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15) 호미의 훈장 / 정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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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을 마친 호미. ⓒ 김연미

제초작업 마치고 돌아가는 바구니 속에
고추 한 줌, 깻잎 한 줌, 숨 돌리는 햇살 한 줌
고단한 호미자루도 다리 뻗고 누웠네

나대던 호미질도 그때서야 철이 들고
결마다 앉은 더께 훈장처럼 빛날 무렵
저녁 해 돌담 사이로 눈 마중을 나왔네

-정미정, <호미의 훈장> 전문-

무엇을 심어도 잘 자라주지 않는 텃밭에 상추와 고추가 실하다. 자애로웠던 날씨는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된 듯 물이 모자란 데는 아주 모자라게, 물이 많은 데는 아주 많게, 기분 내키는 대로 패악질을 하는 날씨 속에서도 올해 나의 텃밭 농사가 이만하면 반은 성공이다. 

야들야들한 상추를 살며시 뜯어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이파리가 뜯겨져 버릴 것 같아 손가락 끝에 집중을 하고 힘을 주면, 하얀 진액을 쏟으며 떨어져 나오는 상추. 차곡차곡 몇 장을 더 뜯고 나서 옆에 있는 고추대에 시선을 옮겼다. 오이고추와 맵지 않은 고추, 그리고 청량고추를 몇 번이고 구분하면서 사온 모종 몇 개였다. 

뙤약볕에 배배 말라가다가, 그 약해진 몸이 감당하기엔 걱정이 될 정도로 바락바락 쏟아지는 비 몇 번 받고 나서 기적처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것이다. 주어진 환경을 끝까지 버텨내는 게 이들이 살아가는 방법. 

열일곱 살 처녀의 살결 같은 상추와 고추를 담고 나도 시인처럼 그 옆에 호미를 놓아본다. 하루의 노동을 마무리하는 시인의 숭고한 행동과는 거리가 멀지만 가장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시인의 의도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노동에 힘들었던 것은 시인이었지만 저의 피로보다 호미의 고단함을 먼저 챙기는 시인이다. 물론 호미의 고단함이 시인의 고단함을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마음 씀이 예쁘다. 
 
잡초 몇 포기 뜯어내면서 묻은 흙이 연두빛 상추 이파리를 더 청량하게 만든다. 보기만 해도 아삭아삭 소리가 느껴지는 오이고추. 지나가던 벌레 한 마리 앵글 안에 멈춰 서서 저도 이 지역의 터줏대감임을 표한다. 깨끗이 씻어 물방울 방울방울 묻어 있는 채 식탁에 오른 상추와 고추가 있는 풍경. 생각만 해도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이 인다. 시인처럼 하루 종일 노동을 하고 난 뒤의 피로감과 그 피로감 결결에 스며있는 희열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만하면 그 느낌의 실마리 하나쯤 잡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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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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