슬럼가는 골칫거리였다. 시인인 우에다 카나요 씨(49)가 이 일대 슬럼가의 이야기를 듣게된 건 지난 2003년이다. 당시 30대의 젊은 여성시인이었고, ‘참여하는 예술’을 추구하던 카나요 시인에게 오사카 시는 텅 빈 채 방치되는 슬럼가의 건물에 ‘무언가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현장에 뛰어드는' 예술을 지향해온 카나요 시인이 이를 수락한다. 예술 NPO단체인 코코룸(COCOROOM)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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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 아이린지구 한복판에 위치한 아이린노동공공직업안정소. 이 건물에는 일용직 노동자들을 위한 직업안내소와 노숙인들의 쉼터 등이 자리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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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예술 NPO 코코룸이 아이린지구에 처음 문을 연 카페 코코룸. 현재 코코룸은 이곳에서 가까운 인근으로 이전해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를 새롭게 문을 열었다. 카나요 시인은 원래 운영하던 코코룸 카페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대신 원래 상호와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해줄 것을 부탁했다. ⓒ 제주의소리


장례식에 누군가 오기 시작하다

카나요 시인은 아이린 지구의 주변 낡은 건물들 사이에서 시인의 감각을 살려 독특하고 눈에 띄는 카페를 열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일용직 노동자들이나 노숙자들에게 문턱을 낮추고 편안함을 주는 게 코코룸의 지향점이었다.

처음엔 노숙자나 생활보호대상자들도 이 지역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듯한 코코룸 공간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곧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 둘 사람이 모였다. 그러자 카나요 시인은 바로 다음 스텝을 시작한다.

'카마가사키(釜ヶ崎) 예술대학'이다. 일본 내 정규대학 교수들과 코코룸이 연합한 이 프로그램은 직접 참가자들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서예를 할 수 있는 판을 마련했고 참여를 ‘권유’했다. 배우고 싶은 사람만 있다면 그곳이 바로 대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숙자들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주는 행사도 진행했는데, 단순 무료 배식은 아니었다. 노숙자에게 말 한마디 걸어본 적 없는 지역주민들이 직접 그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게 취지였다. 이를 통해 새로운 모임이 탄생하기도 했다. 의료시설, 복지시설과 노숙인 또는 생활보호대상자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도 맡았다. 

▲ 시인 우에다 카나요. ⓒ 제주의소리

카나요 시인은 “코코룸의 방식은 단순히 ‘여기서 지원해주겠다’가 아니다”라며 “술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과 인사하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들의 삶에 뚜껑을 덮거나 마침표를 찍어버리지 말았으면 한다”며 “코코룸은 ‘표현’으로서 사회 관계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탐구하고 있다. 자발적인 연결점을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코코룸의 지난 14년을 정량화된 성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지만 ‘삶의 모습’에 집중한다면 놀라운 변화도 있다.

이전까지 아이린지구의 나이든 취약계층들은 혼자서 죽어갔다. 그런데 코코룸이 일정한 커뮤니티를 조성하면서 변화가 감지됐다.

온전히 홀로, 가족과 이웃들 없이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던 이 거리의 노인들이 생을 마감하면 주민들이 장례식이 열었고, 커뮤니티를 통해 생겨난 지인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추도하는, 어쩌면 다른 곳에서는 당연했던 생활문화가 이곳에도 시작된 것이다.

70대의 노숙자 안도 씨의 이야기도 주목할 만하다. 2008년 매일 5번 이상 코코룸을 방문했던 그는 소위 '트러블메이커'였다. '였다'라는 건, 지금은 트러블메이커가 아니란 얘기다. 

가만히 있다가도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시비를 걸거나, 이유없이 카페에 앉은 옆 사람을 도둑이라고 몰아세우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코코룸의 스텝들에게도 안도 씨는 골칫덩이였다. 결국 스텝들 사이에선 ‘저 사람은 코코룸에 오지 못하게 해야될 것 아니냐’는 불만도 나왔지만 카나요 시인은 '더 기다리자'고 스텝들을 설득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흐른 어느 날, 안도 씨는 코코룸이 진행하는 ‘손편지 쓰는 워크숍’에 참가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다. 그동안 다양한 커뮤니티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때마다 거부 반응을 보였던 그가 제 발로 '손편지 워크숍'에 참가하겠다고 한 건 일대 사건이었다.  

카나요 시인은 이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그제서야 안도 씨가 글을 모르는 문맹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동안 왜 숱한 권유에도 그 많은 프로그램을 거부해왔는지 알게 된 것이다. 비록 늙은 노숙자였지만 자존심 만큼은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코코룸은 이번에도 천천히, 서서히 접근했고 가르치기 보다 '들어주는' 일에 무게를 뒀다. 안도 씨는 글과 그림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변화는 또 있었다. 프로그램 참여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자신이 모은 돈으로 코코룸 스텝들에게 밥을 사주는 일도 생겼다. 

카나요 시인은 “표현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 표현, 얘기를 들어주는 공간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준 게 바로 안도 씨”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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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숙자였던 안도 씨의 글과 그림은 코코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객실 중 한 곳에 전시돼있다. ⓒ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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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코코룸이 운영하는 카페 겸 게스트하우스. ⓒ 제주의소리

지속가능성은 여전한 숙제

코코룸의 등장 이후로 아이린지구에 새 가게들이 생기는 반전도 이어졌다. 거주자들의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이 일대가 활력을 띄기 시작했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단순한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외면받던 아이린지구가 활기를 띄기 시작하자 중국자본이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실 아이린지구는 간사이 공항과 오사카를 잇는 지역에 위치한 만큼 ‘노른자위’라고 부를 만하다. 3~4년 전부터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고 초고층 건물이 들어섰다. 중국자본들의 투자는 가속화됐다. 자연스레 이 일대의 땅값도 오르기 시작했다. 일용직 노동자들의 쪽방은 여행객들을 위한 호텔로 리모델링됐다.

코코룸이 위치한 골목도 자본의 습격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중국자본이 건물들을 통째로 매입한 뒤, 여성들을 채용해 ‘가라오케’를 대거 만들기 시작했다. 기자가 이 거리를 지날때도 호객하는 여성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그러자 차 마시고 예술을 향유하던 코코룸의 취약계층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도 ‘1곡에 100엔’짜리 가라오케에서 술과 노래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래서 코코룸도 차와 커피 판매 수익이 자연스럽게 떨어지자 경영난을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게스트하우스를 열어 돌파구를 모색했지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다고 했다. 이곳도 멀지않아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본격화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었다.

무법천지처럼 여겨지던 슬럼가에 NPO 코코룸이 들어선지 14년. 예술로 시작된 지역의 변화는 분명했지만 이제 다시 새로운 걱정을 해야한다. 그래서 그녀의 도전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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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린지구를 걷다보면 '1곡 당 100엔'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가라오케를 쉽게 볼 수 있다. 대부분이 3~4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중국자본이 이 거리에 진출하면서 생겨난 업소들이다. ⓒ 제주의소리

시인 카나요가 아이린지구로 향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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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우에다 카나요. ⓒ 제주의소리
나라 현 요시노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카나요 씨는 18살 때 쿄토생활을 시작해 30살 때 까지 예술가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2000년대 들어 일본사회에는 한 때 ‘시 낭독 붐’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관련 모임에 참석하게 된 이 여성시인은 시인을 꿈꾸는 한 어린 청년을 만나게 된다.

‘시인으로 살고 싶다’는 얘기에 ’ 그러지 말라. 무리다’라고 충고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시인만 해서는 경제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카나요 씨는 그 충고를 해줬던 청년이 좌절끝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큰 충격과 후회에 휩싸인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 뭐든 도전해야 한다고, ‘시인으로서의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졌다. 코코룸을 만든 이유다.

“일본사회 전체의 홈리스들을 무작정 내쫓는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려는 게 이젠 일본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홈리스, 생활보호대상자는 과거엔 ‘일하지 않은 채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들을 위한 장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들리게 되고 서로 얘기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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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코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겸 카페. ⓒ 제주의소리

그녀의 삶의 궤적은 배제가 아닌 예술을 통한 ‘사회적 포섭’이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는 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됐다. 예술을 통한 도시재생, 예술과 원도심의 접점을 어떻게 찾을지 타 지역에도 힌트가 될 수 있다.

“코코룸은 그들이 원하는 게 뭔지 찾아내려 했습니다. 술 대신 ‘관계’를 선물하려 노력했습니다. 홈리스의 첫 인상은 ‘무섭다’는 것인데 코코룸은 홈리스가 ‘재미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코코룸은 그냥 느슨한 장소, 편한 장소라는 게 목표입니다. 홈리스들에게 집은 줄 수 없어도 마음은 채워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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