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 소재 시집 《해녀들》 발간, 실제 인물들 사연 소개...“시(詩)의 운명 타고난 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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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에 대한 인식은 최근 들어 상전벽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는 부끄러움에서 이젠 전 세계가 기억해야 할 문화유산 위치에 올랐다. 섬 해녀가 모두 모인 협회가 출범하고, 국제회의 같은 여러 행사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해 발언하는 모습에 새삼 달라진 위상을 느끼게 한다. 

연장선상에서 제주해녀를 조명하는 예술 작업 역시 각 분야에서 이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회화에서 사진, 그림책, 다큐, 극 영화, 뮤지컬 등으로 확장하고, 지역 출신 작가는 물론 국내·해외작가들까지 해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동네 심방’ 무시하는 분위기는 온데 간 데 없어진 모양새라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드는 아쉬움은 숨길 수 없다. 

분명 외연은 쭉쭉 넓어지고 있지만 '깊이 있는 통찰도 함께 이뤄지고 있냐'는 물음에 흔쾌히 동감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너도 나도 제주해녀를 다루겠다는 분위기는 반갑지만, 동시에 해녀들의 삶과 고뇌, 가치를 파고들고 관통하는 작품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진다. 당연히 그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도 말이다. 이런 점에서 허영선 작가가 13년 만에 펴낸 세 번째 시집 《해녀들》(문학동네)은 주목할 만 한 해녀 예술작품이다.

새 책은 차례를 펴는 시작부터 ‘역시 허영선 답다’라는 말이 나온다. 

제민일보, 제주4.3연구소를 거치면서 제주, 일본을 두 발로 누비며 4.3 유족들의 말 못할 고통을 어렵사리 세상에 꺼내 보인 저력은, 실제 해녀 21명 이름을 작품명으로 내건 1부 ‘해녀전’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석사 논문 <제주 4·3시기 아동학살 연구>를 비롯해 《탐라에 매혹된 세계인의 제주오디세이》,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애기해녀 옥랑이 미역따러 독도가요!》 등 제주에 대한 꾸준한 연구·집필 활동과 등단 37년차 작가(1980년 《심상》)로서의 원숙한 감성은 모든 해녀들의 심정을 대변한 2부 ‘제주 해녀들’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해녀 김옥련, 고차동, 정병춘, 덕화, 권연, 양금녀, 양의헌, 홍석낭, 문경수, 강안자, 김순덕, 현덕선, 말선이, 박옥랑, 고인오, 김태매, 고태연, 매옥이, 장분다, 김승자, 오순아.

실명을 당당히 박아 넣은 작품에는 페이지를 쉽게 넘기기 어려운 무게감이 있다. 물 안에서도 물 밖에서도 고달픈 일상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항쟁, 4.3, 재일교포 등 제주의 한(恨) 맺힌 역사에 휘말린 해녀 개인사를 담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칫 피상적인 이미지나 생활 방식에 갇힐 수 있는 해녀의 존재감을 넓고 깊게, 그리고 보다 힘 있게 만든다. 연구자, 작가로서 평생을 살아온 '허영선'이기에 가능한 접근 방식이다. 

북촌 지나 동복리 4.3추모비 한 편
도쿄 신오쿠보 골목 어귀 작은 방,
땡볕 속에 만난
그녀, 이름 있다
성금 오백만 원 새겨져 있다
‘재일교포 정병춘’

어려서 왼눈 잃은 바다새였네
열여섯에 검은 바다 건넜네
쓰시마 물질 그도 모자라
도쿄 한복판 일본 감옥소 
서른 번 마흔 번도 모자라게
드나들었던,

끝내 흔들리지 않았네
흔들려도 흔들릴 뿐
무너지지 않았네

외눈으로 세상을 닦았다네
외눈으로 폭풍 치는 바다 건넜네

그 이름 
하루코

해녀 이름 
정병춘

<해녀 정병춘*>
* 다큐멘터리 영화 <하루코>의 주인공. 2017년 현재 96세로 도쿄에 살고 계시다.)


남자들이 모두 핏빛 바다로 떠난 그날 이후
북촌* 여자들은 물질할 수 없으면
바다를 떠나야 했다.

그날 이후
북촌 여자들은 온통
바위섬을 건너야 했다

한 입과 입을 위해
언물에 몸을 밀어넣었다
온 힘 다해 쌓이고 쌓이는
폭설 같은 사랑을 쏟아부었다

빈 가슴 
안 먹고도 바닥까지 갈 수 있는 힘줄 만들었다
하루 일당 못 벌면 콱 죽을 것만 같아
가슴속 열꽃 식히지 못해
섬과 섬 너머서 사생결단 벌였다

모두가 대군**
물질 끝나 돌아가던 통통배
순간 한 치 눈치챌 수 없이 매복하던
강골의 바람살

물위 물 아래 위태위태하더니
엎어지고 까무라치고 부서지더니

북촌 해녀 너도 나도 혼 줄 모아
기댔다 두렁박 하나에
등대처럼 기다리는 힘 하나
파도 건너 또랑또랑
어린 입, 입들

<북촌 해녀사>
*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현대사의 비극 제주4.3항쟁 당시 주민 540여명이 희생당한 4.3집단학살의 상징 마을이다.
** 해녀 중 물질 기량이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대상군이라고도 함. 상군, 중군, 하군이 있다.


▲ 허영선 시인. 제공=허영선. ⓒ제주의소리

책 펴낸 소회를 실은 ‘산문’을 읽다보니 놀라운 기시감을 느꼈다. 몇 년 전 4.3 역사탐방으로 찾아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4.3 당시 주민들의 사연을 듣고 난 뒤 함께 했던 김수열 시인은 기자에게 “저런 이야기 자체가 시 작품이다. 말한 그대로 옮기면, 바로 시가 된다”고 감탄 섞인 소감을 던졌었다. 

신기하게도 허영선 작가는 산문 말미에 “바다에 드는 순간부터 시였다. 그들은 물에서도 시를 쓴다. 시의 운명을 타고났다. 그들의 어머니의 어머니도 시였다. 나는 그들의 시를 받아 적는다”라고 밝힌다.

두 사람의 공통된 인식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다. 4.3, 해녀, 나아가 제주는 그 자체로 시가 된다. 예전에는 소수만이 가치를 알았다면, 이제는 보다 많은 이들이 제주와 제주다움에 눈을 떴다. 오래 전부터 해녀 시집을 준비했다는 작가는 단지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글로 옮겼을 뿐이라고 겸손해 한다. 그러나 누구보다 먼저, 크게 눈 뜨고 제주다움을 찾아나선 한 길을 걸어왔기에 《해녀들》은 묵직한 울림이 있다.

고은 시인은 책 추천사로 “가슴 복받치며 읽고 나니 저 불란서 시가 건달로 보였다. 서울의 수많은 에고 시편들도 내 시도 유죄였다”, “이제서야 제주도의 삶으로부터 제주도의 시가 세상의 형식 위로 솟아올랐다”며 한껏 감격적인 소감을 썼다. 책을 읽기 전 ‘표현이 너무 과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기고 나니,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감탄에 작은 공감을 더하게 됐다.

1957년 제주에서 태어난 작가는 1980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제주민예총 회장, 제주4.3평화재단 이사를 역임했고 현재 제주4.3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제주대학교 대학원 한국학협동과정 석사,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저서로 시집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뿌리의 노래》, 역사서 《제주 4.3》,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구술집 《빌레못굴, 그 캄캄한 어둠속에서》, 《그늘속의 4.3》(공저), 수필 《섬, 기억의 바람》, 대담집 《탐라에 매혹된 세계인의 제주오디세이》, 그림책 《바람을 품은 섬 제주도》, 《워낭소리》, 《애기해녀 옥랑이 미역따러 독도가요!》 등을 펴냈다. 

95번까지 나온 문학동네 시인전 작가 가운데 유일한 제주 출신이다.

문학동네, 116쪽,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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