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비엔날레-탐라순담(耽羅巡談)] (18) 정영신 제주대 SSK연구단 전임연구원

제주비엔날레 2017 프로그램 중 하나인 ‘탐라순담’은 탐라 천년의 땅인 제주도의 여러 인물들과 함께 토크쇼·집담회·좌담회·잡담회·세미나·콜로키움·거리 발언 등 다종다양으로 제주의 현안과 의제에 대해 이야기(談)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누구나 주인공이자 손님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는 12월 31일까지 약 50회에 걸쳐 ‘제주 하간듸’(많은 곳)서 ‘제주 사름’(사람)이 ‘제주를 곧는’(말하는) 탐라순담이 열립니다. 제주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의 여러 담론 속에서 제주의 가치, 제주의 현안을 길어 올리고 사회적 예술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탐라순담[耽羅巡談] 열여덟 번째 순서는 제주비엔날레의 코스인 알뜨르비행장에 자리를 펼쳤다. 

정영신 제주대 SSK연구단 전임연구원이 ‘알뜨르에서 나누는 동아시아, 역사, 평화의 이야기마당’을 주제로 알뜨르 일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날 탐라순담에는 10여 명이 참여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부터 일본은 모슬포 주민들의 강제노역으로 알뜨르에 군사용 비행장을 조성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사 전초기지로 활용됐다. 20개의 격납고 가운데 19개가 그대로 남아있다. 

한국 전쟁이 끝나자 주민들은 격납고 사이의 농지에서 다시 농사를 지으며 터전을 되돌려놓았다. 들판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산방산과 송악산, 단산 등 수려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냥 평화로워 보이는 이 경관에는 난징에서 학살된 민중들이, 미군기지로 삶터를 빼앗긴 오키나와의 민중들이 겹치고 포개어진다. 
  
군사기지로 쓰이기 시작한 알뜨르비행장은 9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주체가 바뀌었을 뿐 군사화와 폭력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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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순담[耽羅巡談] 열여덟 번째 이야기꾼인 정영신 제주대학교 SSK연구단 전임연구원. ⓒ제주의소리

정영신 제주대 SSK연구단 전임연구원
:  얼마 전에 성주에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가 배치가 되었다. 박근혜 사드 배치를 강력하게 비판했던 대통령이 강행을 해서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보면서 평화를 실천하는 것, 우리가 어떻게 사고를 해 나가야할 것인지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하고 있다. 여기 알뜨르에 최초로 군사유적이 생긴 걸로 따지면 90여 년의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주체를 달리 하며 갖가지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고 유적을 만들기도 한 것이다. 왜 그런 흐름이 계속되었는지, 그런 흐름을 이제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평화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 지역을 둘러보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김응용 제주비엔날레 프로젝트 매니저
: 제주비엔날레가 열리는 가운데 이 스폿의 주제는 강제 노역을 당해서 돌아가신 분들을 ‘별’로 보고, 격납고를 행성으로 봤다. 알뜨르 행성 탐사가 부제이다. 하나의 격납고는 부서져있고 스무 개 중 여덟 개에 작품이 있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코스이다.

<알뜨르비행장 인근에서>

정영신
: 저 모슬봉 위에 보이는 건 레이더 기지이다. 한국 전쟁부터 군사 기지로 사용하다가 원래는 통신 시설과 레이더 기지만 있다가 나중엔 미군들을 위한 휴양 시설을 같이 만들어서 소규모 부대 단위로 와서 유격훈련을 하고 마지막에 다양한 레크레이션을 즐기다 돌아갔다는, 그래서 2002, 2003년부터 한국군과 미군 사이에 국내 미군 기지를 통폐합하고 재편하는 계획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에 반환이 됐다. 공군이 관리를 하고 있다. 

1926년부터 알뜨르비행장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10년에 걸쳐서 1차적으로 만든다. 알뜨르비행장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게 1937년에 중일 전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오무라 해군 항공부대가 난징을 폭격하고 제주로 날아온다. 일본과 중국까지 비행 거리가 멀기 때문에 제주에 상주하면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지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2차 확장을 시도한다. 3차로 확장하는 것은 1944~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밀리는 상황에서 오키나와를 비롯해 제주도를 방위를 위한 군사기지로 만들면서 중요한 지역으로 지정이 되었다. 대규모 항공 기지를 건설하려고 했던 것이다. 
확장된 기지가 있으니 이곳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역사적으로 죽 있어왔다. 베트남 전쟁 때 한 번 있었고, 1980년대 후반에 있고 1990년대 이후로는 시도 때도 없이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1960년대 말에는 오키나와에서 미군이 철수하려고 하자 박정희 정권에서 자신들에 대한 안보 위협으로 봐서 오키나와 기지가 철수하면 제주도로 유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만약 그 때 기지가 유치되었다면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이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키나와 민중들이 기지 철거를 요구했던 흐름은 결국 실패했다.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르고 지나갔지만, 엄청난 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오키나와 민중들에게 군사기지를 남겨놓으면서 제주도는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알뜨르비행장에서 우리가 생각해봐야할 부분이다. 이곳은 난징 민중들을 학살하는 기지로, 오키나와 기지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지금의 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적어도 알뜨르비행장을 보면서 연결돼 있는 많은 것들을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평화로운 풍경만 가지고 평화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최근에는 남부탐색구조대를 그래서 새로 공군 부대를 창설하려는 계획이 속속 나오고 있고 알뜨르에서 이착륙 훈련까지는 아니더라도 착륙 전 단계까지인 비행장 접근 훈련을 해마다 공군이 실시하고 있다. 그런 점들이 우려되는 부분이다. 강정에서 지켜보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상 
: 매년 12월 13일에 난징 대학살을 추모하는 기념식을 알뜨르 주변에서 가지고 있다. 올해도 진행할 예정이다. 혹시 지금까지는 추모식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모은다면 다채로운 형태로 기억하는 방법을 모아볼 수 있지 않을까? 관심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

정영신
: 1988년에 송악산에 군사기지 반대투쟁이 벌어진다. 제주시민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투쟁이었다. 1990년까지 투쟁이 계속되었다. 국방부에서 장차 이 땅을 반환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아직까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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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정호 작가의 '무지개 진지'. ⓒ제주의소리

<옥정호 작가의 ‘무지개 진지’ 앞에서>

김응용
: 7년 전에 박경훈 작가가 했던 작품 앞에 옥정호 작가가 무지개 진지를 만들었다. 진지는 원래 은폐, 엄폐를 뜻한다. 그 진지가 무지개 색을 띠고 있다면 진지의 목적을 상실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전 세계 모든 진지가 무지개로 칠하면 전쟁은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제로센은 미야자키 하야오 <바람이 분다>에 나온다. 태평양 전쟁에 가장 많은 전투기 기종이다. A6M이다. 나가사키서부터 난징을 폭격하고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기착지로 알뜨르를 삼았던 것이다. 하와이의 진주만 폭격을 해야 한다, 가볍고 멀리갈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라고 한 게 제로센이다. 조종사를 보호하기 위해 있던 걸 없애고 연료통이 타는 걸 방지장치를 했던 걸 없어서 조종사들이 가장 몰기 싫어했던 기지라고 한다. 

정영신
: 일본에서는 자신들의 무기가 기동성이 뛰어났다고 아직까지 이야기를 하는데, 조종사를 보호하는 장치를 떼어버린 결과였다. 공중전을 하면 숙련된 조종사들이 되게 많이 죽었다. 나중엔 신병들만 남아서 군사기술의 합리성을 추구한 결과가 그런 식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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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뜨르비행장 격납고에 설치되어 있는 강문석 작가의 '메이데이'. ⓒ제주의소리

<강문석 작가의 ‘메이데이’ 앞에서>

김응용
: 강문석 작가는 땅에 꽂힌 제로센 전투기를 형상화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메이데이라는 작품이다. 과거의 잔재와 노란 리본을 덮어서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관람객들이 많이 와야 노란 리본으로 뒤덮일 텐데, 작가가 안 덮일까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 작품에 노란 리본을 많이 달아주면 좋겠다.

정영신
: 원희룡 지사가 제주비엔날레 개막식에서 행사가 끝나도 설치물 3년 동안 놔둘 수 있게 하겠다는 발언을 했던데?

김응용
: 3년을 전시하려면 작품 보수를 해야 한다. 수정도 하고 보완도 하고.

엄문희
: 그런 걸 제주도민들이 원하는지 의견 수렴은 되고 있나?

김응용
: 제주비엔날레 하기 전에 마을미술프로젝트에서 알뜨르비행장에 그런 요청을 한 적이 있다. 그 때도 3년이었다. 주민들에게 설명회를 하고, 서명도 받았다. 그게 무산되면서 제주비엔날레로 넘어 왔고 3개월로 다시 시작이 됐다.

<전종철 작가의 ‘경계선 사이에서’ 작품 앞에서>

김응용
: 이 알뜨르비행장이 지어질 당시만 해도 아치형 격납고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석조에서도 아치가 만들기 힘든데, 이 정도 규모의 기둥을 세워버리면 비행기가 왔다갔다할 수 없다. 하중을 양쪽에 두고 격납고에 드나들 수 있게 하는 구조다. 이게 80년이 지나도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건 설계가 잘 됐고, 튼튼히 지었다는 증거다. 
이 용도가 은폐하기 위한 용도이기에 아치형 위에 잔디를 심었다. 그것도 강제 동원으로 해놓은 것이고, 80만 평에 연인원 7만 명이 동원돼서 강제 노역으로 이뤄졌다. 군함도 영화도 있지만 그에 맞먹는 강제 노역이 있었다. 

정영신
: 역사유적에 가급적이면 아무 훼손도 가하지 않고 작품을 전시할 수는 없었을까? 너무 많이 바꿨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
: 일반 관람객들이 와도 이렇게 투어를 해주나? 지역의 역사적인 맥락과 떨어질 수 없는 장소에서 작가들이 아닌 비엔날레 기획단에서 창작물들이 여러 군데 있는 이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나?

김응용
: 준비가 되어 있다. 가이드 2명이 상주해 있다.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할 예정이다. 걸어서는 관광하기는 다소 힘드니, 전동 휠이나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다. 

정영신
: 이 대정읍에 한국 전쟁 당시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거제도에 있었는데 전쟁이 길어지다 보니 다 수용할 수 없으니 전국에 만들기 시작했다. 대정에는 제3포로수용소, 제주공항 바로 위에 해안가 카페촌에는 제8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제8포로수용소에는 한 5천여 명, 이 지역에는 세 구역에 걸쳐 1만4000명 정도 수용됐다. 1952년 4월부터 1953년 10월까지 1년반 사이에 2만 명이 수용됐다. 중국 대륙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는 반공포로라는 사람들이 있고, 제주공항쪽에는 이른바 친공 포로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군들 일지를 보면 사람들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많이 죽었고 자살하는 사람이나 부당한 대우에 시위하다가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여기에서 고생하고 돌아가서 대만으로 간 사람들도 있다. 지금은 관리가 되어있지 않고 밭 한가운데 벽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섯알오름을 보더라도 그렇고 한 번 군사지역으로 설정되었던 곳이 점령하는 사람들이 바뀌지만, 활용하는 목적도 달라지더라도 유사한 용도로 사용되면서 군사화, 폭력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는 곳이 알뜨르이다. 이곳에서 평화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군사화나 폭력의 역사를 상상해보고 감수성을 기르기에는 좋은 곳이다. 

김다빈 
: 왜 격납고만 남았을까? 남겨진 건지? 남긴 건지?

정영신
: 일본군이 만든 시설들 전체가 어떻게 배치돼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남아있고, 발굴된 자료만 가지고 볼 수밖에 없다. 주요 건물들은 격납고와 오다가 잠깐 말씀드렸던 9연대 사령부 시설, 지하벙커 등이 있다. 장기적으로 주둔하려던 곳이 아니라 당장 닥친 전투를 준비하기 위한 시설이기 때문에 송악산에 가면 해안진지동굴도 있고 섯알오름엔 비행장을 방어하기 위한 포대 터가 있다. 

김우용
: 당시 제주 인구가 20만 명이라고 하는데 알뜨르비행장 짓는데 7만 명이나 동원되었다면 어마어마한 것 아닌가?

정영신
: 연 인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전 자료들을 보면 젊은이들은 징용이나 일자리를 찾아 많이 나갔고, 나이든 어르신들이 곡괭이 하나만 주고 동굴을 파게 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갱도 안에서 곡괭이로 동굴을 만들다가 워낙 힘드니 일을 안 하기 위해 자해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르신들이 다치니 손자들을 데리고 와서 대신 일하게 시키고 했던 구술 자료들이 남아있다.  
 
홍명교
: 제주비엔날레는 끝날 텐데 사람들이(관광객들이) 오고 가는 이 역사적인 곳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료라도 있어야 사람들이 난징을 생각하고 평화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항상 가이드가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구준모
: 이 주변을 올레 코스로 지나가곤 했었다. 그 때는 4.3 유적이나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비행장이 있던 곳이라는 것 정도만 알았다. 오늘 와서 여러 가지 동아시아, 나아가서 필리핀과 동남아. 연관되어 있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폭력, 군사기지, 전쟁 등 여전히 동아시아에 다른 지역에 우리 스스로 연결시켜서 사고하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내가 그 동안 너무 피상적으로 보고 지나갔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익한 시간이었다.

엄문희 
: 다크 투어리즘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 용어도 불편하기는 하다. 알뜨르의 이야기가 지나간 역사라고 보기보다는 지금과는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지금은 그런 양상이 어디서 진행되어 있는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상
: 알뜨르에 오거나 강정 마을에 있을 때에 일련의 사건들이 국가나 민족, 혹은 시대의 문제로 구별되어질 수 없다는 인상을 많이 받고 있다. 하와이안 관광 도시나 지금 서울의 어떤 곳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는 것처럼 도심화 되는 제주에 묻혀있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 어떻게 감각되어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와서 이야기를 듣고 둘러보고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정영신
: 오늘 여러 이야기를 했다. 기존에 나와 있는 글들을 보면서 여기에 얽혀있는 사연을 보면  누군가 이곳을 처음 군사기지 용도로 사용하려고 만들었고, 그 용도가 끝났는데 누군가는 계속해서 이곳을 살리려고 하는 움직임이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다. 강정, 성산 등 제주도의 다른 곳에서 진행되는 군사화의 움직임과 이곳이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이용될까? 걱정도 많이 든다. 이곳에서 난징을 생각하고, 추념하는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상상으로 난징을 추념하는 매해 새롭게 바꿔나가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엄문희
: 강정에서도 탐라순담을 진행할 예정이다. 마을을 함께 걸으면서 지점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평화기행단이라는 여행 집단도 있고, 제주에 오면서 강정을 비롯한 여행하고 싶은 분들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 강정에 왜 와야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투어에 넣어버리기에는 너무 많은 결도 있다. 지금보다는 선선해질 때에 하게 될 것 같다. 그 이전에도 있고 지금도 있는 위협을 많이 받고 있는 장소에서 각자가 느끼고 얻어가는 게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마을에 얼마 전에 미술관이 생겼다. 공간의 기능은 다양하고 욱여넣고 싶은 게 많다. 그 곳에 관심 있는 많은 분들을 모아서 왜 강정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하나 더는 세월호와 관련된 어머니들이 전시를 하는데, 왜 강정이 밀양을 이야기하고 쌍용차와 함께하고 세월호와 함께 하는지 알 수 있다는 자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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