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시집 《물에서 온 편지》 발간...59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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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열 시인이 최근 새 책 《물에서 온 편지》(삶창)를 펴냈다. 여섯 번째이자 지난 2015년 《빙의》로부터 만 3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시집이다. 다만, 《빙의》 원고를 출판사에 건네주고 나오기까지 걸린 365일을 더하면 간격은 4년으로 벌어진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작가의 주변 환경도 그 사이 제법 달라졌다. 직전 《빙의》가 교직 생활을 마치고 제2의 삶을 막 시작하는 시기에 나왔다면, 《물에서 온 편지》는 제주도 문화예술위원장, 제주작가회의 회장 등 제법 부담감 있던 일을 마쳤거나 마치는 시기와 겹친다.

다작과는 거리가 멀다 해도 최근 몇 년 동안 김수열이란 이름 세 글자는 시 보다 회의, 포럼, 세미나에서 만나는 날이 많았다. 낫질을 하다가 왼손 검지를 베면서 “아직도 내가 나를 모른다”고 읊조린 책 머리 시인의 말에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역 문화계에서 만만치 않은 역할을 떠 맡아온 지난 시간에 대한 홀가분한 감정이 묻어난다.

《물에서 온 편지》는 4부로 나눠 시 59편을 실었다. 책은 자신의 시에 거추장스러운 데가 많다는 자조 섞인 <알몸의 시>부터 시작해 다소 편안한 느낌의 흐름을 이어간다. 세상 편한 자세로 낮잠 자는 고양이, 그리운 학교 제자들, 제주에만 있는 잔치커피, 추억 속의 선술집 아줌마에 대한 작품을 읽다보면 휘적휘적 긴 걸음과 함께 농담을 던지는 시인 모습이 떠오른다.

잔치커피

김수열

섬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도
잔치커피를 마신다
달짝지근한 믹스커피를
섬사람들은 잔치커피라 하는데
장례식장에 조문 가서 식사를 마치면 
부름씨하는 사람이 와서 묻는다
녹차? 잔치커피?

잔치커피, 하고 주문하는 순간
장례식장 ‘장’자는 휙 날아가고
순간 예식장으로 탈바꿈한다
명복을 비는 마음이야 어디 가겠냐만
왁자지껄 흥성스러운 잔치판이 된다
보내는 상주도 떠나는 망자도 덜 슬퍼진다

섬에서는 
죽음도 축제가 되어
섬에서 죽으면
죽어서 떠나는 날이 잔칫날이다
망자 데리러 온 저승사자도
달달한 잔치커피에 중독이 된다

많은 제주 시인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제주어와 제주 역사를 최대한 온전히 글로 옮기는 작업을 중요시 한다. 

낯선 이가 보기에는 이질적으로 느낄 만한 개성이지만, 고유한 삶과 문화를 품은 독특한 언어. 그리고 섬이라는 단절의 공간 속에서 유래 없는 잔혹한 학살을 경험한 역사 모두 그 자체로 문학적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아닐까.

특히 제주4.3의 경우, 《빙의》에서도 그렇듯 역사의 현장과 체험자들을 직접 마주하면서, 가슴 깊은 시 언어로의 정제 작업을 거친다.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은 읽는 사람에게 오랜 여운을 가져다준다.

갈치

김수열

 전쟁 나고 얼마 어신 때라났수다 군인들이 들이닥쳔 효돈사람 볼목리 사람 다시 불러 모았덴 헙디다 며칠 가두었단 어느 야밤에 맨들락허게 벗긴 채 발모가지에 듬돌 돌아매고 배에 태완 바당더레 나가더라 헙디다 범섬 돌아 나가신디 배만 돌아오더라 헙니다 퍼렁헌 달빛만 돌아오더라 헙디다

 그해 가을 범섬 바당 갈치는 어른 기럭지만이 컸덴 헙디다 하도 컨 징그러완 먹을 수가 없었덴 헙디다 그 후젠 갈치만 보면 가슴이 탕탕 튀더라 헙디다

시인은 “난 미리 준비해서 이걸 써야겠다고 몰두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TV뉴스나 신문을 보거나 사람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것이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있다. 써보고 난 뒤에 가만히 지켜보면 그게 시가 되는 경우가 많다”며 “내가 억지로 의미를 부여해서 만들어낸 것 치고 잘된 것이 없다. 바람이 해준 이야기,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등을 액면 그대로 가져다 옮겨 놓으니 독자들이 감동하는 것 같다. 독자는 김수열을 만나는 게 아니라 시 속의 대상과 바로 만나는 셈”이라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이번 시집 해설을 쓴 김동현 문학평론가는 “시인은 말하는 자의 언어를 옮겨 적는 것이 비극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음을 자각한다. 증언을 전달함으로써 시인은 과거와 현재를 매개한다. 과거의 기억은 그렇게 현재로 스며든다. 이를 ‘스며듦의 시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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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열 시인이 자신의 여섯 번째 시집 《물에서 온 편지》를 최근 펴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김수열 시인은 올해를 끝으로 제주작가회의 회장마저 내려놓는다. 다소 홀가분해질까 싶지만, 내년으로 앞둔 4.3 70년을 준비하는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떠안았다. 여기에 문학인 대회, 제주문학관 등 제주 문학을 위한 일들도 계속 신경 써야 하는 처지다. 자칫 시력(詩力)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시인은 특유의 허허실실 웃음으로 답한다.

“나고 자란 섬에 대해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당시 쓴 시를 보면 지나치게 반응했다는 인상이 역력하다. 내가 반드시 해야겠다는 심적인 부담도 있었다. 이제는 그런 것에서부터 자유로워 졌다. 그냥 써진다.”

1959년 제주 출생인 시인은 198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바람의 목례》, 《생각을 훔치다》, 《빙의》, 《물에서 온 편지》가 있다. 산문집 《김수열의 책읽기》, 《섯마파람 부는 날이면》도 썼다. 오장환문학상(2011), 신석정문학상(2016)을 받았다.

삶창, 120쪽,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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